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앙!
바람의 결계가 터져 나가는 충격에 카엘은 뒤로 반 걸음 밀려났다. 엘리시아가 남긴 은빛 바람이 흩날리며 살갗을 베어 낼 듯 매섭게 휘감겼다. 바로 눈앞, 쩍 갈라진 결계석의 거대한 틈새로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집어삼켜지는 순간이 푸른 눈동자에 선명하게 박혔다.
“주군!”
카엘의 굵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주저 없이 제단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쇄도했다. 온몸의 신경이 엘리시아가 사라진 심연의 소용돌이를 향해 쏠려 있었다. 그러나 찢어진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 폭풍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은빛과 핏빛이 뒤섞인 역전 마나가 사방으로 튀며 석단을 산산조각 냈다.
카엘은 튀어 오르는 암석 파편을 어깨로 튕겨내며 결계석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바닥 가죽이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이 밀려들었지만, 그는 악물고 검을 제단 바닥에 깊숙이 쑤셔 박았다.
쩌저적!
푸른 오러가 바닥판을 파고들며 닻처럼 걸리자, 소용돌이가 온몸을 끌어당기던 무지막지한 인력이 겨우 멈춰 섰다. 틈새 안쪽은 이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마나의 소용돌이뿐이었다. 엘리시아의 모습은 그 칠흑 같은 빛무리의 깊숙한 바닥으로 삼켜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제단 틈새를 타고 전해지는 가느다란 마나의 떨림만이, 그녀가 그 위험천만한 심연 속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릴 뿐이었다.
“물러서십시오, 대공 전하! 외벽을 먼저 묶어야 합니다!”
뒤편에서 라온의 날카로운 외침이 날아들었다. 라온은 소매를 걷어붙인 채 품에서 상쇄 주문서 세 장을 한꺼번에 꺼내 들었다. 금빛 마나가 그의 손끝을 타고 번져 나가며 주문서 표면의 고대 문자들이 붉게 타올랐다.
“라온!”
“공녀전하께서는 안쪽에서 통제권을 붙들고 계십니다! 밖에서 결계석 표면이 먼저 바스러지면, 지맥 쐐기가 뒤틀려 안쪽에 계신 공녀전하까지 통째로 으스러집니다!”
라온의 말은 채찍처럼 매서웠다. 카엘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엘리시아를 쫓아 당장이라도 저 어둠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본능적인 충동이 온몸을 지배했으나, 그는 검자루를 쥔 손가락에 더욱 억센 힘을 주었다.
‘내 검이 되겠다고 맹세했지 않습니까.’
심연으로 몸을 던지기 직전,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던 그 보랏빛 눈동자가 뇌리를 스쳤다. 그녀가 바란 것은 제 목숨을 내던지는 허망한 희생이 아니었다. 주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방패가 아니라, 그녀가 열어젖힌 길을 지키는 단단한 검이어야 했다.
“손을 보태라.”
카엘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대검을 비틀었다. 칼날을 타고 솟구친 푸른 오러가 바닥의 마법진을 거칠게 찢어발기며 결계석의 갈라진 틈새를 향해 뻗어 나갔다.
“정신줄 놓지 마라, 라온! 검을 쥐고 있는 한, 공녀가 목숨 걸고 지켜낸 이 제단을 절대 무너지게 두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주문서 세 장을 쩍 갈라진 결계석 표면에 강하게 내리붙였다.
치지지직!
주문서가 달라붙자마자 결계석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파편들이 거세게 튀어 오르며 라온의 학자 로브를 찢고 뺨에 붉은 핏줄기를 그었다. 그러나 라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양손을 뻗어 마나 사슬을 엮어냈다.
“고대 원로원의 구속식 삼중 봉인! 지맥 역류를 막아라!”
