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중한 톱니바퀴의 맞물림이 덜컥 멎으며 기계실 구석에 무거운 먼지가 내려앉았다. 8시 정각을 알리던 기계 장치가 멈추자, 귓바퀴를 찌르듯 맴돌던 금속 마찰음 대신 낡은 베어링에서 새어 나오는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태이가 채은의 손목을 움켜쥔 손에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나, 제발 정신 차려. 110데시벨이면 방음 장비를 써도 고막 안쪽까지 찢어지는 충격이야. 저 인간은 누나 귀 상태를 알면서 일부러 여기까지 끌고 온 거라고. 저 도면이 진짜든 가짜든, 누나가 왜 귀를 걸고 증명해야 하는데?”
태이의 거친 호흡이 좁은 기계실 바닥을 때렸다. 채은은 태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밀어내며 팔을 뒤로 뺐다.
“도망칠 생각 없으니까 손 놔, 태이야. 내 귀로 확인하기 전까진 한 발자국도 안 내려가.”
“누나!”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하지만 이건 내가 도망치면 영원히 아버지가 도망친 게 돼.”
채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태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바짝 말린 채 채은을 노려보았다.
채은은 망설이지 않고 바닥에 놓인 검은색 펠리칸 케이스 앞으로 다가갔다. 두 개의 잠금장치를 거칠게 제치자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상판이 젖혀졌다. 고밀도 우레탄 폼 사이에 정밀하게 안치된 계측용 장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채은은 은색 금속 몸체로 된 캘리브레이션 무지향성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가느다란 펜슬형 몸체 끝에 1/2인치 정밀 캡슐을 조심스럽게 돌려 끼웠다. 나사산이 맞물려 들어가는 동안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조금 전 공학관 차음 부스에서 겪었던 100데시벨 고주파 충격의 여파가 아직 손가락 말초신경에 남아 있었다.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경원이 그 작은 떨림을 놓치지 않고 짚어냈다.
“손끝이 흔들리는데. 벌써 전정기관에 과부하라도 걸렸나?”
경원의 목소리는 시계탑 외벽을 스치는 밤바람만큼 건조했다. 경원은 작업대 위에 놓인 소형 엘이디 작업등을 집어 들더니, 뒤편 어두컴컴한 벽돌 벽면으로 빛을 돌렸다.
빛줄기가 향한 곳은 기계실 사각 모서리가 아니었다. 도면대로 기계실 북서쪽 모서리에서 안쪽으로 정확히 28도 꺾여 들어간 돌출 벽체였다. 붉은 벽돌과 노출 콘크리트가 기묘하게 엇갈려 쌓인 벽면을 비추자, 표면에 거미줄처럼 갈라진 실금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기 똑똑히 봐.”
경원이 불빛의 초점을 좁히며 벽체 틈새를 가리켰다.
“단순히 건물이 낡아서 생긴 균열이 아니야. 내부 슬릿에서 저주파 진동이 상쇄되지 못하고 겉돌면서 콘크리트를 안쪽에서부터 깨부순 피로 파괴 흔적이다. 타종 진동이 벽체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압력을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어. 네 아버지가 만든 건 진동을 잡는 차음벽이 아니라 소음을 키워 구조를 갉아먹는 증폭 장치였다는 뜻이야.”
채은은 작업등 불빛이 머무는 균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벽돌 사이의 모르타르가 하얗게 바스러져 바닥으로 가루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태이가 거칠게 끼어들었다.
“말은 청산유수네. 20년 동안 멀쩡히 서 있던 건물을 두고 증폭 장치 운운하는 저의가 뭔데? 결국 선배 음향 실험에 써먹을 데이터 뽑겠다고 사람 하나 몰아세우는 거잖아. 증폭인지 차음인지 그게 누나랑 무슨 상관인데!”
태이는 작업대 옆에 놓여 있던 철제 접이식 의자를 끌어당겨 쾅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털썩 주저앉아 팔짱을 꼈다.
