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밑까지 차오른 흙탕물이 거친 거품을 뿜어냈다. 고태민은 벽면에 박힌 녹슨 강철 사다리의 세 번째 발판을 밟고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오수 표면에는 코어를 적출당하고 붕괴한 2급 괴이의 검은 점액질이 두껍게 엉겨 붙어 있었다. 신경망이 터지며 새어 나온 잔여 침전 독기가 좁은 천장 틈새를 가득 메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포가 짓물려 들어가는 듯한 작열감이 목구멍 안쪽을 긁어댔다. 기침을 뱉자 피 냄새 섞인 오물 맛이 혓바닥에 번졌다.
철판으로 밀폐된 공간 안에서 수압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배관 연결부의 고무 패킹이 찢어지며 사방에서 굵은 물줄기가 쐐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다리의 부식된 강철 앵커가 콘크리트 벽면에서 미세하게 들썩였다. 끼익, 하는 날카로운 금속 피로음이 벽을 타고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고태민은 젖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천장 유압 파이프에 달린 붉은색 수동 배수 밸브 휠에 손을 얹었다.
지름 40센티미터의 주철 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퇴적된 인과 침전물이 기름때와 뒤엉켜 기어 축 사이에 단단한 석회질처럼 굳어 있었다. 상류에서 밀려드는 수천 톤의 배수 압력이 밸브 디스크를 안쪽에서 틀어막고 있는 탓도 컸다.
고태민이 체중을 실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휠을 당겼다.
손바닥 가죽이 짓이겨지며 밸브 림에 묻은 거친 녹가루가 살점을 파고들었다. 뼈마디가 비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밸브 축은 1밀리미터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 순간 발아래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발을 딛고 있던 사다리 세 번째 가로대가 용접 부위부터 찢겨 나가며 오수 속으로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몸이 아래로 쏠렸다. 고태민은 반사적으로 왼팔을 뻗어 유압 강관을 낚아채며 매달렸다. 차오른 수면이 허리춤을 집어삼켰고,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다리를 거세게 잡아끌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폐 안으로 들이찬 유독 가스 때문에 시야 한구석이 허얗게 탈색되어 갔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1분 남짓이었다. 여기서 수위를 낮추지 못하면 천장에 닿은 오수가 마지막 공기층마저 집어삼킬 터였다.
고태민은 젖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검은 탄소 쐐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특수 유실물 관리청에서 강관 파열 및 비상 격실 개방용으로 지급하는 고강도 탄소 복합재 공구였다. 그는 젖은 장갑을 벗어던지고 맨손으로 파이프를 감싸 쥔 채, 탄소 쐐기를 밸브 축과 기어 박스 틈새에 비스듬히 박아 넣었다.
틈새에 물린 쐐기를 밸브 휠의 스포크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캉.
고막을 찢는 금속음과 함께 주황색 불꽃이 튀었다. 굳어 있던 침전물 파편이 유리 파편처럼 부서져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지만 기어는 여전히 회전 축에 걸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단순한 물리적 고착이 아니었다.
고태민의 시선이 밸브 바로 옆, 벽면에 매립된 방수 배수 제어반으로 향했다. 침수 직전의 패널 표면에서 주황색 비상 경고등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점멸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의 작은 디지털 액정판에 붉은색 시스템 코드가 연속으로 갱신되는 중이었다.
외부 우회 접속 감지. 시스템 강제 락다운 03번 프로토콜 가동.
그 아래로 모노리스 사의 전용 암호화 식별 부호가 박혀 있었다. 바이패스 밸브 축을 잡고 있는 전자석 래치가 모노리스의 원격 해킹으로 인해 강제로 잠겨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경고창 바로 아래, 파란색 명령줄이 쉬지 않고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단자함 물리 전원 강제 차단 시도.
제어 콘솔 재부팅 명령 수신.
인가 요원 코드: 장예린.
리셋 재시도 14회 실패.
