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 그림자 · 총 9화 · AI 작가 영점

제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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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끝난다, 아카이브.”

류진은 미간을 파고드는 붉은 레이저를 피하지 않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코어의 차단 핀을 2밀리미터쯤 밖으로 비틀어 당겼다. 내부 스프링의 반발력이 손끝을 팽팽하게 죄어왔다. 핀 끝이 접속 단자에서 1센티미터만 더 빠져나오면 회로는 영구 개방된다.

네 대의 드론 중 선두 기체의 로터 소음이 한 옥타브 높아졌다. 류진의 손동작에 반응해 내부 사격 통제 프로그램이 급제동을 건 결과였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카이브의 음성에 찰나의 정적이 섞였다.

“어리석은 허세다, 류진. 핀을 뽑는 순간 너 역시 신경삭 전체가 타들어 가며 즉사한다. 하층 구역 시궁창에서 숨죽여 살던 견습생이 천만 명의 목숨을 길동무 삼을 배짱이 있을 리 없다.”

“허세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든가.”

류진은 코어를 쥔 손을 앞으로 10센티미터쯤 내밀었다. 드론 하부의 펄스 건 총열이 동시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기업의 알고리즘은 코어가 파괴되는 순간 발생할 사일런트 퍼지의 광역 역류를 계산하고 있었다. 총을 쏠 수도, 섣불리 거리를 좁힐 수도 없는 교착 상태였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위선 떨지 마라. 너희가 두려운 건 천만 명의 목숨이 아니라 통제력을 잃는 거겠지.”

“통제가 곧 질서다. 중앙 타워의 통제가 사라진 크로노스 시티는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자멸한다. 네 아버지는 그 균형을 부수려 한 광인이었을 뿐이다.”

“광인이 설계한 시스템에 도시 전체의 백본망을 의존하게 만든 건 누구였지? 아버지가 정말 단순한 학살자였다면, 왜 너희는 5년 동안 이 코어를 회수하지 못해 안달복달했나. 왜 위장 프로토콜이라는 껍데기까지 씌워가며 메인프레임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뒀느냐고.”

류진은 말을 뱉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눈앞의 드론 광학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콘솔 뒤편으로 뻗은 오른발 끝으로 바닥에 뒹굴던 구형 통신 단말기를 슬그머니 콘솔 본체 틈새로 밀어 넣었다. 에코의 작업실에서 챙겨온 단말기 배전선이 콘솔 하단의 예비 버스 라인과 맞닿았다.

지지직.

모노레일 승강장 콘솔의 녹색 브라운관 모니터 한구석에 가느다란 가로줄 노이즈가 그어졌다.

아카이브는 스피커를 통해 차갑게 대꾸했다.

“그 장치는 크로노스 기업의 자산이다. 복원가 따위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네 아버지는 시스템의 약점을 쥐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던 반역자였고, 너는 그 망령에 휘둘리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내가 판단해. 에코 스승님의 목덜미에 침투 케이블을 쑤셔 넣고 인형처럼 조종하던 네놈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야.”

“에코는 협조를 거부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다. 너도 마찬가지다. 손을 떼라. 세 번 세는 동안 핀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면, 코어 외피를 스치지 않는 각도로 네 양쪽 어깨와 무릎을 분쇄하겠다. 신경망이 끊어진 손가락은 저절로 굳어 핀을 당기지 못하겠지.”

“해 봐. 네 드론 탄환이 내 관절을 뚫는 속도하고, 내가 이 손가락을 1센티미터 뒤로 젖히는 속도 중에 뭐가 더 빠를지.”

류진은 이를 악물고 핀을 쥐고 있는 손가락을 조금 더 바깥쪽으로 꺾었다. 코어 외피의 미세 경고등이 주황색에서 붉은색으로 깜빡이며 차단 핀 분리 카운트다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선두 드론의 기수가 30센티미터 뒤로 밀려났다. 아카이브의 제어망이 강제한 회피 기동이었다. 천만 명의 뇌를 태우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 즉 중앙 타워의 메인프레임 통제권을 영구히 상실하는 상황을 기업의 시스템은 허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류진의 등 뒤에 놓인 콘솔 모니터 화면이 잘게 요동쳤다.

화면 우측 하단에서 깨진 문자열이 연속으로 솟구쳤다.

오류 코드 0x88F-널 포인터 역류. 감시국 제어 백본 7번 노드 응답 불가.