“나 여기서 한 발짝도 안 나가. 둘이서 무슨 짓을 하는지 내 눈으로 끝까지 감시할 거야. 누나 귀에 조금이라도 이상 생기면, 선배 저 레코더고 캘리브레이션 툴이고 시계탑 창밖으로 집어던져버릴 줄 알아.”
경원은 태이를 비웃지도, 제지하지도 않았다. 그저 손목시계를 한 번 힐끗 내려다보고는 채은을 향해 턱짓했다.
“시간 낭비할 여유 없다. 기준점부터 잡아.”
채은은 두 사람의 신경전을 등 뒤로 밀어내며 카본 붐 폴의 잠금 링을 돌렸다. 3단으로 이루어진 폴이 차례로 길이를 늘이며 가볍고 단단한 마찰음을 냈다. 마이크 홀더에 쇼크마운트를 단단히 결착하고, 얇은 신호 케이블을 폴 몸체에 나선형으로 감아 내려왔다.
채은은 마이크 붐을 세워 든 채 28도로 꺾인 벽체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된 방수 페인트가 바스러지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벽면과 마이크 사이의 거리를 50센티미터로 유지한 채, 채은은 오른손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콘크리트와 벽돌이 맞닿은 경계선을 둘째 손가락 마디로 톡, 톡 두드렸다.
탁. 탁.
첫 번째 타격음은 막힌 벽 특유의 먹먹하고 무거운 소리였다.
채은은 손을 옆으로 10센티미터 옮겨 다시 벽면을 두드렸다.
통.
소리가 미세하게 바뀌었다. 먹먹한 콘크리트 타격음 뒤로, 벽체 속 빈 공간을 타고 흩어지는 가느다란 공기층의 울림이 귓속을 스쳤다. 일반적인 귀로는 알아채기 힘든 미세한 공동음이었다. 벽 뒤에 분명히 비어 있는 통로, 아버지가 도면에 남겨둔 슬릿 챔버의 내부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채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가라앉았다.
“비어 있어. 아버지가 덮어버린 게 아니라, 설계대로 공동을 남겨뒀어.”
채은은 붐 폴 끝을 벽면의 균열 가장 깊은 틈새로 바짝 밀어 넣었다.
균열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마이크 윈드스크린을 스쳤다. 채은은 모니터링 헤드폰을 귀에 완전히 밀착시키며 인풋 레벨 노브를 아주 미세하게 틀어쥐었다.
뒤편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도경원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은색 하드 케이스에서 포터블 동축 모니터 스피커와 신호 발생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경원은 연결 케이블을 거칠게 꽂으며 채은의 등 뒤로 걸어왔다.
“단순히 빈 곳을 찾았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벽체가 진동을 빨아들이는지, 아니면 저 안에서 부딪혀서 소리를 증폭시키는지 현장 음압으로 확인해야 해.”
경원이 신호 발생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모의 주파수 출력한다. 60헤르츠부터 12킬로헤르츠까지 스위프 음.”
“선배, 잠깐만요!”
태이가 의자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이 좁은 밀폐 공간에서 고출력 스위프를 쏜다고요? 공학관 부스랑은 울림 자체가 달라요. 콘크리트 반사음 때문에 고막 바로 나간다고요!”
경원은 태이의 외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토글스위치를 내렸다.
삐이이익하는 높은 파열음이 스피커에서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저주파 대역으로 꺾여 내려간 소리는 기계실 바닥 콘크리트를 뒤흔들며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웅, 웅거리며 벽면 전체가 진동판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채은의 귓속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 공학관 차음 부스에서 연습했던 35도 수음 각도는 현장 벽면의 꺾임과 맞지 않았다. 소리가 벽을 맞고 튕겨 나와 마이크 캡슐과 귓바퀴를 동시에 후려쳤다.
채은은 어금니를 악물고 붐 폴의 각도를 틀었다. 35도가 아니었다. 도면에서 보았던 수치 그대로, 벽면의 경사각에 맞춘 28도였다. 붐 폴을 7도 안쪽으로 꺾어 균열의 중심선과 마이크 지향축을 평행하게 맞추는 순간, 헤드폰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난반사 소음이 기적처럼 꺾였다.
