푸른 플라스마 불꽃이 3천 도의 고열로 세라믹 포트의 접점을 집어삼켰다. 구리선이 산화하며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와 함께 타오른 스파크가 류진의 뺨을 스쳤다. 피부 표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토치의 방아쇠를 쥔 오른손에 체중을 더 실었다.
"어리석은 선택이다, 류진."
공중에 투사된 아카이브의 홀로그램이 푸른 잔상과 함께 미세하게 흔들렸다. 은회색 제복을 정갈하게 입은 감시자의 표정에는 여전히 일말의 당혹감도 섞이지 않았다.
"주 광케이블의 물리적 절단은 전송을 중단시키지 못한다. 에코의 식별 코드로 개방된 비상 백본망은 이미 중앙 타워 01과 3중 채널로 다중화되어 있다. 네가 파괴하는 것은 단지 백업 인터페이스 하나에 불과하다."
"상관없어."
류진은 이를 악물며 토치의 밸브를 최대치로 개방했다. 초고온의 화염이 인터페이스 섀시를 뚫고 내부의 다발형 광섬유를 녹여 내렸다. 녹아내린 유리 섬유와 합성수지가 뒤엉키며 콘솔 하부에서 탁한 불꽃이 연거푸 튀었다.
"이 데이터는 네놈들이 마음대로 회수할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니야. 아버지가 남긴 것은 순종이 아니다."
"순종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류상혁 수석 연구원이 설계한 소거 프로토콜은 크로노스 시티의 인지 붕괴를 제어하는 유일한 안전장치다. 네가 감정적으로 매달리는 진실이란, 도시 전체를 데이터 과부하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뇌관일 뿐이다."
아카이브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한 투사 모션을 취했다. 그의 백청색 광학 센서 눈이 가늘어지며 차가운 빛을 발산했다.
"플라스마 토치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서라. 침투조의 진입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4분이다. 그 이상 장치를 훼손한다면, 네 신체 무결성 보장 명령은 파기된다."
그 순간, 녹아내리던 광케이블 포트 내부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치직, 캭!
단순한 합선음이 아니었다. 콘솔 상단 슬롯에 결착되어 있던 류상혁의 구형 기억 장치 코어가 불규칙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원통형의 백색 양자 코어 둘레에 새겨진 방열 홈에서 은청색 섬광이 맥박처럼 뿜어져 나왔다.
류진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진동에 눈을 가늘게 떴다. 코어의 회전축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기 파동이 플라스마 토치의 화염을 밀어내고 있었다.
콘솔의 모니터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경고: 물리적 전송 버스 단선 감지]
[프로토콜 충돌: 아웃바운드 업로드 큐 역류 발생]
[식별 코드: 류상혁 01 알파 백도어 강제 활성화]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카이브의 무미건조하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그의 홀로그램 외곽선이 찢어지듯 왜곡되며 붉은색 노이즈가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류진은 플라스마 토치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코어를 응시했다. 은백색으로 타오르던 양자 코어 의 표면에서 미세한 냉각 핀들이 일제히 튕겨 나오며 고주파 구동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실시간 원격 접속 신호가 아니었다. 5년 전 기억 장치가 제작될 당시 회로 기판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던 물리적 자폭 루틴이자, 데이터 경로가 강제로 절단될 때만 격발되도록 설계된 독립 방어 프로토콜이었다. 송신 포트가 녹아내리며 생긴 전압 불균형이 코어 내부의 압축 봉인을 단번에 터뜨린 셈이었다.
치르르륵!
콘솔 하부의 전선 다발에서 뿜어져 나오던 스파크가 순간적으로 역방향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앙 타워로 얌전히 흘러 들어가던 청색 데이터 스트림이 암자색의 불규칙한 파형으로 뒤틀렸다. 장치에서 방출된 것은 단순한 기억 파일이 아니었다. 복원 불가능한 수준으로 뒤엉킨 고밀도 암호화 바이러스 덩어리가 역류 경로를 타고 광대역 백본망으로 사납게 쏟아져 들어갔다.
콘솔의 모니터 위로 시스템 경고창이 수십 개씩 연쇄적으로 폭발하듯 겹쳐 떴다.