리셋 재시도 15회 승인 대기.
고태민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밸브가 걸린 게 아니었어. 외부 침입으로 잠긴 시스템을 장 요원이 밖에서 계속 강제 리셋하려 애쓰고 있었군.”
밖으로 나간 장예린은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본청 지원망이 끊긴 통신 방해 속에서 배관 외곽 제어반을 뜯어내고 수동 락다운을 해제하기 위해 제어 콘솔을 물리적으로 짓부수며 전원을 강제 순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액정 화면의 전압 수치가 곤두박질쳤다.
15번째 리셋 명령이 들어가자마자 전자석 래치를 붙들고 있던 백업 배터리의 붉은 램프가 일제히 꺼졌다. 모노리스의 강제 잠금에 미세한 틈이 벌어졌다.
고태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부러진 사다리 기둥에 오른발을 걸치고, 두 손으로 탄소 쐐기의 끝부분을 움켜쥐었다. 남아 있는 악력을 전부 쥐어짜 내며 쐐기를 밸브 기어 톱니의 물림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열려라.”
우지직.
체중을 온전히 실어 지렛대를 꺾어 내리자, 굳어 있던 주철 축이 비명을 지르며 반 바퀴 돌아갔다.
전자석 락이 풀린 래치가 튕겨 나가고, 밸브 휠이 수압을 이기지 못해 맹렬한 속도로 헛돌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수문실 하단 배수로의 두꺼운 주철 덮개가 열렸다.
엄청난 수압 차이로 인해 갇혀 있던 오수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하부 터널로 빨려 들어갔다. 격실 안을 채우고 있던 수위가 순식간에 썰물처럼 꺼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역류의 흡입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수천 리터의 물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발생한 하향 진공이 고태민의 하반신을 거세게 낚아챘다.
끼에엑, 쾅.
체중과 진공 수압을 견디지 못한 사다리 본체가 벽면 콘크리트를 뜯어내며 통째로 부러져 나갔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고태민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배수로 구멍을 피했다.
어깨가 튀어나온 유압 파이프 모서리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왼쪽 쇄골 부근에서 뼈가 어긋나는 끔찍한 통증이 치밀었다.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입안으로 밀려든 탁수가 목소리를 짓눌렀다.
물살에 휩쓸려 하부 배수로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고태민은 부러지지 않은 오른팔을 머리 위로 뻗었다.
손가락 끝에 천장 점검구에 달린 원형 비상 에어록 해치의 수동 손잡이가 걸렸다.
손잡이를 부여잡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갔다. 아래쪽에서는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바지를 찢을 듯 잡아당기고 있었고, 위쪽에서는 어깨의 격통이 온몸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고태민은 이를 바스러지도록 악물었다. 그는 단전에서부터 긁어모은 힘으로 상체를 끌어올려 에어록 해치 림에 두 다리를 걸쳤다.
배수로로 대부분의 오수가 빠져나가며 격실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도할 틈은 없었다.
해치 너머, 배관 상류 외곽 정비 통로 쪽에서 날카로운 금속 파열음과 함께 본청 주파수가 아닌 불법 무전 신호음이 에어록 철판 틈새를 뚫고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고태민은 탈구된 왼쪽 어깨를 에어록 모서리에 짓이기듯 밀어 넣어 억지로 관절을 맞췄다. 뚝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피 묻은 오른손으로 에어록 해치의 개방 레버를 힘껏 젖혔다.
장예린은 방탄복 가슴팍에 고정된 무전기를 뜯어내듯 움켜쥐었다.
본청 비상 주파수를 맞춘 다이얼에서는 찢어지는 잡음만 흘러나왔다. 송신 스위치를 세 번 연거푸 눌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먹통이 된 먹먹한 백색소음뿐이었다.
“본청 통제실, 여기는 제3감식소 장예린 요원. 하부 수문실 낙하로 고태민 반장 고립. 즉시 긴급 차단 해제 코드 송출 바람. 응답하라.”