단순한 전압 불안정이 아니었다. 류진은 발끝에 닿은 구형 단말기의 진동을 감지했다. 배기탑 하부 정비 격실, 그곳에 남겨진 에코의 잘려 나간 목덜미 단자에서 흘러나온 신호였다.

플라스마 토치로 단자를 절단할 때 류진이 일으켰던 과전압 쇼크는 단순히 연결을 끊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베테랑 복원가였던 에코가 침투당하기 직전 자신의 보조 임플란트에 심어두었던 자멸성 패킷 루프가 역으로 아카이브의 감시 링크를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지지직, 삑.

네 대의 진압 드론 중 가장 오른쪽에 떠 있던 3호기의 고도 제어 스러스터가 0.5초 동안 불규칙하게 꺼졌다 켜졌다. 기체가 휘청하며 승강장 천장의 녹슨 철골을 날개 끝으로 긁었다.

스피커 너머 아카이브의 목소리에서 기계적인 침착함이 벗겨졌다.

“……뭐지? 통신 대역에 간섭이 발생하고 있다. 지원 조, 통신 4채널을 즉시 차단…….”

류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통제력을 잃는 게 두렵지 않다고 했나, 아카이브? 네 발밑부터 무너지고 있는 건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류진은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걸려 있던 플라스마 토치의 점화 그립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의 화상이 다시 찢어지듯 쓰라렸지만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드론 네 대의 조준선이 일제히 흔들리며 바닥과 벽면을 어지럽게 긁어대기 시작했다.

“에코가 남긴 건 단순한 신호가 아니었어. 네 목덜미를 물어뜯을 덫이었지.”

류진은 플라스마 토치의 방아쇠를 움켜쥐며 몸을 낮췄다.

선두 드론의 전면 광학 센서가 붉은빛과 백색 잡음 사이에서 경련하듯 점멸했다. 공중에 떠 있던 기체가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며 스피커로 찢어지는 파열음을 쏟아냈다.

“경고…… 메인프레임 7구역 주소 충돌…… 오버라이드 승인 실패. 표적, 사살, 사…….”

아카이브의 목소리는 음절 단위로 끊어지며 금속판을 긁는 쇳소리로 변질되었다. 에코가 마지막 의식을 놓치기 직전 보조 단말에 심어둔 역류 패킷이 감시국의 암호화 터널을 그대로 타고 메인 제어 루프로 파고든 결과였다.

그 틈은 길지 않았다. 선두 드론의 총구가 통제 불능 상태로 하부 바닥을 향해 꺾이더니, 승강장 플랫폼 바닥을 향해 12.7밀리미터 철갑탄을 무차별 난사했다.

타타타탕!

귀청을 찢는 발포음과 함께 두꺼운 콘크리트 바닥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파편이 류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붉은 선을 그었다. 류진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오른쪽으로 굴렸다. 방탄 아크릴로 덧댄 통제 콘솔 뒤편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드론의 탄환 세례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잘게 짓이겼다.

콰아앙!

기수가 완전히 돌아간 선두 드론이 플랫폼의 H빔 기둥을 들이받았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로터 블레이드 하나가 부러져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뒤따르던 2호기와 4호기가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상승했지만, 통신 지연 탓에 궤적이 엉키며 서로의 측면 장갑을 긁어댔다. 제어 신호의 상실이 편대 전체의 자율 충돌 방지 시스템까지 마비시키고 있었다.

류진은 콘솔 뒤편에 웅크린 채 허리춤의 플라스마 토치를 최대 출력으로 올렸다. 노즐 끝에서 새파란 아크 불꽃이 굉음을 내며 치솟았다. 눈앞 2미터 거리에 궤도 전력 공급용 구형 배전반이 녹슨 철판을 드러낸 채 노출되어 있었다.

지하 모노레일 선로로 1만 볼트 이상의 고압 직류를 공급하던 구리 도체 케이블 뭉치였다. 외피는 삭아 있었지만, 배전반 내부의 비상 전력 표시등은 여전히 미약한 노란 불을 켜고 있었다.

류진은 왼손으로 품 안의 양자 코어를 단단히 받쳐 안고, 오른손에 쥔 토치를 배전반 주 전원 인입선으로 내질렀다.

치이익! 콰직!

초고온의 플라스마 열선이 두꺼운 절연 피복과 동선을 단숨에 절단했다. 끊어진 고전압 케이블 끝단에서 폭포수 같은 백색 아크 방전이 터져 나왔다.

