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익, 하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유황 냄새 섞인 배기열 속을 갈랐다.
양자 코어 측면의 붉은색 수동 비상 차단 핀이 1밀리미터 물러선 채 멈춰 있었다. 류진의 엄지손가락에는 벗겨진 피부에서 배어 나온 진물이 흥건했다. 핀을 고정한 미세 걸쇠가 한 번 더 튕겨 나가면 내부 격벽이 무너지며 삼중 양자 셀이 전소할 터였다.
에코의 검지손가락이 펄스 핸드건의 방아쇠를 누르려던 동작을 정확히 0.3초간 멈췄다.
관자놀이에 박힌 은색 단자 주변으로 번쩍이던 백색 발광 다이오드가 순간적으로 청색으로 바뀌며 빠르게 점멸했다. 감시국 메인프레임이 류진의 행동을 분석해 사격 중지 인터럽트를 하달한 결과였다.
에코의 턱관절이 기계적으로 덜컥거리더니, 폐부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듯한 인공 합성음이 성대를 짓이기며 흘러나왔다.
“위험 확률 99.4퍼센트. 양자 코어 강제 단락 시 사일런트 퍼지의 차단 알고리즘 소멸. 본사 메인프레임 복구 불가 판정.”
에코의 텅 빈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스승의 감정이 아니라 원격 통신망의 신호 밀도가 급격히 치솟으며 안면 신경을 강제로 쥐어짜는 현상이었다. 아카이브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중으로 겹쳐 귓전을 때렸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라, 류진. 코어를 파괴하는 즉시 이 자의 전두엽에 걸린 억제 전류가 최대치로 방출된다. 네 멘토의 뇌세포가 완전히 타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1.8초에 불과하다.”
아카이브는 협박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들었다. 스승의 육신을 인질로 삼아 손가락을 묶어 두려는 수작이었다.
“코어를 바닥에 내려놓고 세 걸음 뒤로 물러서라. 그렇다면 최소한 이 자의 생체 신호는 보존해 주겠다. 타워의 시스템이 정상화되는 즉시 신경 오버라이드를 해제하겠다.”
류진은 시선을 에코의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스승의 뺨 위로 핏줄기가 타고 내렸다. 귓바퀴 뒤에 꽂힌 감시국 제식 침투 케이블의 피복이 과열로 부풀어 올라 유독한 탄내를 풍기고 있었다.
아카이브의 말은 거짓이었다. 중앙 타워의 메인프레임이 바이러스에 잠식되는 마당에 감시국이 일개 하층민 복원가의 목숨을 살려 둘 리 없었다. 코어를 넘겨받는 순간 펄스 건의 입자 탄환이 미간을 꿰뚫을 것이고, 에코 또한 증거 인멸을 위해 그 자리에서 뇌사 상태로 폐기될 터였다.
류진은 코어를 쥔 손에 서서히 힘을 주며 안전핀의 틈새를 2밀리미터까지 더 벌렸다. 코어 내부에서 고주파 회전음이 한 옥타브 높게 치솟았다.
“방아쇠를 당겨 봐, 아카이브. 네놈이 메인프레임을 살릴 마지막 열쇠도 여기서 재가 될 테니까.”
목소리에는 티끌만 한 떨림도 섞여 있지 않았다.
에코의 손에 들린 펄스 핸드건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아카이브의 제어 루틴이 방아쇠 압력과 코어 보존율 사이에서 끊임없이 재계산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계적인 오차 수정이 일어나는 바로 그 틈, 에코의 관자놀이에 박힌 단자에서 파란 불꽃이 파지직 튀었다.
초당 400헤르츠 주기의 동기화 펄스.
에코의 작업실에서 수없이 보았던 구형 신경 임플란트의 고질적인 수신 잡음이었다. 아카이브는 고속 침투 케이블을 통해 에코의 뇌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제4 하층 구역 특유의 짙은 유황 분진과 고압 배기열 탓에 백본망 신호의 손실률이 30퍼센트를 넘나들고 있었다. 원격 연결은 겉보기만큼 견고하지 않았다.