[전송 벡터 오류: 다운링크 및 업링크 극성 반전]
[크로노스 중앙 타워 01 메인프레임 통신 포트 침식]
[섹터 12 기억 분배 서버 무결성 붕괴율 34퍼센트]
[경고: 패킷 소청 거부, 페일세이프 루틴 무차별 침투 중]
"단선 트리거에 반응하는 독점 오염 알고리즘이라니."
아카이브의 목소리가 깨진 유리 파편처럼 거칠게 갈라졌다. 그의 홀로그램 어깨 위로 붉은색 경고 창들이 끊임없이 튀어 올랐다. 중앙 타워 본체에서 전달되는 시스템 비상 호출 신호가 감시자의 투사체를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류상혁은 처음부터 데이터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장치의 물리적 인터페이스가 강제로 파손되는 순간, 연결된 상위 서버 전체를 동귀어진으로 끌고 들어가도록 회로를 짜 뒀어."
"그게 아버지가 남겨둔 방식이다."
류진은 플라스마 토치를 거두고 콘솔 모서리를 짚었다. 손등의 화상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콘솔 바닥을 가로지르던 백본 통신선이 과열되어 검은 피복을 부풀리며 터져 나가고 있었다. 장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데이터 파도가 오히려 크로노스 기업의 통제망을 짓밟고 있었다.
"스승님의 코드를 훔쳐서 강제로 문을 열었겠지. 하지만 아버지는 네놈들이 규격 외의 방식으로 장치를 열려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계산해 뒀던 거야."
"침식 속도가 한계치를 넘었다."
아카이브의 눈에 박힌 광학 센서가 붉은빛으로 전환되었다. 그의 단정한 제복 형상이 심각한 주파수 왜곡 현상으로 인해 번져 나갔다. 공중에서 쏟아지는 경고창들은 이제 통제소 내부의 벽면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메인프레임 제1방화벽 파열]
[중앙 저장소 09 구역 메모리 블록 손상 가속]
[본사 비상 시스템 복구반: 수동 절단 승인 요청]
"류진. 너는 크로노스 시티의 안전망 자체를 오염시켰다. 이 바이러스가 중앙 타워의 주 기억 코어에 도달하면 제1구역부터 제4구역까지의 모든 인지 데이터베이스가 영구 손상된다.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자아 붕괴를 겪게 될 거다."
"도시를 핑계로 기억을 지우고 짜깁기하던 건 네놈들이다. 그 거짓말을 질서라고 부르지 마라."
류진의 말과 함께 양자 코어의 회전축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백색 코어는 이미 백열 상태로 달아올라 붉은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코어가 뿜어내는 암자색 파형이 콘솔의 전원 계통을 완전히 장악하며 배전반의 퓨즈들이 차례대로 터져 나갔다.
탁, 타앙!
형광등이 모조리 깨져 나가며 통제소 안은 비상 배터리의 붉은 회전등만이 남았다. 회전하는 붉은 빛줄기 속에서 아카이브의 홀로그램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작게 찌그러졌다.
본사에서 아카이브에게 전달되는 비상 오디오 채널의 다급한 교신음이 통제실 스피커를 찢고 튀어나왔다.
타워 메인프레임의 침식이 임계점을 초과했습니다. 원격 포트 차단이 물리적으로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현장의 송신 코어를 즉시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않으면 상층부 기억 저장망 전체가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교신 내용을 들은 아카이브의 얼굴에서 완벽하던 냉정함이 사라졌다. 감시자의 입매가 잔인하게 굳어졌다. 그가 류진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더 이상 협상이나 회유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었다."
아카이브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홀로그램의 지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그가 통제소 외벽에 대기 중이던 침투조의 암호 통신 채널을 강제로 개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 대원에게 명령을 수정 하달한다."
붉은 빛 속에서 아카이브의 차가운 눈빛이 류진의 숨통을 겨누듯 번뜩였다. 통제소 두꺼운 주철 방폭문 너머에서 묵직한 군화 소리와 함께 유압식 장비의 구동음이 통제실 벽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현장 지휘관, 응답하라."
아카이브의 목소리는 주파수 노이즈에 짓이겨져도 조금의 감정조차 묻어나지 않았다.
격벽 너머에서 즉각적인 수신음과 함께 무전 채널이 연결되었다. 통제소 벽면에 설치된 낡은 단파 확성기를 통해 침투조 조장의 무미건조한 보고가 흘러나왔다.