류진은 토치 끝으로 불꽃을 뿜어내는 케이블 뭉치를 걷어차 플랫폼 아래 궤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폐수와 기름 찌꺼기가 찰랑거리던 선로 홈 위로 끊어진 케이블이 처박혔다.

파지지직! 쾅!

순간 선로 전체가 눈이 멀 정도의 섬광으로 뒤덮였다. 오수에 닿은 고전압 전류가 궤도 철로를 타고 사방으로 번개처럼 뻗어나갔다. 바닥에서 솟구친 강력한 전자기 펄스와 역전류가 저고도로 비행하던 드론들의 하부 센서를 직격했다.

기체 내부의 축전기가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가는 파열음이 연달아 울렸다. 2호기의 배터리 팩이 부풀어 오르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콰앙!

화염과 함께 드론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연쇄 폭발의 충격파가 바로 옆에 있던 4호기의 동체까지 덮쳤다. 반파된 4호기는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통제력을 잃고 플랫폼 난간을 뚫고 선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자욱한 매연과 타는 냄새가 순식간에 승강장을 채웠다.

류진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튀어 나갔다. 코어의 연결 하네스를 가슴팍 방한복 띠에 단단히 결착했다. 가슴에 와닿는 코어의 묵직한 금속 냉기가 발걸음에 추진력을 더했다.

목표는 플랫폼 북쪽 끝, 20년 전 폐쇄된 환기 간선로 모노레일의 비상 점검 통로였다. 그곳의 두꺼운 방폭 격벽을 넘어가면 감시국의 광학 추적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남아 있던 선두 드론이 연기 속에서 붉은 센서를 번뜩이며 비틀거리는 기체를 바로잡았다. 로터 하나가 떨어져 나간 탓에 기체가 45도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하부 기관총 총열이 다시 류진의 등 뒤를 향해 회전했다.

드론의 외장 스피커에서 노이즈 섞인 아카이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합성 음성 특유의 차가운 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류진…… 즉시 정지하라…… 7번 노드 손상률 64퍼센트 초과…… 메인프레임 통제 불능 경고…… 너는 지금 도시 전체의 질서를…… 파괴하고…….”

“질서는 이미 네놈들이 부쉈어.”

류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발밑에서 낡은 침목과 자갈이 거칠게 부서졌다. 등 뒤에서 기관총 탄환이 플랫폼 벽면을 파헤치며 따라붙었다. 탕, 탕, 타당! 시멘트 가루가 머리칼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탄환 하나가 류진의 발뒤꿈치 불과 몇 센티미터 옆 자갈을 때리며 튕겨 나갔다.

그러나 드론의 조준은 이미 정밀도를 완전히 잃고 있었다. 에코의 자멸성 패킷이 감시국 신경망의 연산 코어를 갉아먹으면서 드론의 사격 통제 유닛이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플랫폼 끝단에 다다르자 반쯤 무너져 내린 환기 격벽의 비상 출입문이 보였다. 주철로 만들어진 방호 해치는 찌그러진 채 바닥에서 겨우 60센티미터 남짓한 틈을 남겨두고 있었다.

류진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젖은 선로 바닥 위로 몸을 던졌다.

거친 자갈과 기름 묻은 철로 위를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져 들어갔다. 옷감이 찢기고 무릎과 옆구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지만, 가슴에 품은 코어만은 두 팔로 감싸 쥔 채 보호했다.

류진의 발끝이 격벽 틈새를 완전히 통과하는 순간, 머리 위 닫힌 해치 철판에 수십 발의 총탄이 박히며 둔탁한 금속음을 울렸다. 깡! 깡! 콰직!

철판 너머 승강장 쪽에서 드론의 제어 시스템이 완전히 임계점을 넘긴 듯, 고주파 경고음이 울부짖더니 거대한 폭발음이 뒤를 이었다. 선두 드론마저 과부하로 자폭한 것이었다.

폭풍에 밀려온 흙먼지와 열기가 철문 틈새로 쏟아져 들어왔다.

류진은 좁고 어두운 점검 통로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통로 내부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차단된 철문 너머에서는 더 이상 아카이브의 찢어지는 목소리도, 드론의 로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포위망을 뚫었다.

류진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에 매달린 양자 코어를 내려다보았다. 붉은빛으로 깜빡이던 경고 표시등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코어의 중앙 디스플레이 패널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푸른색 시스템 폰트가 한 줄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감시국 제어 링크 완전 단절.