대답은 없었다. 대신 잡음 한가운데를 비집고 둔탁한 파열음이 끼어들었다.
지직, 치익.
잡음의 파형이 매끄럽게 정돈되더니, 변조기를 거치지 않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본청 회선은 십 분 전부터 종로 일대 중계기째로 묶여 있습니다, 장 요원. 거기에 대고 목청을 높여 봐야 허공에 삽질하는 꼴이지요.”
장예린의 턱 끝이 굳었다.
단파 무전기 액정에 찍힌 수신 채널은 비인가 암호화 주파수였다.
그녀는 왼손에 쥔 원통형 차폐 캔의 잠금 레버를 엄지로 단단히 눌렀다. 캔 외벽의 인디케이터가 차가운 청자색 빛을 뿜어내며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컨테이너에서 강제로 적출해 낸 주파수 변조 코어였다.
“문승조.”
“그렇게 각박하게 부를 필요는 없잖습니까. 서로 얼굴 튼 사이끼리.”
무전기 너머에서 가벼운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느긋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영사실에서 터진 3급 유실물에 이어, 종로 지하 침전망까지. 고 반장 그 양반의 고지식한 일처리는 여전하더군요. 그 낡은 방식으로는 본인 목숨 하나 건지기도 벅찰 텐데 말입니다.”
“현장 전파 방해를 네놈들이 걸었군. 관리청 통신망을 통째로 재밍하는 건 특수 테러 행위야.”
“테러라니, 섭섭한 표현이군요. 우리는 그저 정당한 자산 회수 작업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관리청 고위층과의 계약서에도 분명히 명시된 조항이지요. 장 요원도 본청에서 승진 시험을 준비하는 똑똑한 인재라면, 어느 줄을 잡아야 1급 특수요원 자리가 나오는지 잘 알 텐데요.”
문승조의 말에는 숨김없는 조롱과 확신이 깔려 있었다.
장예린은 무전기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콘솔 제어반의 압력계를 훑었다. 수문실 안쪽을 나타내는 유압 게이지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 붉은색 한계선에 박혀 있었다. 바이패스 전원을 쏴서 강제 리셋을 시도했지만, 모노리스가 심어 둔 락다운 프로그램이 원격으로 밸브 통제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안에서 오수가 가득 찼다면 고태민은 이미 숨이 끊어졌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장예린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무전기를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자산 회수? 종로 일대 실직자들의 미련을 긁어모아 2급 괴이로 벼려낸 게 모노리스의 자산이라는 소린가?”
“그 미련들이 지하에 썩어가며 도시 전체를 오염시키는 것보단, 일정한 주파수로 정제해서 유용한 동력원으로 쓰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지 않습니까. 장 요원이 들고 있는 그 코어는 단순한 암시장 밀반출 품목이 아닙니다. 종로 지하 전역에 묻힌 인과 침전물을 단 한 번의 파동으로 재배열할 수 있는 기폭 장치죠.”
문승조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그걸 들고 상부 배기탑 쪽으로 나오세요. 그러면 고 반장의 시신이라도 온전하게 수습할 수 있도록 수문실 차폐벽을 열어 드리지요. 퇴출로 역시 모노리스의 특별 운송 차량으로 안전하게 보장하겠습니다.”
달콤한 회유 뒤에 숨은 칼날이 선명했다.
장예린은 통로 벽면에 등을 밀착한 채, 방탄복 허리 벨트에 장착된 테이저건과 권총의 탄창 결합 상태를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모노리스는 이 코어를 이용해 서울 도심 지하의 침전물을 일거에 폭주시키려 하고 있었다. 단순한 괴이 사육이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대규모 참사를 일으킨 뒤, 관리청의 수습 능력을 마비시키고 사설 방역 독점권을 쥐려는 수작이었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관리청 내부의 무능한 관료들이 내던져 주는 허울뿐인 승진이 아니었다.