류진은 슬그머니 오른발을 앞으로 반 걸음 내딛었다.
“원하는 게 코어라면 주겠다. 대신 원격 링크 전압부터 낮춰. 스승님의 목덜미 커넥터가 이미 녹아내리고 있어.”
“……요구 조건 수용 불가. 코어를 먼저 넘겨라.”
“못 믿겠다면 직접 확인해.”
류진은 코어를 든 왼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안전핀을 쥐고 있던 오른손 검지가 코어 밑바닥의 보조 패널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곳에는 73번 폐쇄 구역 콘솔에서 급히 뜯어낼 때 미처 방전시키지 못한 고전압 외피 커패시터의 수동 우회 접점이 숨겨져 있었다.
에코의 눈동자에 걸린 초점이 코어의 금속 광택을 따라 아래로 내려앉았다. 아카이브의 센서가 코어의 물리적 궤적을 추적하느라 사격 우선순위를 한 단계 낮춘 바로 그 찰나였다.
류진은 주저 없이 보조 접점의 금속 걸쇠를 손톱 끝으로 후벼 파듯 밀어 올렸다.
파앙!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코어 외피에 압축되어 있던 수천 볼트의 잔류 전하가 푸른 섬광을 그리며 전방으로 터져 나갔다. 눈앞이 하얗게 탈색될 정도의 강렬한 아크 방전이 철교의 습한 유증기를 매개로 번개처럼 뻗었다.
고전압 방전 펄스가 에코의 총구와 목덜미의 침투형 단자를 정면으로 강타했다.
치지지직!
에코의 몸 전체가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관자놀이에 박혀 있던 은색 단자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며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감시국 메인프레임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원격 동기화 신호선이 단락 전류를 견디지 못하고 타버리며, 에코의 손가락에서 힘이 풀렸다.
툭.
고출력 펄스 핸드건이 녹슨 격자 철판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총구에서 미처 방출되지 못한 잔류 푸른 입자가 허공으로 맥없이 흩어졌다.
“경고…… 통신 두절…… 국소 전자기……”
에코의 목덜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아카이브의 합성음이 찢어지는 고주파 소음과 함께 끊겼다. 귓바퀴 뒤에 물려 있던 제식 단자의 표시등이 적색으로 내려앉으며 점멸을 멈췄다.
동시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에코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꼭두각시의 줄이 끊긴 것처럼 거친 체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류진은 왼손으로 코어를 가슴팍에 단단히 눌러 붙이며 앞으로 몸을 던졌다. 젖혀진 철교 난간 틈새로 추락하려던 스승의 낡은 가죽 코트 깃을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화상 입은 손바닥에 거친 마찰열과 살점이 짓이겨지는 통증이 덮쳤지만 류진은 손가락을 풀지 않았다.
“선생님!”
에코의 고개가 무력하게 류진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관자놀이의 단자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유독한 연기가 류진의 코를 찔렀다. 침투 단자가 강제 단락되면서 신경망에 급격한 역기전력이 발생한 탓에, 에코의 호흡은 얕고 불규칙하게 쌕쌕거렸다.
시간이 없었다.
단락된 제식 케이블의 내부 퓨즈가 자체 복구 루틴을 가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1분 안팎이었다. 감시국 메인프레임이 예비 주파수로 재접속을 시도하는 순간, 에코의 육신은 다시 사살 명령을 수행하는 괴물로 돌변할 터였다. 철교 저편의 짙은 유황 연기 너머에서도 순찰 드론 특유의 둔탁한 터빈 추진음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류진은 바닥에 떨어진 펄스 핸드건을 군화 끝으로 거칠게 걷어찼다. 총기는 녹슨 격자판 틈새를 빠져나와 암흑 같은 심연 속으로 흔적도 없이 곤두박질쳤다.