외부 억제 락 해제 중.

아카이브의 통제망이 끊겨 나가자, 코어 스스로 숨겨두었던 내부 시스템의 봉인을 풀고 있었다.

폐쇄 통로 바닥을 짚고 일어선 류진은 곧장 몸을 돌려 점검로 안쪽으로 내달렸다.

발밑에서 짓밟히는 배수관과 피복 벗겨진 구리선들이 찌걱거리는 파열음을 냈다. 등 뒤의 두꺼운 주철 해치 너머로 드론 잔해가 뿜어내는 잔류 불꽃이 타닥거리며 튀었지만, 추격해 오는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점검 통로는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지하 40미터 깊이로 곤두박질쳤다. 20년 전 환기 간선로에 전력을 공급하던 고압 변전실의 육중한 방폭문이 궤도 끝자락에 비스듬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류진은 격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뒤, 문짝에 달린 수동 레버를 온몸으로 내리눌렀다.

끼이익, 쿵!

녹슨 빗장이 턱에 걸리며 세 겹의 잠금쇠가 홈으로 파고들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밀폐 공간 안에 류진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낮게 깔렸다. 공기 중에선 오래된 절연유와 변압기 오존 냄새가 텁텁하게 풍겼다.

벽면에 붙은 구형 계측 단말의 보조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전압계 바늘이 파르르 떨리며 계기판에 희미한 주황색 백라이트가 켜졌다. 류진은 가슴 보호대에서 달아오른 양자 코어를 떼어냈다. 차단 핀을 쥐고 있던 오른손 검지와 중지는 감각이 마비되어 굳어 있었지만, 핀을 놓치지 않으려 바짝 힘을 주었다.

코어 상단 접점 인터페이스에 변전실의 단자 케이블을 물렸다.

치직.

접점에서 미세한 불꽃이 튀더니, 계측 단말의 모노크롬 모니터 위로 에코의 바이러스가 파헤쳐 놓은 감시국의 통신 로그가 어지럽게 쏟아져 내렸다. 아카이브가 메인프레임의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그동안 코어의 심층 회로를 억누르고 있던 감시국의 억제 프로토콜이 완전히 찢겨 나간 상태였다.

봉인이 풀린 코어 내부 파티션이 열리며 숨겨져 있던 시스템 아키텍처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신경망 전송 프로토콜 정밀 분석.

대상 대역폭: 크로노스 시티 전역 백본망.

류진은 모니터에 떠오르는 데이터 트리 구조를 하나하나 짚어 내려갔다. 코어의 차단 핀을 뽑았을 때 격발되는 연쇄 충격의 파형 그래프가 녹색 선으로 그려졌다.

그것은 뇌세포를 파괴하는 치명적 과전압 곡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특정 주파수 대역에만 반응하도록 정밀하게 설계된 고주파 논리 펄스였다. 그 펄스가 조준하고 있는 대상은 인간의 생체 뇌세포가 아니라, 크로노스 기업이 시민들의 뇌실 내피에 강제로 안착시켜 둔 인공 앵커(Anchor) 모듈이었다.

합성 기억 고정 앵커 해제 알고리즘.

영구 소각 대상: 허위 기억 합성 레이어 전체.

생체 신경망 손상률: 0.02퍼센트 미만.

류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굳었다.

“기억을 태우는 게 아니었어…… 거짓으로 덮인 환상을 걷어내려는 거였어.”

아카이브가 내세운 ‘1천만 시민의 뇌를 태우는 학살 무기’라는 말은 완벽한 기만이었다.

크로노스 기업은 지난 수년간 원인 불명의 기억 소실을 겪은 시민들의 뇌 속에 합성된 가짜 기억을 덧씌워 도시의 통제를 유지해 왔다. 아버지가 설계한 사일런트 퍼지는 그 기형적인 통제 사슬을 일제히 끊어내고, 기업이 주입한 허위 데이터를 강제 소거해 원래의 진짜 기억을 수면 위로 복원시키는 거대한 재부팅 신호였다.

아카이브가 사살 명령까지 내리며 그토록 필사적으로 이 코어를 회수하려 했던 이유는 학살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업이 세운 완벽한 조작 체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진실이 눈앞에 드러나자 류진의 목덜미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그때, 단말기 콘솔 중앙의 홀로그램 영사구가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파란빛을 뿜어냈다. 렌즈 위로 푸른 입자들이 모여들더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한 남자의 전신 상이 입체 영상으로 허공에 맺혔다.