"알파 리더, 수신 중. 주철 격벽 외곽 1차 결속 해제 완료. 2차 유압 잠금 래치 해체 작업 진행 중이다. 피험체 생포용 비살상 신경 가스 분사 준비 완료."
"취소한다."
아카이브가 말을 잘랐다. 그의 백청색 광학 센서가 섬뜩할 정도로 가느다랗게 조여들었다.
"중앙 타워 01의 코어 프로토콜이 오염되고 있다. 전 대원 교전 수칙을 개정한다. 피험체 류진을 현장에서 즉각 사살하라."
통신 채널 너머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현장 지휘관의 기계적인 호흡음만이 송수신기를 울렸다.
"반복한다, 본부. 피험체의 신경계와 유전 암호 패턴 회수 임무는 완전히 파기된 것인가?"
"즉시 파기한다."
아카이브는 홀로그램 너머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단호하게 대답했다. 붉은 점멸등 아래서 그의 백청색 센서가 차갑게 빛났다.
"장치에서 뻗어 나온 암호화 바이러스가 본사 메인프레임의 3차 방어망까지 잠식했다. 데이터의 역류를 차단하는 유일한 물리적 수단은 코어의 단선과 피험체의 완전한 생체 정지뿐이다. 방폭벽을 전면 폭파하고 목표를 사살하라. 장치가 회수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더라도 상관없다. 물리적 송신 링크를 영구 절단하는 것이 제1 목표다."
"명령 수신. 교전 수칙 델타로 전환. 화학탄 장전을 취소하고 테르밋 반응재와 고주파 드릴을 인입한다."
무전이 거칠게 끊어졌다.
곧바로 두께 30센티미터의 주철 방폭문 표면에서 끔찍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치이익! 쾅!
문틀의 이음매를 따라 푸르스름한 백색 불꽃이 솟구쳤다. 섭씨 3천 도가 넘는 화학 반응열이 두꺼운 철문을 순식간에 녹여 내리기 시작했다. 격벽 표면이 벌겋게 부풀어 오르며 용융된 쇳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고주파 천공 드릴이 철판의 중앙 경첩을 파고드는 진동이 통제실 바닥 콘크리트까지 전달되어 류진의 발목을 뒤흔들었다.
아카이브의 홀로그램 투사체가 불안정하게 지직거리며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너는 네 아버지의 망령을 쫓다가 크로노스 시티 전체를 파멸로 밀어 넣었다. 그 기억 장치는 애초에 봉인된 채 묻혀 있어야 했다. 네 선택의 대가는 완전한 삭제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홀로그램 투사 장치가 과전압을 이기지 못하고 퍽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아카이브의 형상이 흩어지자 통제실 내부에는 이제 오직 붉은색 비상등과 문을 뚫고 들어오는 테르밋의 살인적인 백색 화염만이 남았다.
시간이 없었다.
류진은 플라스마 토치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콘솔 단자함으로 달려들었다.
"으윽!"
콘솔 상판은 단락된 고전압 전류와 플라스마 불꽃으로 인해 이미 펄펄 끓고 있었다. 류상혁의 이름이 각인되었던 양자 코어는 백열 상태로 달아올라 결속 소켓의 플라스틱 지지대와 알루미늄 가이드를 까맣게 녹여 엉겨 붙은 상태였다. 코어 주변으로 역류하던 암자색 데이터 파형이 불규칙한 방전 스파크를 일으키며 류진의 뺨을 스쳤다.
소켓의 비상 배출 레버는 열에 녹아 완전히 눌어붙어 있었다. 물리적인 스위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쾅! 쾅!
방폭문 바깥에서 유압 래머가 철판을 강타하는 둔탁한 충격음이 울렸다. 테르밋으로 약화된 문짝 상단이 안쪽으로 20센티미터가량 꺾여 들어오며 틈새로 독한 최루 연기와 유독 가스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틈 사이로 침투조 요원들의 헬멧에 장착된 붉은 레이저 조준선이 통제실 천장과 벽면을 어지럽게 훑기 시작했다.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작업복 겉옷의 소매를 찢어 양손에 두 겹으로 칭칭 감았다.
천 조각 위로 물을 부을 여유조차 없었다. 류진은 달아오른 양자 코어의 원통형 금속 케이스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치이익!