곧바로 에코의 굵은 팔을 끌어당겨 목 뒤로 둘러멨다. 오른쪽 어깨를 짓누르는 스승의 체중에 다리가 휘청였으나, 류진은 입안을 씹으며 철교 중앙의 노란색 안전 난간 쪽으로 발을 옮겼다.
발밑 배기탑 외벽을 따라 하부 정비 구역으로 이어지는 구형 점검 발판이 짙은 수증기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난간의 안전 걸쇠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엉겨 붙은 기름때로 부식되어 있었다. 류진은 군화 뒤축으로 걸쇠 이음매를 힘껏 내리찍었다.
쾅, 하는 파열음과 함께 낡은 철망 패널이 바깥쪽으로 젖혀지며 좁은 통로가 열렸다.
수직 배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섭씨 60도의 열풍이 얼굴을 거칠게 때렸다. 바로 아래 3미터 지점에 격자형 강철 바닥과 두꺼운 유압 차폐벽이 보였다. 14번 배기탑의 하부 비상 정비 격실로 통하는 점검 발판이었다.
류진은 품속의 코어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점퍼 안쪽으로 단단히 밀어 넣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그리고 축 늘어진 에코의 상체를 두 팔로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은 채, 붉은 비상 유도등이 어지럽게 회전하는 하부 갑판을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쿵, 하는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무릎 관절로 무거운 충격이 꺾여 들어왔다.
류진은 에코를 껴안은 채 하부 정비 갑판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기름 찌꺼기와 녹가루가 섞인 바닥재가 옷깃을 긁어댔다. 충격으로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렸지만, 류진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스승의 양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조금만 버티세요.”
축 늘어진 에코의 다리가 격자형 발판 위를 힘없이 끌렸다. 배기탑 중심부에서 회전하는 거대한 냉각 터빈이 뿜어내는 저주파 진동이 바닥을 타고 뼈마디까지 울렸다.
류진은 세 걸음 앞의 두꺼운 유압 차폐문으로 에코를 끌고 갔다. 비상 정비 격실의 노란색 수동 레버가 벽체에 박혀 있었다. 류진은 화상 입은 손바닥으로 레버를 쥐고 온 체중을 실어 아래로 내리눌렀다.
치익 하는 압축 공기 배출음과 함께 150밀리미터 두께의 방화벽이 아래로 덜컥 떨어져 내리며 닫혔다. 외부에서 들려오던 수색 드론의 터빈 소음과 유황 섞인 열풍이 일순간 차단되었다.
밀폐된 격실 안에는 녹색 비상등만이 희미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류진은 에코를 격실 한구석의 알루미늄 정비대 옆에 눕혔다. 에코의 호흡은 위험할 정도로 가빴다. 목덜미 뒤편에 박힌 감시국 제식 침투 케이블 단자에서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단자 주변의 피부는 고열로 검게 그을려 있었고, 굵은 핏줄이 시커멓게 도드라져 불규칙하게 경련했다.
단락되었던 침투 칩의 보조 전원 표시등에 푸른빛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재부팅 카운트다운이었다. 30초도 남지 않았다. 메인프레임의 원격 오버라이드가 다시 걸리면, 에코의 뇌간은 그 즉시 감시국의 명령 프롬프트에 종속되어 버린다.
류진은 허리 벨트에서 휴대용 플라스마 토치를 뽑아 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점화 스위치를 밀어 올리자 미세 노즐 끝에서 얇은 청백색 불꽃이 3밀리미터 길이로 솟아올랐다. 일반적인 용접 작업용이 아니라 정밀 회로 절단용 극초단파 불꽃이었다.
류진은 에코의 턱을 들어 올려 목덜미를 확보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에코의 살갗과 금속 커넥터 사이의 유격은 채 1밀리미터도 되지 않았다. 손끝이 조금만 빗나가도 경정맥이나 척수 신경망 케이블이 함께 타버린다. 류진은 거칠게 날뛰는 숨을 억누르고 토치 끝을 단자 연결 나사 홈에 가져다 댔다.
