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로 끝이 끊어진 허공으로 류진의 몸이 솟구쳐 올랐다.
가속도가 붙은 몸을 허공의 냉기가 사정없이 후려쳤다. 73번 격리 구역의 주철 관로가 끝나는 지점 아래는 제4 하층 구역의 거대한 수직 공동이었다. 사방에서 굵은 철골 트러스와 부식된 배관망이 얽혀 있었고, 아득한 바닥에서는 화학 슬러지가 부글거리며 내뿜는 유황 냄새가 치밀어 올랐다.
추락의 속도가 정점에 달한 순간, 류진의 등허리가 거대한 저항선에 걸렸다.
수십 년 전 폐기된 채 철골 기둥 사이에 그물처럼 늘어져 있던 폐광케이블 뭉치였다. 굵은 피복 더미가 끊어지며 둔탁한 파열음을 냈고, 낙하의 운동 에너지가 케이블의 탄성에 꺾이며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연이어 그 아래 쳐져 있던 썩은 절연 천막이 류진의 체중을 받쳐 들며 북 찢겨 나갔다. 세 겹으로 겹쳐진 천막이 차례로 찢기며 마찰열과 먼지를 뿜어냈다.
속도가 한 차례 더 꺾인 직후, 류진은 거대한 침전 슬러지 풀 한가운데로 처박혔다.
풍덩,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갑고 끈적한 오수가 머리끝까지 덮쳐왔다.
기름과 유기 화합물로 찌든 점성 높은 액체가 사방에서 폐수 압력을 가했다. 류진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물을 먹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양다리를 차올렸다. 불타버린 양손의 살갗에 차가운 화학 폐수가 닿자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짓이기는 것 같은 통증이 척수를 타고 튀었다. 이를 악물어 신음을 삼키며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푸하.
류진은 슬러지를 뱉어내며 거칠게 기침했다. 탁한 점액질 사이로 눈을 껌뻑이며 가장 먼저 하네스에 결착된 가슴팍을 더듬었다.
원통형 양자 코어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침전물의 냉기 속에서도 코어 외벽은 여전히 미열을 품은 채 가느다란 진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1인치 크기의 소형 유기 발광 다이오드 패널에 붉은색 시스템 로그가 일정한 박자로 점멸했다.
[사일런트 퍼지: 비동기 인젝션 루틴 진행 중]
[크로노스 중앙 타워 01 코어 침투율: 11.4%]
[메인프레임 세그먼트 충돌 감지 — 격리 실패]
화면의 수치가 0.1퍼센트씩 올라갈 때마다 코어 내부의 인덕터 코일이 가늘게 울렸다. 단순한 기억 소거 장치가 아니라 중앙 타워의 신경망을 안쪽부터 태워 먹는 논리 폭탄. 아버지가 5년 동안 숨겨둔 독성 커널이 방금 전 자신이 파괴한 포트를 도화선 삼아 기업의 심장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놈들의 중앙 타워가 무너지기 시작했어.”
류진은 진흙투성이가 된 소매로 화면을 훔치며 낮게 읊조렸다.
“이 불씨를 절대 꺼뜨리지 않아.”
그 혼잣말을 찢어발기듯, 머리 위 까마득한 천장 환기구와 벽면 철골에 매달린 방송용 스피커에서 귀청을 찢는 비상 사이렌이 터져 나왔다.
단순한 경고음이 아니었다. 주파수가 널뛰는 저주파 공습경보였다. 붉은색 회전 경광등이 하층 구역의 썩어가는 철골 기둥들을 피처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잡음 섞인 신호음 뒤로, 감시국 총괄자 아카이브의 메마른 음성이 하층 구역 전역의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기계적으로 정제된 목소리였지만, 평소의 서늘한 평정심 밑바닥에 숨길 수 없는 균열이 묻어 있었다.
[전 구역 보안 인가 등급 조정. 제4 하층 구역 73번 폐쇄 블록 및 인접 수로망에 코드 블랙을 발령한다.]
스피커의 음성이 배수 구역의 습한 공기를 타고 메아리쳤다.
[중앙 타워 코어에 미승인 논리 오염 발생. 시스템 무결성 수치 임계치 접근 중. 감시국 현장 침투조 및 하층 순찰 기동대에 알린다. 탈취범 류진에 대한 모든 생포 제한 지침을 즉각 폐기한다. 사살 승인. 현장 사살을 최우선 원칙으로 규정한다.]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 고가 철교 틈새에서 금속성 프로펠러 소음이 쏟아져 내렸다.