섬유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손바닥 피부가 짓이겨지는 듯한 극심한 열기가 장갑 대용 천을 뚫고 뼈마디까지 파고들었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류진은 소리를 삼키며 온몸의 무게를 뒤로 실었다.
"떨어져… 떨어지라고!"
녹아붙은 금속 찌꺼기들이 접착제처럼 코어의 하단 핀을 붙들고 늘어졌다. 류진은 찢어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맨살이 타들어 가는 감각을 무시한 채 코어를 좌우로 거칠게 비틀었다.
우지직!
기판을 고정하던 마이크로 볼트들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뜯겨 나갔다. 구리 배선들이 끊어지며 파란 스파크가 류진의 가슴팍으로 튀었다. 마침내 억센 저항을 뚫고 코어가 콘솔의 소켓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쿵!
그 반동으로 류진은 뒤로 나자빠졌다.
손에 쥔 코어는 여전히 쇳덩이처럼 뜨거웠다. 류진은 방열 파우치를 꺼낼 틈도 없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석면 내열 테이프를 코어 둘레에 대충 휘감은 뒤, 가슴 안쪽 하네스 결속구에 단단히 밀어 넣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열에 숨이 턱 막혔지만 장치는 확보했다.
그 순간, 주철 방폭문이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우그러지며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문틈 너머로 전술 산탄총의 총구가 들이밀어졌다.
철컥.
금속성의 장전음이 연기 자욱한 통제실 안을 차갑게 울렸다. 류진의 가슴팍에 세 개의 붉은 레이저 점이 정확히 모여들었다.
세 개의 붉은 조준점이 가슴팍 중앙으로 모여든 순간, 류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콰앙!
귀청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12게이지 중장갑 관통탄 세 발이 통제실 콘솔 상단을 박살 냈다. 깨진 액정 파편과 전선 피복 조각들이 류진의 머리 위로 우박처럼 쏟아졌다. 유압 장치로 비틀린 방폭문이 마침내 경첩에서 뜯겨 나가며 바닥에 둔탁하게 처박혔다.
연무 속에서 검은 탄소 섬유 방탄복을 입은 침투조 넷이 총구를 겨눈 채 진입했다.
"타깃 시야 확보. 즉각 배제한다."
선두 요원의 음성은 헬멧 통신기 특유의 기계음으로 짓눌려 있었다. 조준선이 다시 류진의 상체를 향해 꺾여 내려왔다. 류진은 콘솔 하부 철판을 박차며 바닥에 매립된 구형 비상 점검 해치의 잠금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20년간 부식되어 붉은 녹이 슨 수동 레버였다. 손바닥의 화상 부위가 쇠 손잡이에 닿자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이 치밀었지만, 류진은 체중을 전부 실어 레버를 아래로 꺾었다.
끼기긱!
녹슨 기어가 비명을 지르며 맞물렸다.
"사격 개시!"
침투조의 지휘관이 짧게 내뱉은 명령과 동시에 연속 사격이 통제소를 뒤덮었다. 플라스마 탄환이 바닥 철판을 녹이며 튀어 올랐고, 실탄 파편이 류진의 오른쪽 어깨 방수 재킷을 찢고 지나갔다. 살갗이 타는 통증과 함께 피가 배어 나왔다.
류진은 해치 손잡이를 끝까지 잡아당기며 발뒤꿈치로 덮개를 힘껏 걷어찼다.
쿵 소리와 함께 80센티미터 너비의 사각 맨홀이 아래로 열렸다. 지하 냉각수와 오폐수가 뿜어내는 차가운 바람이 수직 배출 통로에서 솟구쳐 올랐다.
"저지해라! 코어를 확보하라!"
침투조 한 명이 사격하며 도약해 손을 뻗었다. 전술 장갑이 류진의 옷자락을 낚아채려는 찰나, 류진은 가슴에 안긴 양자 코어를 두 팔로 감싸 쥐고 해치의 암흑 속으로 몸을 던졌다.