치이익.
합금 나사가 녹아내리며 매캐한 합성수지 냄새가 진동했다. 류진은 반사적으로 뒤틀리는 에코의 어깨를 무릎으로 짓누른 채, 불꽃을 단자 내부의 주 백본 광케이블 다발로 비스듬히 비틀어 넣었다.
지지직, 팅.
단자 내부의 세라믹 핀 넉 개가 순차적으로 파열되며 시커먼 불꽃이 튀었다. 마지막 신호선이 끊겨 나가자, 침투 단자 외피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커헉!”
연결이 끊김과 동시에 에코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거품이 터져 나왔다. 뇌 신경망에 직접 물려 있던 고주파 캐리어 신호가 강제로 차단되면서 발생한 극심한 신경 반동이었다.
류진은 토치를 바닥에 던져두고 에코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가 기도를 막지 않도록 받쳤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에코 선생님.”
경련하던 에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초점을 잃었던 탁한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더니, 눈앞에 있는 류진의 얼굴에 멎었다.
“……진이냐.”
쉰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감시국의 기계음이 아닌, 류진이 기억하던 스승의 거칠고 무거운 육성이었다.
“네, 저예요. 침투 단자는 잘라냈습니다. 감시국 링크는 끊겼어요.”
에코는 피로 젖은 손을 간신히 들어 올려 류진의 점퍼 소매를 쥐었다. 손가락 끝에 실린 힘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다.
“내가…… 내 통신 코드가…… 함정이었어. 그놈들이…… 내 접속 키를 털어서…… 너를…….”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탓이 아니에요. 말하지 마세요. 흉부 내출혈이 심합니다.”
“아니다. 들어라…… 시간이 없어.”
에코는 피 묻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류진의 팔을 바짝 끌어당겼다. 스승의 시선이 류진의 점퍼 안쪽에 불룩하게 솟아 있는 양자 코어로 향했다.
“진아…… 그 코어의 차단 핀…… 단순한 자폭 장치가 아니야.”
류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폭이 아니라니요? 핀을 뽑으면 내부 커패시터가 쇼트되어 데이터가 전부 소각된다고 작업 일지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건…… 류상혁이가 감시국을 속이려고 남겨둔 가짜 플래그다. 네 아버지는…… 그런 단순한 파괴를 바란 게 아니었어.”
에코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피폐해진 안면 근육이 고통으로 뒤틀렸지만, 스승의 눈빛만은 비정상적으로 또렷하게 번뜩였다.
“그 핀은…… 격발 스위치다. 핀을 뽑는 순간…… 2차 역류 프로토콜이 가동돼. 감시국도, 아카이브도 모르는…… 진짜 사일런트 퍼지가 풀려난다.”
류진은 품속의 코어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던 미세한 양자 진동이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2차 역류라니…… 그게 대체 뭡니까?”
“중앙 타워로 들어간 바이러스는…… 시작에 불과해. 차단 핀이 뽑히면…… 타워에 저장된 통제 코드가 박살 나면서…… 도시 전체의 기억망으로…….”
에코의 말이 끊겼다.
목 안쪽에서 넘어온 피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에코는 심한 기침을 토해내며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류진이 스승의 가슴을 압박하며 기도를 확보하려 했으나, 에코의 손가락은 이미 힘을 잃고 류진의 소매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선생님! 에코 선생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코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숨소리는 남아 있었으나, 극심한 뇌신경 과부하로 인해 의식의 전원이 완전히 내려간 깊은 혼수상태였다.
류진은 떨리는 손가락을 에코의 목덜미 경동맥에 갖다 댔다. 맥박은 가늘었지만 일정하게 뛰고 있었다. 당장 숨이 끊어질 상태는 아니었으나, 전문 의료 시설의 신경 재생 장치 없이 깨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류진은 이를 악물고 에코의 상체를 들어 올려 정비 격실 구석의 두꺼운 방열 패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격실 제어반 아래에 위치한 비상 보관함이었다. 배기탑 외부의 진압 드론이 열화상 센서로 수색하더라도 방열 패널 안쪽의 신호는 쉽게 잡히지 않을 터였다.