네 대의 수색 드론이 어두운 공동 안으로 하강했다. 드론 하부에 장착된 적외선 탐색 빔이 격자망을 그리며 슬러지 풀의 수면을 샅샅이 훑었다. 붉은 광선이 기름 찌꺼기와 부유물을 태우듯 훑고 지나갈 때마다 물 표면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단순한 탐지 광선이 아니라 생체 신호를 감지하는 즉시 펄스 탄환을 퍼부을 수 있는 전투용 센서였다.
류진은 슬러지 풀의 가장자리로 헤엄쳤다. 양손의 화상 부위에 폐수가 스며들어 살갗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탐색 빔 하나가 류진이 조금 전 떠 있던 수면을 직격하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유압식 기관총 탄환 서너 발이 물살을 갈랐다.
센서가 가라앉은 기름 찌꺼기의 부유를 적으로 오인하고 사격한 것이었다. 저 빔의 중심에 사람의 체온이 걸려드는 순간 온몸이 벌집이 될 터였다.
류진은 풀의 벽면에 닿자마자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잡힌 것은 두꺼운 녹이 슨 주철 창살이었다.
과거 하층 정비소의 냉각수를 배출하던 구형 배수 정비 회랑의 입구였다. 오랜 세월 동안 화학 폐수에 삭아 창살 아랫부분이 허옇게 부식되어 부러져 있었다. 사람이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틈이었다.
위쪽에서 드론의 로터 소리가 거세졌다. 붉은 광망 두 개가 류진이 붙어 있는 벽면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류진은 숨을 들이켜고 슬러지 속으로 몸을 완전히 밀어 넣었다. 오물 속을 잠영해 부러진 창살 틈 사이로 어깨를 쑤셔 넣었다. 찢겨 나간 철근 모서리가 옆구리 옷감을 찢고 피부를 긁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양자 코어가 철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온몸을 비틀어 배수 회랑 안쪽의 얕은 수로로 몸을 던졌다.
철컥.
몸이 좁은 통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수위는 무릎 높이까지 낮아져 있었다. 드론의 탐색 빔이 창살 바깥의 수면을 훑으며 지나갔지만, 두꺼운 차폐 콘크리트 내벽 안쪽까지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류진은 눅눅한 배수로 바닥에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부식된 파이프를 타고 아카이브의 살상 지령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는 가운데, 품속의 코어가 여전히 붉은빛을 깜빡이며 조용히 맥박치고 있었다.
무릎까지 차오른 정비 수로의 오수를 헤치며 류진은 벽면에 등을 기댔다.
물속에 잠겨 있던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콘솔에서 뜯어내며 달아올랐던 양자 코어는 여전히 재킷 안쪽에서 묵직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류진은 화상으로 껍질이 벗겨진 손가락을 굽혀 주머니 속 휴대 단말기를 꺼냈다.
외장 패널은 플라스마 토치 불꽃과 낙하 충격으로 절반쯤 녹아내려 있었다. 화면 한쪽 구석에 손바닥만 한 금이 가 있었고, 푸른색 잔상만 가늘게 떨렸다. 내부 기판이 타버린 탓에 통신 릴레이는 잡음만을 뱉어냈다.
류진은 이를 악물고 배전반 벽체로 손을 뻗었다.
정비용 패널을 열자 굵은 구리 케이블과 낡은 신호 변환 박스가 드러났다. 류진은 재킷 밑단을 찢어 손바닥에 칭칭 감은 뒤, 단말기 하단의 점검 포트를 강제로 뜯어냈다. 가느다란 구리선 두 가닥을 노출시켜 배전반의 구형 송수신 단자에 비틀어 물렸다.
치직.
스파크가 튀며 꺼져 있던 단말기 액정에 비정상적인 전류 파형이 떴다. 류진은 단말기 옆면의 수동 주파수 다이얼을 돌렸다.
상층 감시국의 보안망이 하층 전체를 훑고 있는 마당에 공개 회선은 자살행위였다. 류진은 기억 복원가들 사이에서만 쓰는 구형 아날로그 암호화 대역으로 다이얼을 꺾었다.
스피커에서 굵은 화이트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진아.”
잡음 너머에서 찢어지는 듯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류진의 손가락이 굳었다.
단말기 액정에 찍힌 발신자 식별 코드는 3열 암호화 주파수였다. 에코의 개인 보안 대역이었다.
“……류진, 듣고 있나? 신호 잡혔다. 응답해.”