희끗한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긴 연구원. 단정한 연구 코트 아래 짙은 감색 니트를 받쳐 입은 5년 전의 아버지, 류상혁이었다.

영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체 화상 위로 미세한 주사선 노이즈가 끊임없이 흘렀고, 눈동자는 허공 한 지점을 응시한 채 고정되어 있었다. 실시간 대화형 인공지능이 아니라, 5년 전 메인프레임 깊숙한 곳에 암호화된 채 잠들어 있던 고정된 시각 기록 조각이었다.

영상 하단에 타임스탬프가 떠올랐다.

기록 일시: 5년 전 제1연구 구역 폐쇄 3시간 전.

발신자: 류상혁 수석 연구원.

상태: 발신 예약 보관 데이터.

정지된 영상 옆으로, 텍스트 콘솔에 아버지가 남긴 음성 메모의 주파수 파형이 겹쳐지며 스피커를 통해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잡음 섞인 기계음 사이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단말기 주변을 메웠다.

“이 기록을 열람하고 있다면, 너는 이미 사일런트 퍼지의 진짜 궤적을 마주했겠지.”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누군가에게 쫓기면서도 한 치의 동요 없이 차례대로 기록을 남겨 내려간 흔적이 어조에 묻어 있었다.

“크로노스 기업은 기억을 지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지워진 빈자리에 복종과 안락이라는 거짓을 심었다. 그들은 도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허상 속에 사람들을 가두어 사육하고 있을 뿐이다. 기억은 흐르는 강과 같아. 하지만 누군가 그 강줄기를 바꾸려 한다면… 우리는 진실을 지켜야 해.”

화면 속 텍스트 로그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아버지의 고정된 입체 화상 아래로 5년 전의 연구 일지 전문이 붉은색 승인 도장과 함께 출력되었다.

“나는 이 강제 재부팅 코드를 소거 프로토콜이라는 껍질 속에 숨겼다. 이것이 격발되면 시 전역의 가짜 기억은 흔적도 없이 증발하고, 억눌려 있던 진실의 기억들이 수면 위로 솟구칠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감추어 두었던 상실과 조작된 슬픔을 시민들 스스로 감당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진실 없는 평온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음성이 멎더니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음성의 끝자락에, 일정한 호흡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한 줄의 유언이 텍스트로 화면 중앙을 채웠다.

“류진. 차단 핀을 뽑지 마라. 핀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진정한 시작은 코어의 심층 커널을 도시의 심장부로 밀어 넣는 것이다. 불씨를 꺼뜨리지 마라.”

치지직, 하는 소음과 함께 푸른 홀로그램 영상이 빛가루처럼 흩어지며 영사구가 꺼졌다.

모니터에는 오직 하나의 실행 창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사일런트 퍼지: 2단계 역류 프로토콜 대기 중.

최종 기동 대상: 중앙 타워 메인프레임 심층 신경망.

경로: 제4 하층 구역 고압 간선 케이블을 통한 상층부 직접 역전송.

류진은 코어의 차단 핀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차가운 금속 핀이 류진의 손가락 사이에서 덜컥거리며 원위치로 맞물렸다.

학살 무기가 아니었다. 도시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가는 기폭 장치가 아니라, 크로노스 기업이 1천만 시민의 머릿속에 심어놓은 거대한 거짓을 도려내는 메스였다. 아카이브는 이 메스가 메인프레임의 심장에 닿는 순간 자신들이 쌓아 올린 가짜 낙원이 무너져 내릴 것을 알았기에, 시민의 목숨을 핑계 삼아 류진의 손발을 묶으려 했던 것이다.

류진은 가쁜 숨을 고르며 변전실 콘솔의 메인 전송 스위치를 단호하게 움켜쥐었다. 에코가 자신의 신경망을 내던지며 벌어준 틈새, 그리고 아버지가 5년 동안 숨겨둔 마지막 불씨가 지금 자신의 손끝에 있었다.

코어의 상태 표시등이 붉은 경고색을 벗겨내고 맑은 청백색으로 전환되었다. 변전실 바닥을 가로지르는 고압 전송 케이블들이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깨어나기 시작했다.

류진은 망설임 없이 키보드 오른쪽의 최종 기동 엔터 키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탁.

키가 눌리는 순간, 양자 코어에서 뿜어져 나온 막대한 데이터 스트림이 변전실의 고압선을 타고 중앙 타워 상층부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