“살아 계세요.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류진은 점퍼 소매로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고 격실 벽면의 제어반으로 돌아섰다.
콘솔 스크린에는 배기탑 지하 구조도가 붉은 홀로그램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현 위치는 14번 배기탑 지하 2층 정비 구역. 이 통로의 끝은 구형 산업 폐기물 수송선들이 오가던 비상 모노레일 플랫폼과 직결되어 있었다.
콘솔의 비상 잠금장치 슬롯에 꽂혀 있던 주황색 플라스틱 칩이 류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모노레일 구역 진입용 물리 인가 카드였다.
류진은 거친 동작으로 카드를 뽑아 쥐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양자 코어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금속 외피 한가운데 박힌 수동 차단 핀이 녹색 비상등 아래서 서늘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다.
단순한 데이터 소각 핀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를 뒤흔들 2차 역류 프로토콜의 방아쇠.
류진은 모노레일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비상 탈출구 해치를 발로 차 열었다. 어둠 속으로 뻗은 레일 끝을 향해, 류진의 발걸음이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녹슨 철제 계단을 밟고 내려서는 발소리가 텅 빈 지하 공동을 울렸다. 비상 통로를 빠져나오자 20년 전 운행이 중단된 환기 간선로 모노레일 플랫폼이 모습을 드러냈다. 궤도 양옆으로는 식어버린 윤활유 냄새와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엉겨 붙어 있었다. 승강장 중앙, 누렇게 변색된 방탄 아크릴 창 뒤편에 구형 모노레일 통제 콘솔이 방치되어 있었다.
류진은 정비 격실에서 챙겨 온 주황색 인가 카드를 콘솔 우측 단말기에 밀어 넣었다. 기계적인 마찰음과 함께 전원 인가 릴레이가 맞물리며 먼지 쌓인 녹색 모니터 위로 희미한 주사선이 그어졌다.
[외부 관리자 카드 인증 완료: 14번 배기탑 하부 간선망 수동 모드 전환]
류진은 품에서 양자 코어를 꺼냈다. 외피는 여전히 미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원격 조종을 끊기 위해 에코의 목덜미에서 전자기 방전을 일으켰던 여파로 코어 모서리의 절연 코팅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상단에 돌출된 수동 비상 차단 핀. 에코가 의식을 잃기 직전 남겼던 경고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순한 데이터 파괴 장치가 아니라는 말.
류진은 작업용 점퍼 안쪽에서 광섬유 보조 단자를 꺼내 코어 하단의 진단 포트에 꽂은 뒤, 반대편 케이블을 콘솔 확장 슬롯에 밀어 넣었다.
“분석해.”
명령어를 입력하자 콘솔 키보드가 덜컹거리며 응답했다. 모니터 위에 복잡한 논리 흐름도가 녹색 선을 그리며 빠르게 갱신되었다. 중앙 타워로 흘러들어간 1차 사일런트 퍼지 코드의 침투 경로는 이미 메인프레임 코어 7번 구역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화면 하단, 붉은색 경고 표시와 함께 숨겨진 암호화 계층이 하나씩 벗겨져 나갔다. 아버지 류상혁의 고유 식별 번호가 찍힌 2차 실행 루틴. 수동 비상 차단 핀과 직결된 회로도였다.
류진은 화면을 메운 코드 배열을 응시했다.
코어의 차단 핀은 데이터를 증발시키는 안전장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앙 타워의 메인 제어 커널이 강제로 닫히는 순간을 감지해 발동하는 압력 기폭 장치였다. 핀을 뽑는 즉시, 중앙 타워에 잠복해 있던 사일런트 퍼지는 시스템을 내부에서 부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워 백본망과 연결된 도시 전역의 신경망 인터페이스로 동시에 역류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크로노-데이터를 소비하고 거래하는 크로노스 시티 1천만 시민의 개인 신경망 단말기로 고전압 논리 폭탄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구조였다.