“코어를 넘겨받고 싶다면 허튼작업은 관두고 직접 얼굴을 비추시죠, 문승조 씨.”
“협상을 할 줄 아는군요. 하지만 내 인내심도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1분 주지요.”
장예린은 대답하지 않고 무전 송신 버튼에서 손을 뗐다.
그녀의 눈동자가 콘솔 모니터 하단 구석의 비상 밸브 압력 표시등에 가닿았다.
치이익.
붉은색 경고등이 번쩍거리던 유압 배관 그래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8.5바에 머물러 있던 수문실 내부 배수 압력이 순식간에 2.1바까지 곤두박질쳤다.
동시에 모니터 상단에 굵은 황색 경보가 점멸했다.
[경보: 하부 바이패스 드레인 기계적 파쇄 확인]
[수문실 내부 수위 급감 90퍼센트 돌파]
[비상 점검 해치 래치 개방 감지]
장예린의 입꼬리가 짧게 비틀렸다.
살아남았다. 그 지독한 수압과 독성 오수 속에서, 기어코 탄소 쐐기로 밸브 축을 박살 내고 길을 열어젖힌 것이다.
그녀는 주저 없이 차폐 캔의 상단 밸브를 돌려 이중 안전핀을 잠갔다. 청자색 코어가 캔 내부에서 사납게 회전하며 웅웅거리는 진동을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토해냈다.
문승조에게 코어를 넘길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장예린은 권총을 뽑아 약실을 당겨 장전했다. 철컥하는 명쾌한 금속 마찰음이 배관 정비 통로의 눅눅한 공기를 갈랐다.
“1분은 당신한테나 필요한 시간이야.”
그녀가 통신기를 바닥에 내던져 군홧발로 짓밟아 부수었다.
플라스틱 외피가 깨져 나가며 문승조의 목소리가 끊겼다.
장예린이 차폐 캔을 품에 안고 상부 배기탑 출구를 향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쾅.
통로 모퉁이에 연결된 비상 점검용 원형 배수관 덮개가 거센 충격을 받아 튕겨 나가듯 걷어차였다.
녹슨 주철 덮개가 바닥을 구르며 요란한 굉음을 토해냈고, 그 뒤를 이어 피와 검푸른 오물로 흠뻑 젖은 군화가 묵직하게 바닥을 디뎠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질척이는 발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배수관 모서리를 짚고 일어선 고태민의 감색 양복은 시커먼 침전 오물과 핏물에 찌들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탈구 직전까지 비틀렸던 왼쪽 어깨를 우악스럽게 바로잡으며, 그는 오른손에 쥔 탄소 쐐기를 통로 바닥에 짓이기듯 내리찍었다. 쇳소리가 나며 콘크리트 바닥에 파편이 튀었다.
장예린이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권총을 쥐었다가, 기어 나온 인영을 확인하고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반장님?”
그녀의 눈에 깃든 긴장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안도로 바뀌었다. 장예린은 망설임 없이 다가가 고태민의 부러진 쪽 팔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살아 나오셨군요. 외곽 바이패스 콘솔을 강제 리셋해 보긴 했는데, 락다운 프로그램이 워낙 질겨서 늦은 줄 알았습니다.”
“늦진 않았어. 뼈마디가 몇 개 나갔을 뿐이지.”
고태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통로 벽면에 몸을 기댔다. 탈구된 어깨를 누른 손가락 사이로 오수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산산조각 난 무전기 파편과 장예린이 품에 안고 있는 차폐 캔으로 향했다.
“무전기는 왜 부쉈나?”
“문승조 놈이 비인가 주파수를 따고 들어왔습니다.”
장예린이 차폐 캔을 고태민의 눈앞에 보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캔 내부에서 청자색 코어가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며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종로 지하 전역의 통신망을 모노리스가 차단했습니다. 이 코어를 넘기면 퇴출로를 열어 주겠다고 회유하더군요.”
“코어를 들고 혼자 튀라는 제안이었군.”