스피커의 출력 게인이 거침없이 올라갔다. 신호 발생기 액정에 붉은색 피크 표시가 깜빡이며 105, 108, 마침내 110데시벨의 숫자가 찍혔다.
거대한 기계 톱니바퀴들이 공명 주파수에 반응해 짤랑거리며 흔들렸다. 채은은 숨을 멈추고 레코더 액정의 주파수 스펙트럼을 노려보았다. 스위프 음이 120헤르츠 저음역에 도달했을 때, 균열 틈새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의 위상이 반전되며 파형이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벽체는 소리를 키우는 게 아니라, 특정 대역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만해! 당장 끄라고!”
태이가 소리를 지르며 스피커 앞으로 돌진했다. 태이는 바닥에 연결된 두꺼운 전원 케이블을 움켜쥐고 단번에 뽑아내려 했다.
경원이 한발 빠르게 태이의 팔목을 낚아챘다.
“손 치워. 지금 측정 끊기면 위상 데이터 다 날아가.”
“사람 귀가 망가지든 말든 데이터만 건지면 끝이야? 당신 진짜 제정신 아니야!”
태이가 팔을 비틀며 경원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냈다. 두 사람의 몸이 엉키며 기계실 중앙의 철제 작업대로 부딪혔다. 덜컹거리는 굉음과 함께 작업대 위에 얹혀 있던 경원의 캔버스 가방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지퍼가 열려 있던 가방 안에서 필기구와 레코딩 노트, 그리고 두툼한 결재 문서 한 뭉치가 콘크리트 바닥으로 쏟아져 흩어졌다.
바닥을 구른 종이 뭉치 첫 장 상단에 새겨진 굵은 글씨가 채은의 시야에 꽂혔다.
‘중앙도서관 서관 시계탑 정밀안전진단 및 철거 심의안.’
붉은색 대외비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서류 아래쪽에는 대학 본부 시설관리위원회의 직인이 눌려 있었다.
태이의 움직임이 굳었다. 경원을 향해 뻗었던 손을 멈추고 바닥에 떨어진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철거 심의?”
채은은 붐 폴을 천천히 내렸다. 헤드폰 너머로 스피커의 백색소음만이 무겁게 기계실을 채우고 있었다. 채은은 발밑에 떨어진 서류철을 주워 올렸다.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적나라한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계탑 내부 종루 가동 시 발생하는 구조 진동 및 저주파 소음 기준치 초과. 20년 전 시공된 음향 완충 벽체의 설계 결함으로 인한 피로 파괴 위험 확인. 본관 시설위원회는 학생 안전을 위해 시계탑 상부 철거 및 전자식 차임벨 대체 안건을 상정함.’
심의 일시는 바로 내일이었다.
채은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경원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예요?”
경원은 구겨진 셔츠 깃을 거칠게 정리하며 숨을 골랐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아래에는 채은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보이는 그대로다.”
경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대학 본부는 이미 결론을 내렸어. 20년 전 시공 결함 때문에 타종할 때마다 건물 기초가 깎여 나가고 있다고. 저 청동 종을 떼어내고, 기계실을 헐어내고, 콘크리트로 타워를 메워버릴 계획이야.”
“그럼…… 아버지가 결함을 숨겼다는 소리도…….”
“공식 기록엔 그렇게 올라가 있어. 설계자인 백진우 교수가 소음 차단 설계를 실패했고, 그걸 감추려고 엉터리 벽체를 세워 진동을 키웠다고 적혀 있지.”
경원은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을 거두지 않고 발끝으로 툭 찼다.
“내일 오전 10시, 본관 시설위원회에서 현장 최종 실사가 열린다. 오늘 밤 자정 타종 때 네가 28도 보정 벽체의 차음 데이터를 완벽하게 실측해 내지 못하면, 내일 오전 10시 본관 시설위원회에서 이 시계탑의 철거 결함 승인이 떨어진다.”
경원의 시선이 채은의 손에 쥐린 붐 마이크로 향했다.