라온의 주문과 함께 은빛과 금빛이 뒤엉킨 마나 사슬이 쩍 갈라진 결계석 외벽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다. 카엘 또한 오러를 한계까지 뿜어내며 결계석의 균열 사이로 뻗어 나간 사슬의 결절점을 자신의 검신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두 사람의 마나가 공명석 핵에 닿는 순간, 소용돌이 가장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던 엘리시아의 은빛 마나 잔향이 이에 호응하듯 가느다란 빛의 줄기로 솟구쳐 올랐다. 안쪽에서 홀로 지맥을 바로잡으려 사투를 벌이는 엘리시아의 힘이 사슬과 맞닿은 것이었다.
쿠구구궁!
핵 중심에 깊숙이 박혀 미친 듯이 회전하던 자폭 쐐기가 은빛 잔향과 결계 사슬에 얽매여 덜컥,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멈춰 섰다. 1차 회전이 강제로 중단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공명실 천장을 뚫고 나갈 듯 번뜩이던 핏빛 마나 폭풍이 확연히 꺾였다. 공명실 바깥 주랑 회랑 너머로 들려오던 수도 상공의 거친 붉은 번개 소리도 기세가 한풀 꺾이며 일시적으로 잦아들었다.
“통했습니다……!”
라온이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마나를 쥐어짠 탓에 그의 창백한 안색에 핏기가 가셔 있었다.
그러나 안도의 숨을 내쉴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자폭 쐐기의 회전이 멈춘 바로 그 찰나, 제단 바닥 밑에 깔려 있던 검은 술식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베르만이 제단 밑바닥에 새겨 두었던 역전 주술의 암흑 문양들이 붉은 피를 머금은 듯 흉측하게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치이익, 츠츠츠!
쐐기를 멈추기 위해 흘려 넣었던 엘리시아의 은빛 마나 잔향이, 바닥의 암흑 인장 속으로 급격히 흡수되어 들어갔다.
“이건…… 단순한 자폭 장치가 아닙니다.”
라온이 굳은 얼굴로 바닥의 궤적을 훑어내렸다.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뭐라고?”
카엘이 검을 쥔 채 라온을 쏘아보았다. 라온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제단 바닥에 새겨진 마법 회로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베르만이 심어둔 이 역전 주술은 결계를 터뜨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공녀전하의 순수한 마나를 촉매로 삼아서…… 다른 곳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디로 향하는 신호냐!”
“사령부입니다! 방금 전 단전이 끊겨 무력화되었던 벨리안 바르샤트의 잔존 마나, 그리고 그자가 열어두었던 외곽 경계탑의 암흑 군세…… 그 둘을 제단으로 강제로 엮어 당기는 원격 전이 술식입니다!”
라온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위이잉!
제단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붉은 인장이 공명실 벽면을 타고 번져 나가며, 허공을 향해 기괴한 공명 신호를 쏘아 올렸다. 갈라진 결계석 틈새를 억누르고 있던 마나 사슬이 요동치고, 닫힌 공명실의 흑철 문 너머 먼 복도 끝에서 지축을 울리는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카엘이 대검을 뽑아 들고 제단 구석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의 서슬 퍼런 푸른 눈동자가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베르만을 향해 내리꽂혔다. 흉곽이 짓눌린 채 바닥을 기던 베르만의 멱살을, 카엘의 굳은 손아귀가 단숨에 틀어쥐었다.
“주군께서 뛰어드신 심연의 상태를 말해라. 당장 저 소용돌이를 닫고 공녀전하를 끌어낼 해제 공식을 대!”
베르만의 목덜미가 강철 같은 완력에 매달려 허공으로 들렸다. 노구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핏덩이가 후두둑 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갈비뼈가 부러져 숨을 들이쉴 때마다 쇳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베르만의 입꼬리는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콜록, 쿨럭……! 헛수고다, 아르테미스 대공. 저건 닫을 수 있는 통로가 아니야. 초대 공녀의 순수한 마나를 집어삼키며 제 몸을 불리는 무저갱이지.”
“헛소리 집어치워! 술식의 중심 궤적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물었다!”