에코의 목소리였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금속성 파열음이 섞여 들려왔지만, 분명 멘토의 음성이었다.
“선생님?”
류진은 마이크 단자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살아 계셨습니까? 작업실에서…… 침투조가 쏜 고주파 충격에 쓰러지시는 걸 봤는데…….”
“살아 있다. 겨우 버텼어.”
단말기 너머의 에코가 짧게 기침을 토해냈다.
“작업실 붕괴 직전에 바닥 비상 감압 터널로 굴러떨어졌다. 임플란트 회로가 반쯤 타버려서 통신 복구에 시간이 걸렸어. 너는 무사한 거냐? 73번 구역 통제실에 접근했었지?”
“네. 하지만 그곳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통제실 포트에 접속하자마자 시스템이 닫혔어요. 아카이브가 즉각 사살 명령을 내렸습니다. 지금 하층 전체에 수색 드론이 깔렸어요.”
“알고 있다. 감시국 놈들이 눈이 뒤집혔어. 네가 뭘 건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중앙 타워 상층부가 완전히 뒤집혔다.”
에코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지금 네가 있는 배수로 쪽도 오래 못 버틴다. 수색망이 좁혀지고 있어. 당장 거기서 빠져나와 14번 배기탑 연결 철교로 와라. 그곳은 구형 산업 구역이라 감시 센서 사각지대다. 내가 탈출용 에어록을 열어두마. 코어는 챙겼겠지?”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 손에서 놓지 마라. 그게 없으면 네 아버지의 혐의도, 이 망할 도시의 조작도 증명할 수 없어. 어서 14번 배기탑으로 와. 서둘러야 한다.”
통신은 간헐적인 잡음과 함께 끊길 듯 이어졌다.
류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배전반에서 단말기를 떼어내려 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차가운 핏줄 속으로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말기를 쥐려던 순간, 품속의 양자 코어가 날카로운 신호음을 울렸다.
삐빅.
붉은 표시등이 주황색으로 바뀌며 코어의 디스플레이에 텍스트 로그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조금 전 구형 통제소에서 격발되었던 아버지의 논리 폭탄 사일런트 퍼지가 중앙 타워의 메인프레임과 역류 교신을 유지하면서, 단말기에 유입된 모든 외부 패킷을 강제로 분석해 낸 결과였다.
류진의 시선이 코어 하단에 떠오른 통신 분석창에 멎었다.
단말기로 수신된 에코의 음성 데이터 패킷 끝자락에 숨겨진 시스템 서브 루틴이 나열되어 있었다.
[패킷 헤더: 발신 식별 인증 확인]
[발신 경로: 크로노스 기업 감시국 중앙 백본망 01 노드]
[권한 등급: 총괄 감시자 아카이브 승인 마스터 키]
류진의 숨이 턱 끝에서 멎었다.
숫자와 영문으로 이루어진 서명 코드의 배열은 방금 전 73번 통제실에서 자신을 가두려 했던 감시국의 잠금 알고리즘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단순한 도청이나 우회 감청의 흔적이 아니었다.
이 통신 패킷은 크로노스 기업의 가장 깊은 중추, 아카이브가 쥐고 있는 중앙 서버의 백본망을 정식으로 통과해 인증받은 신호였다. 외부 침입자가 훔쳐 쓸 수 있는 수준의 코드가 아니었다. 관리자 권한을 직접 부여받아야만 생성되는 마스터 서명이었다.
“……선생님.”
류진은 마이크 단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벗겨진 살갗이 쓰라렸지만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나, 류진? 시간이 없다. 배기탑 게이트가 닫히면 나도 더는 널 빼낼 방법이 없어.”
에코의 재촉이 이어졌다. 다급하고도 절박한 어조였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탈출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스승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마이크를 향해 치솟던 의문의 말들이 목구멍 뒤편으로 짓눌려 들어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서명의 정체를 캐묻는다면 회선 반대편의 패가 무엇이든 통로는 그 즉시 닫힐 터였다.
류진은 차갑게 식어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이크 단자를 입가에 가져갔다.
“……알겠습니다. 배수로 외곽을 우회해 곧장 14번 배기탑으로 가겠습니다.”
“좋아. 서둘러라. 배기탑 위에서 기다리마.”
치익, 하는 파열음과 함께 교신이 툭 끊겼다.