“철거 승인이 나는 순간, 네 아버지는 학교 역사상 최악의 부실 설계를 남긴 교수로 영원히 남게 돼. 그리고 이 종루는 영원히 소리를 잃겠지.”
태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경원을 노려보았다.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왜 진작 말 안 하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몰아붙여요!”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경원이 차갑게 맞받아쳤다.
“이건 감정으로 동정표 얻는 싸움이 아니야. 숫자로 된 물리 데이터가 없으면 위원회 늙은이들은 도면 한 장 거들떠보지도 않아. 백진우 교수가 만든 28도 벽체가 소음을 증폭시키는 흉물이 아니라, 진동을 상쇄하는 공명 장치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건 오직 완벽한 실측 주파수뿐이다.”
경원은 채은 앞으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선택해, 백채은. 지금 장비 챙겨서 이 문밖으로 나갈 건지, 아니면 자정까지 저 벽 뒤에 숨겨진 공명 챔버의 정확한 영점을 찾아낼 건지.”
시계탑 톱니바퀴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거대한 괘종시계의 문자반 뒤편에서 째깍거리는 금속 마찰음이 카운트다운처럼 울려 퍼졌다.
자정 타종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시간 남짓이었다.
채은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바닥에 뒹구는 철거 심의안 서류 위로 운동화 앞코를 디디며, 작업대 위에 펼쳐진 단면 상세도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형광펜 자국과 미세한 치수선들이 얽힌 트레이싱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갈 생각 없어요.”
채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날이 서 있었다. 고개를 든 채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경원의 시선을 받아냈다.
“내일 오전 10시 심의회 전에 끝내요. 45분 뒤 자정 타종 때, 내가 저 종 밑바닥에 마이크 꽂을 테니까.”
태이가 황급히 채은의 팔을 붙잡았다.
“채은아, 제발 정신 차려. 저 안은 110데시벨이야. 차음 부스에서 버틴 건 스피커로 쏜 모의 신호였잖아. 진짜 청동 종이 울리면 밀폐된 공간 전체가 하나의 쇠북처럼 울려. 귀 안쪽 림프액까지 진동해서 영구 손상 올 수도 있어!”
“알아. 소리가 뼈를 때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공학관 부스에서 이미 겪었어.”
채은은 태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떼어냈다. 그리고 도면 우측 하단, 28도 보정 벽체의 바닥 접합부를 검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이것 봐, 태이야. 여길 잘 보면 벽체 하단부에 일정한 간격으로 볼트 구멍이 파여 있어. 일반적인 구조 지지용 앵커 볼트가 아니야. 콘크리트 슬릿 뒤쪽에 50밀리미터짜리 에어 갭이 형성되어 있고, 그 하단에 미세한 개구부가 뚫려 있어.”
경원이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도면 위로 상체를 굽혔다.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공동의 목…… 헬름홀츠 공명기 구조인가.”
“맞아요.”
채은이 도면의 단면선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아버지는 진동을 무작정 막으려고 벽을 두껍게 만든 게 아니었어요. 시계탑 전체를 흔드는 60헤르츠 이하의 초저주파를 이 좁은 슬릿 통로로 빨아들여서, 내부 공동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갉아먹게 만든 거예요. 시공사 놈들이 공사비를 아끼려고 마감판을 덧대면서 개구부를 콘크리트로 대충 틀어막아 버렸던 거고요. 그래서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벽체를 때리면서 건물 전체로 진동이 번진 거예요.”
경원이 턱을 굳히며 낮게 읊조렸다.
“그 막힌 개구부의 중심 좌표가 바로 저 28도 보정 벽체 정중앙이라는 소리로군.”
“네. 그 좌표를 마이크 캡슐로 정확히 짚어내면 타종 순간 벽체 내부의 공명 흡수 그래프가 수치로 떠요. 아버지가 남긴 설계가 부실이 아니라, 완벽하게 계산된 차음 장치였다는 물리적 증거가 되는 거죠.”