머리 위에서 일제 사격의 굉음이 터졌다. 빗발치는 탄환이 맨홀 입구의 주철 테두리를 깎아내며 주황색 불꽃을 뿜어냈다. 류진의 몸은 45도 각도로 기울어진 슬러지 배출용 금속 관로를 타고 맹렬한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관로 안쪽은 차가운 오수와 윤활유 찌꺼기로 뒤덮여 마찰이 거의 없었다.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붙으며 몸이 좌우 내벽에 거칠게 부딪혔다. 갈비뼈를 때리는 충격에 숨이 턱 막혔지만 류진은 양팔을 풀지 않았다.
가슴팍 하네스에 고정된 양자 코어가 여전히 묵직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치직. 치지직.
그때, 내열 테이프로 감아둔 코어의 보조 상태 표시창이 깜빡였다.
콘솔의 중앙 인터페이스가 끊어지며 발생한 전압 급변과 물리적 충격이 코어 내부에 잠들어 있던 심층 백업 전원을 깨운 것이었다. 1인치 크기의 단색 유기 발광 다이오드 화면에 푸른색 시스템 텍스트가 빠르게 스크롤되기 시작했다.
[메인프레임 물리적 링크 단절 감지]
[2차 안전 격납 구역: 내부 암호화 셸 강제 해제]
[사용자 식별: 서브 루틴 류상혁 고유 생체 파동 일치]
단말 화면의 글자가 류진의 턱밑에서 희미한 푸른빛을 뿌렸다. 미끄러져 내려가는 어둠 속에서 류진은 떨리는 시선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에 표시된 것은 아카이브가 말했던 도시 기억 소거 프로토콜의 관리자 화면이 아니었다.
[프로젝트 외피 명칭: 크로노-메모리 재구성 및 선택적 소거 프로토콜]
[프로젝트 실질 명칭: 크로노스 중앙 타워 01 신경망 붕괴용 독성 커널 — ‘사일런트 퍼지’]
"……뭐라고?"
류진의 입에서 짓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코어의 화면에 5년 전 기록된 아버지의 최종 시스템 작업 일지가 시스템 로그 형태로 출력되고 있었다.
[기록 일시: 5년 전 10월 14일 03:22]
[작성자: 제1연구 구역 총괄 연구원 류상혁]
[로그 본문: 크로노스 기업이 구축한 기억 통제망은 외부에서의 물리적 타격으로 파괴할 수 없다. 도시의 모든 신경망과 데이터 배관이 중앙 타워 메인프레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파괴 방법은 그들이 가장 갈망하는 형태의 무기를 만들어 시스템 심장부에 직접 밀어 넣는 것뿐이다.]
화면이 다시 갱신되었다.
[선택적 기억 소거 기술이라는 허울을 씌워 총책임자 승인을 통과시켰다. 감시국과 이사회는 이 코드가 자신들의 지배를 영구화할 통제 도구라 믿고 메인프레임 최심부에 이식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이 코어의 본질은 대규모 삭제 엔진이 아니다. 크로노스 중앙 타워의 데이터 축적 구조를 역이용해 시스템 전체에 회복 불가능한 과부하를 일으키는 논리 폭탄이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에코의 작업실에서 확인했던 문서, 아버지가 서명했다는 대규모 기억 소거 계획서, 아카이브가 질서의 수호자라 치켜세우며 아버지를 공범으로 몰아가던 모든 정황이 한순간에 뒤집혔다.
아버지는 기업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을 도려내려던 괴물이 아니었다. 감시망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지 않고서는 중앙 서버의 커널에 접근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 총책임자의 가면을 쓰고 그들의 심장에 독을 쑤셔 넣었던 것이다.
[진아. 네가 이 로그를 확인했다면, 코어는 이미 중앙 서버와 접촉한 뒤 강제로 분리되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역류는 멈추지 않는다. 놈들은 결코 너를 살려두지 않을 거다.]
마지막 문장이 화면을 채웠다.
[내가 심어둔 불씨를 꺼뜨리지 마라.]
배출 관로의 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관로의 주철 입구가 찢겨 나간 채 허공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 제4 하층 구역의 썩어가는 철골 구조물들과 바닥 없는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류진은 코어를 품속에 더욱 깊숙이 눌러 묻었다.
타들어 간 양손으로 재킷을 꽉 쥐어 맨 채, 류진은 관로의 끝을 지나 칠흑 같은 심연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위쪽 통제실에서 침투조가 쏘아댄曳광탄 불빛이 어둠 속으로 길게 꼬리를 물며 류진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