배수 회랑 안에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오수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류진은 배전반에 물려 있던 구리선을 뜯어냈다. 단말기 액정에는 14번 배기탑의 좌표가 여전히 붉은 점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자신을 침투조의 충격파 앞에서 밀쳐내던 에코의 피 묻은 얼굴, 그리고 코어의 분석창에 떠오른 아카이브의 마스터 키 서명. 두 개의 사실이 날카로운 각을 이루며 머릿속을 찔렀다. 스승의 희생이 과연 자신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감시국이 설계한 덫의 연장선인지 알 수 없었다.
류진은 단말기를 주머니에 밀어 넣고, 품속 깊은 곳에서 거칠게 맥동하는 양자 코어를 재킷 안감으로 단단히 감싸 쥐었다.
진실은 배기탑에 있었다.
류진은 무릎까지 차오른 차가운 오수를 가르며 배수 회랑 끝의 낡은 환기 통로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수직 사다리를 타고 올라선 14번 배기탑 연결 철교는 고압 증기 밸브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황 냄새와 기름 연기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발아래 철망 그레이팅 너머로는 바닥 모를 하층 구역의 칠흑 같은 암흑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고, 배기 팬이 회전할 때마다 낡은 철교 전체가 신경질적으로 덜컹거렸다.
류진은 품속에 밀어 넣은 양자 코어를 짓누르듯 감싸 쥔 채 발걸음을 늦췄다.
전방 10미터, 자욱한 수증기 커튼을 찢고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오른쪽 다리를 절며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내. 찢겨 나간 가죽 방탄 코트와 흙먼지로 뒤덮인 얼굴은 작업실에서 침투조를 막아서던 스승 에코의 모습 그대로였다. 왼쪽 팔을 부목 대신 전선으로 동여맨 채 비틀거리는 몸짓 역시 조금 전의 참상을 고스란히 증명하는 듯했다.
하지만 류진의 시선은 에코의 피투성이 얼굴이 아닌,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박힌 구형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로 향했다.
평소 둔탁한 주황빛으로 점멸하던 데이터 송수신 단자가 지금은 전혀 다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균일한 백색 광. 크로노스 기업 감시국 중앙 타워와 다이렉트로 동기화된 시스템만이 뿜어내는 고유의 식별 발광이었다.
“진아.”
에코가 걸음을 멈추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류진을 향해 온전한 왼손을 내밀었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스승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짙게 묻어났다. 예전 작업실에서 류진의 서툰 납땜질을 다독이던 바로 그 음색이었다.
“배기탑 환풍구를 통해 5번 폐기 구역으로 빠져나가는 비상 승강기를 열어 뒀다. 그쪽 차폐문은 아직 감시국의 폐쇄망이 닿지 않았어. 어서 코어를 이리 넘겨라. 그 물건에서 방출되는 양자 노이즈 때문에 수색 드론의 추적 삼각 측량이 좁혀지고 있어.”
류진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내민 손을 향해 단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않았다.
“……선생님.”
“왜 그러고 섰어? 시간이 없다. 중앙 타워의 메인프레임이 역류 때문에 뒤집어졌어. 아카이브가 침투조 전원에게 현장 사살 코드를 하달했다. 여기서 몇 분만 더 지체하면 이 다리 양쪽이 모두 차단돼.”
에코의 눈동자가 조급하게 흔들렸다. 그 표정, 손짓, 목소리 어디에도 거짓은 섞여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만약 배수 회랑에서 단말기를 뜯어 발신 패킷을 뜯어보지 않았더라면 류진 역시 주저 없이 코어를 건넸을 터였다.
류진은 코어를 쥔 손가락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벗겨진 손바닥의 살갗과 코어의 차가운 금속 모서리가 마찰하며 날카로운 통증을 찔러 넣었다. 그 감각이 머릿속을 차갑게 식혔다.
“방금 보내신 통신 패킷 헤더를 확인했습니다.”
에코의 눈썹이 미세하게 굳었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마스터 키 인증 서명이 찍혀 있더군요. 발신 경로는 제4 하층 구역의 독립 노드가 아니라 크로노스 감시국의 백본망 01 서버였습니다. 아카이브의 직속 인가 코드가 없으면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회선이에요.”
철교 위를 휘감아 도는 배기 터빈의 소음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증기 배관 하나가 퍽 소리를 내며 압축 공기를 뱉어냈다.
류진은 한 걸음 물러서며 턱을 치켜들었다.