채은은 지체하지 않고 작업대 위에 놓인 장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펠리칸 케이스에서 무지향성 측정 마이크와 초지향성 샷건 마이크 두 대를 꺼내 카본 붐 폴 끝의 스테레오 바에 단단히 결착했다. 케이블을 꼬임 없이 풀어내며 채은은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더 이상 테스트를 받는 신입생의 태도가 아니었다.
“역할 나눠요. 태이 너는 인터페이스 물려서 실시간 주파수 스펙트럼 분석기 모니터링해. 120헤르츠 대역에서 하모닉스 튀는 순간 바로 수치 기록해 줘. 네 절대음감이 제일 정확하니까.”
태이는 채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짓이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이거 귀에 제대로 꽂아.”
태이는 주머니에서 실리콘 몰드로 성형된 보라색 커스텀 차음 이어플러그를 꺼내 채은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공학관 실험실에서 채은의 귓본을 떠서 급히 제작했던 물건이었다.
“선배는 메인 8채널 레코더 게인 잡으세요.”
채은이 경원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타종 순간 1번 채널부터 4번 채널까지 전부 리미터 걸지 말고 마이너스 18디비에 헤드룸 남겨두세요. 피크 쳐서 데이터 잘려 나가면 내일 심의회에서 쓸모없어져요. 110데시벨의 음압을 왜곡 없이 온전히 받아내야 하니까 게인 노브에서 절대 손 떼지 마요.”
경원의 입꼬리가 묵직하게 호를 그렸다.
“명령조군.”
“시간이 없으니까요.”
경원은 군말 없이 작업대 앞의 대형 필드 레코더 화면을 켜고 입력 채널 레벨을 세밀하게 보정하기 시작했다. 기계실 한구석에서 스위치들이 딸깍거리며 준비 상태를 알리는 녹색 엘이디 불빛들이 하나둘씩 켜졌다.
덜커덩, 쿵!
갑작스러운 기계음과 함께 벽면 전체가 묵직하게 전율했다.
기계실 중앙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무쇠 톱니바퀴들이 무거운 관성을 이겨내며 천천히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추를 감아올리는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11시 50분.
자정 타종을 10분 앞두고 시계탑의 기계식 태엽 장치가 최종 타종 시퀀스에 돌입한 신호였다.
“카운트다운 시작됐다.”
경원이 헤드폰을 목에 건 채 레코더의 녹음 대기 버튼을 눌렀다. 붉은색 표시등이 점멸하며 하드디스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채은은 태이가 건넨 커스텀 차음 플러그를 양쪽 귓구멍 깊숙이 밀어 넣고, 그 위로 차음 헤드폰을 덮어썼다. 세상의 모든 잡음이 두꺼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듯 둔탁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거친 호흡 소리와 맥박만은 고막 안쪽에서 묵직한 북소리처럼 또렷하게 울렸다.
채은은 한 손에 3미터짜리 카본 붐 폴을 움켜쥐고, 허리춤에 연결된 오디오 케이블을 당겨 종루로 이어지는 수직 철제 사다리 앞에 섰다. 머리 위로는 녹슨 철문 하나가 굳게 닫혀 있었다. 저 문을 열면 20년간 캠퍼스의 밤을 지배해 온 5톤짜리 거대한 청동 종의 밑바닥이 그대로 드러날 터였다.
“사다리 올라간다.”
채은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차가운 철제 발판에 한쪽 발을 올렸다. 태이가 사다리 하단을 두 손으로 꽉 붙잡으며 밑에서 채은을 받쳤고, 경원은 무전기 채널을 확인하며 채은의 등 뒤로 수음 케이블을 길게 뽑아주었다.
삐이익, 쿵.
채은이 상단 잠금장치를 젖히자, 육중한 철제 차단벽이 서서히 위로 들리며 차가운 밤공기가 기계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열린 틈 너머로 시커멓게 입을 벌린 종루의 거대한 어둠이 드러났다. 달빛을 등진 거대한 청동 종의 둥근 밑동이 괴수의 형상처럼 세 사람의 머리통 위를 거대하게 뒤덮었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 10분.
채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종루의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