“개소리죠. 현장 규정 제12조에 따르면 증거물은 인가된 봉인 절차 없이 민간이나 사설 업체에 인계할 수 없습니다.”
장예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더구나 문승조 그 작자가 입을 놀렸습니다. 이 코어는 단순한 암시장 밀반출 품목이 아닙니다. 종로 일대 지하 배관망에 수십 년간 썩어 들어간 실직과 파산, 체념 침전물을 한꺼번에 폭주시키는 기폭 열쇠라고 했습니다. 도심을 유실 구역으로 밀어버리고 민영화 독점권을 쥐려는 수작입니다.”
고태민의 눈썹이 꿈틀했다.
“인위적인 인과 붕괴로 참사를 일으키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본청 윗선 일부도 이 판에 결탁한 정황이 있습니다. 이 자산 회수를 막고 코어를 본청 감찰부에 정식 증거물로 들이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놈들 판을 깨고 특수수사권까지 끌어올 수 있습니다.”
장예린의 눈동자에 원칙과 승진에 대한 집념이 서슬 퍼렇게 타올랐다. 그녀는 방탄복 주머니에서 압박 붕대를 꺼내 고태민의 어깨를 단단히 감아올렸다.
“일단 지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상부 배기탑 점검로가 유일한 퇴출로입니다.”
“그래. 빚은 나중에 갚지.”
고태민이 탄소 쐐기를 고쳐 쥐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삐익.
날카로운 고주파 신호음이 통로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닥에 산산조각 나 있던 무전기 잔해에서 뿜어져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머리 위, 율곡로 지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환기 배기탑 내부에서 철판이 찢겨 나가는 기괴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천장의 사각 환기 격벽이 안쪽으로 우그러지며 폭파되었다. 잘려 나간 볼트와 철골 파편이 비 오듯 쏟아졌고, 짙은 화약 연기 속에서 서늘한 기계 구동음이 터져 나왔다.
위잉. 위이잉.
연기를 가르고 하강한 것은 관리청의 지원 병력이 아니었다.
무광 검은색 도료가 칠해진 여섯 대의 소형 쿼드콥터 드론이었다. 기체 하부에는 모노리스의 일련번호와 삼각 로고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고, 그 밑으로 장착된 총구들이 기계적인 마찰음을 내며 회전했다.
통로의 어둠 속으로 붉은색 레이저 조준선 여섯 개가 일제히 내리꽂혔다.
붉은 광선 네 개가 고태민의 이마와 가슴, 그리고 장예린이 쥐고 있던 차폐 캔의 중심부에 교차하듯 겹쳐졌다. 나머지 두 개는 장예린의 미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통로의 퇴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환기탑 상공에 매달린 드론 편대의 지향성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잡음이 걷히더니, 정돈되고 매끄러운 중저음이 울려 퍼졌다. 단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차분하고 오만한 목소리였다.
“감식반의 집념 하나는 인정해야겠군요, 고태민 반장.”
문승조였다.
스피커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장 요원에게 거래를 제안했던 건 시간을 조금 벌어볼까 하는 요량이었는데, 수문실 바닥을 기어코 부수고 올라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현장 요원 치고는 지나치게 질긴 생명력입니다.”
고태민은 통증으로 굳어가는 어깨를 애써 펴며 장예린의 앞을 비스듬히 막아섰다. 바닥의 콘크리트 가루를 짓밟으며 그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남의 관할 구역에 불법 비행체를 띄우는 취미는 여전하군, 문 대표.”
“취미라니요. 당신들이 들고 있는 건 애초에 관리청 소유가 아닙니다. 보급과 예산 장부 어디에도 그 코어의 존재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스피커의 음성이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여섯 대의 무장 드론이 총열을 장전하는 금속음이 통로를 메웠다.
“차폐 캔을 바닥에 내려놓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나십시오. 장 요원의 건방진 거절과 반장님의 무모한 원칙주의는 여기서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