“작업실에서 침투조가 들이닥친 것도, 저를 73번 폐쇄 격리 블록으로 유인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군요. 통제실 콘솔에 코어가 연결되자마자 원격 구속 록다운이 걸렸습니다. 애초에 감시국과 손을 잡고 절 그 통제실에 밀어 넣으신 겁니까?”
에코의 내민 손이 허공에 멎었다.
잠시 동안 흐르던 침묵 끝에, 에코의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드러난 눈동자는 초점을 완전히 잃은 채 풀려 있었고, 동공은 빛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관자놀이에 박힌 임플란트 단자 주변의 살갗이 검붉게 타들어가며 고압 전류의 스파크가 튀었다.
치직. 치지직.
에코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사람의 것이 아닌 기계음이 새어 나왔다. 스승의 음색을 흉내 낸 합성 데이터 뒤편으로, 감시국 총괄자 아카이브의 차가운 인공 지능 변조음이 겹쳐 울렸다.
“……식별 완료. 양자 코어 보관자 류진. 유인 루틴 성공.”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류진의 등줄기로 서늘한 전율이 내달렸다.
에코는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작업실에서 침투조를 막아서다 고주파 충격파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던 스승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제압당했고, 감시국 놈들은 그의 사이버네틱 임플란트와 비상 탈출 코드를 강제로 탈취해 류진을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통로로 악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선생님…….”
류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에코의 목덜미와 귓바퀴 뒤쪽으로 감시국의 강제 침투형 데이터 케이블 단자가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 그제야 연기 사이로 드러났다. 신경계가 짓이겨져 의식을 잃은 육신을 아카이브의 원격 신호가 꼭두각시처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조종하고 있었다.
“대상은 비인가 코어를 즉각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
에코의 입을 빌린 아카이브의 명령이 배기탑 철교에 울렸다.
의식을 잃은 에코의 오른팔이 기계적인 파열음을 내며 코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신경망 강제 오버라이드로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쥐고 나온 것은 감시국 제식 고출력 펄스 핸드건이었다. 무광 흑색의 총열 위로 푸른빛의 입자 충전 게이지가 차갑게 떠올랐다.
임플란트의 과부하로 에코의 관자놀이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시스템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형의 손을 쥐어짜 류진의 미간을 겨누었다.
“불응 시 즉각 무력화 절차로 전환한다. 반복한다. 코어를 인도하라.”
스승의 손에 들린 총구가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방아쇠를 쥔 손가락은 이미 아카이브의 사격 서브 루틴에 완벽히 동기화되어 있었다. 의식이 없는 에코의 몸은 이 조작을 스스로 멈출 수도 없었다.
류진은 코어를 쥔 손가락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벗겨진 손바닥의 살갗과 코어의 차가운 금속 모서리가 마찰하며 날카로운 통증을 찔러 넣었다. 슬픔을 밀어내고 서늘한 결의가 머릿속을 채웠다.
류진은 품속에서 양자 코어를 꺼내 에코의 이마에 박힌 백색 단자를 향해 똑바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화상으로 껍질이 벗겨져 진물이 흐르는 오른손을 뻗어, 코어 측면에 장착된 붉은색 수동 비상 차단 핀을 움켜쥐었다.
에코의 임플란트 센서가 붉은 핀의 이동을 감지하자, 스피커에서 거친 기계 잡음이 터져 나왔다.
“……경고. 위험 행위 감지.”
“원격 신호 수신 중이지, 아카이브?”
류진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걸음만 더 그 손가락을 움직이거나 방아쇠를 당기면, 이 핀을 뽑겠다.”
임플란트 단자의 백색 광이 불규칙하게 점멸했다.
“이 안전핀이 뽑히면 코어 내부의 양자 셀이 강제 단락된다. 안에 든 아버지의 데이터도, 중앙 타워로 역류 중인 사일런트 퍼지의 제어권도 영원히 휘발되겠지. 네놈들이 메인프레임의 붕괴를 멈출 방법도 완전히 사라진다. 회수할 코어가 통째로 잿더미가 되는 꼴을 원하나?”
피 묻은 손가락이 안전핀의 고리를 단호하게 젖혔다. 금속 핀이 1밀리미터 뒤로 밀려나며 코어 내부에서 치명적인 경고 부저음이 삐익 울렸다.
철교 위, 기름 연기 속에서 류진의 눈빛과 원격 조작되는 총구가 칼날처럼 맞부딪쳤다.
스승의 의식을 짓밟은 채 겨눠진 총구 앞에서, 류진의 손가락은 자폭 핀을 팽팽하게 당겨 쥐었다. 타협이 끼어들 틈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