카엘의 대검 끝이 베르만의 목젖 바로 앞을 서늘하게 겨누었다. 서슬 퍼런 푸른 오러가 칼날을 타고 솟구치며 노인의 메마른 살갗을 바짝 태웠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 놓을 듯한 기세였으나, 베르만은 오히려 뼈마디가 드러난 손가락을 들어 바닥의 붉은 회로를 가리켰다.
“어리석은 것들…… 쥐어짜 낸 공녀의 피로 결계를 붙잡고 버틸수록 벨리안의 그릇에 쏟아부어지는 어둠은 더욱 거대해질 뿐이다! 네놈들이 여기서 결계의 자폭 쐐기를 늦추면 늦출수록, 놈의 살점에 깃드는 힘은 산처럼 불어난다!”
“뭐라고?”
“바르샤트 후작의 단전이 터졌다고 안심했더냐? 그건 터진 게 아니다. 그릇의 뚜껑을 부수어 외곽 경계탑의 군세를 통째로 담아내기 위한 준비였을 뿐!”
베르만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파열음 섞인 비웃음이 공명실 안을 음산하게 채웠다.
쿠구구궁!
그 순간, 천장을 떠받치던 굵직한 흑철 석재들이 굉음과 함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결계석의 지맥 진동이 한계에 도달한 탓이었다. 카엘은 베르만을 바닥에 패대기치며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머리 위로 떨어지던 거대한 암석 덩어리를 두 동강 냈다. 박살 난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며 자욱한 석분을 피워 올렸다.
라온이 흩날리는 먼지 속으로 뛰어들며 품에서 초대의 금서 마지막 장을 꺼내 들었다. 베르만의 곁에 나뒹굴던 부러진 지팡이 파편을 재빨리 발로 걷어찬 라온이 그것을 손에 쥐었다.
“카엘 전하, 베르만에게 매달릴 시간이 없습니다! 자폭 쐐기가 다시 회전하기 전에 지맥의 길을 틀어쥐어야 합니다!”
“단서가 있나?”
카엘이 먼지를 헤치고 라온의 곁으로 다가섰다. 라온의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금서의 낱장에 새겨진 고대 문자와 부러진 지팡이 끝에 맺힌 암흑 잔흔을 번갈아 훑고 있었다.
“베르만이 역전 주술을 걸 때 사용한 마나의 파장은 이 지팡이의 보석 핵에 여전히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금서 마지막 장에는 초대 공녀께서 남기신 결계 순환의 역로가 적혀 있습니다. 둘을 부딪쳐 공명시키면, 소용돌이 안쪽의 지맥을 잠시 평행선으로 묶어둘 수 있습니다!”
“공녀전하께 닿을 수 있다는 뜻인가?”
“안쪽에서 고군분투하시는 전하의 짐을 덜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결계석이 뒤틀린 마나를 게워내는 통로를 강제로 열어 소용돌이의 회전력을 분산시키는 겁니다.”
라온이 부러진 흑단목 지팡이를 제단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금서 마지막 장을 그 위에 덮으며 마나를 격렬하게 끌어올렸다.
“별빛의 근원이시여, 뒤틀린 대지의 숨결을 갈라 본래의 궤도로 되돌리소서!”
팟!
눈부신 은백색 빛줄기가 금서의 양피지에서 터져 나와 부러진 지팡이의 암흑 핵을 관통했다. 검붉은 기운과 은빛 마나가 맹렬하게 얽혀들며 제단 바닥의 균열을 타고 스며들었다.
끼기기긱!
결계석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나 폭풍이 억센 쇠사슬에 옭아매인 듯 비틀렸다. 바닥에 고여 있던 핏빛 마나가 두 갈래로 갈라지며 소용돌이의 중심축을 단단히 옥죄었다. 제단 가장자리를 따라 은빛과 흑색이 얽힌 새로운 마법진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자리를 잡았다.
쿠르릉, 쾅!