단순한 메인프레임 마비가 아니었다.
도시 전체 시민의 기억 중추와 뇌 신경망을 영구적으로 태워버리는 광역 연쇄 소각 프로토콜이었다.
“메인프레임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었어…….”
건조한 혼잣말이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이 핀을 뽑으면 도시 전체의 뇌가 타버린다.”
아버지는 크로노스 기업을 무너뜨리기 위해 도시 전체를 인질로 삼았던 것인가. 아니면 이 도시 전체가 이미 복원할 수 없을 만큼 오염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인가. 손가락 끝에 걸려 있던 차단 핀의 무게가 납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러왔다. 이 핀을 뽑아 자폭하겠다는 위협은, 아카이브뿐만 아니라 이 하층 구역과 상층 구역에 숨 쉬고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줄을 쥐고 흔드는 짓이었다.
쾅!
머리 위쪽 15미터 높이의 강철 환기창이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승강장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콘크리트 바닥이 진동하며 자욱한 분진이 솟구쳤다.
날카로운 로터 회전음과 고주파 터빈 소리가 밀폐된 승강장을 가득 메웠다. 먼지 구름을 뚫고 네 대의 중장갑 진압 드론이 허공에 자리를 잡았다. 칠흑 같은 무광택 외피에 감시국의 식별 코드가 선명한 기체들이었다.
지잉.
네 대의 드론 하부에 장착된 이중 총열 펄스 건이 일제히 회전했다. 붉은색 레이저 조준선 네 줄기가 류진의 심장과 양자 코어 표면 위에 정확히 겹쳐졌다.
드론 전면의 광학 센서가 번뜩이더니, 내장된 지향성 스피커에서 노이즈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계음이 섞여 있었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아카이브였다.
“신경 링크를 강제로 단락시키고 쥐새끼처럼 기어 내려간 곳이 고작 폐기된 모노레일 승강장인가, 류진.”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다. 통신 복구를 끝마친 아카이브의 백본 신호가 드론의 중계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화면을 꽤 흥미롭게 보고 있더군. 류상혁 연구원이 남긴 마지막 걸작의 구조를 이제야 확인한 모양이지?”
류진은 콘솔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왼손은 여전히 코어의 수동 차단 핀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등의 화상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손가락 마디마디에 잔뜩 힘을 주어 핀을 당길 준비를 유지했다.
“알고 있었나, 아카이브.”
“당연히 알고 있었다. 5년 전 네 아버지를 처단할 때 회수한 파편 데이터를 통해 그자가 무엇을 꾸몄는지 이미 계산을 끝냈다. 우리는 그 끔찍한 재앙을 막기 위해 류상혁의 흔적을 지우고 프로젝트를 통제 하에 두려 했던 것이다.”
드론 한 대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며 류진의 3미터 앞까지 접근했다. 펄스 건의 약실이 장전되는 차가운 금속음이 울렸다.
“차단 핀을 뽑겠다고 날 협박했었지. 배기탑 철교 위에서 네가 보인 그 가소로운 배수진 말이다.”
아카이브의 비웃음이 스피커를 타고 날카롭게 긁혔다.
“자, 뽑아 봐라. 네 손으로 크로노스 시티 천만 명의 뇌세포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라. 네 아버지가 완성한 그 살인 무기의 기폭 스위치를 당겨 보란 말이다. 기억을 지키겠다는 복원가 견습생의 긍지는 어디로 갔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도시 전체를 통째로 태워 죽여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조준 레이저가 류진의 미간으로 천천히 올라붙었다. 타는 듯한 붉은 광선이 망막을 찔렀다.
“핀을 뽑지 못한다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코어를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라. 너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다.”
류진은 핀을 움켜쥔 손을 풀지 않은 채, 붉은 레이저가 어른거리는 드론의 렌즈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차가운 땀 한 방울이 턱선을 타고 콘솔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