사납게 솟구치던 암흑 폭풍의 파동이 꺾이며, 결계석 중심부의 회전이 점차 안정적인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간 엘리시아가 짊어졌을 맹렬한 지맥의 반동을, 라온이 금서의 비전으로 외벽 쪽에 분산시켜 붙잡아 둔 덕분이었다.
“성공했습니다……! 심연의 역류를 억누르는 경로를 확보했습니다.”
라온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무릎을 딛고 일어섰다. 손바닥은 부러진 지팡이의 파편에 베여 피로 젖어 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제단 한가운데의 소용돌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 경로를 유지하는 한, 소용돌이가 공명실 전체를 집어삼키는 참사는 막을 수 있습니다. 공녀전하께서 안쪽의 핵을 바로잡으실 최소한의 시간도 벌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군을 끌어낼 방도를 찾아야 한다.”
카엘이 서늘한 음성으로 대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엘리시아가 사라진 심연의 틈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나 안도할 틈도 없이, 바닥에 짓눌려 있던 베르만의 목구멍에서 쉰 웃음소리가 다시금 새어 나왔다.
“크흐흐, 참으로 눈물겨운 충성이로군. 하지만 늦었다. 너희가 그 하찮은 안정화 진을 완성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문은 이미 활짝 열렸다.”
쾅! 콰아앙!
공명실로 이어지는 주랑 회랑 쪽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단순한 포격이나 마법 탄환의 충격이 아니었다. 거대한 맹수가 두꺼운 대리석 벽을 통째로 들이받아 부수는 듯한 기괴하고 둔탁한 파열음이었다.
라온의 안색이 굳어지며 품에서 감별용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수정구 표면에 새겨져 있던 탐지 마법진이 새빨간 피를 머금은 것처럼 물들더니, 순식간에 쩍 갈라졌다.
“이건…… 마법 학회의 외곽 방어선이 완전히 파열되었습니다! 사령부에 억류되어 있던 바르샤트 후작의 반응입니다!”
“단전이 파괴된 자가 어떻게 방어선을 뚫는단 말인가!”
카엘이 거칠게 반문하자, 베르만이 바닥을 긁으며 핏발 선 눈을 번뜩였다.
“말했을 텐데! 단전이 부서졌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다! 껍데기만 남은 인간의 육신에, 외곽 경계탑을 집어삼켰던 고대 암흑 군세를 남김없이 밀어 넣었지. 지금 이곳으로 오는 것은 사령관 벨리안이 아니다. 왕국의 심장을 물어뜯을 불사의 마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서 들려오던 굉음이 주랑 회랑의 마지막 방호벽마저 박살 내며 바로 앞 복도까지 들이닥쳤다.
쿠구구궁!
공명실 입구를 막아서고 있던 거대한 흑철 문이 안쪽으로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강철을 찢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문틈 사이로 끈적하고 흉측한 검은 마기가 안개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의 형상을 벗어난 거대한 살기와 피비린내가 공명실 내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카엘이 대검을 고쳐 쥐며 부서진 흑철 문 앞을 가로막아 섰다.
“라온, 결계석의 안정화 진을 유지해라. 주군께서 돌아오실 길이다. 한 뼘도 흐트러뜨려선 안 된다.”
“전하……!”
“단죄할 죄인이 제 발로 기어왔을 뿐이다.”
푸른 오러가 카엘의 칼날을 따라 서슬 퍼렇게 타올랐다. 부서진 흑철 문 너머, 짙은 어둠 속에서 붉게 번뜩이는 두 개의 안광이 제단을 향해 쇄도해 오고 있었다.
콰르릉!
우그러진 흑철 문이 경첩째 뜯겨 나가며 공명실 안쪽으로 나가떨어졌다. 파열된 철판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는 먼지 구름을 뚫고, 검붉은 마기에 짓눌린 괴물 같은 형체가 바닥을 짓밟았다.
수도 방위군 사령관의 감청색 제복은 넝마처럼 찢겨 있었다. 흉갑을 비집고 솟구쳐 오른 검은 힘줄들이 목덜미와 턱선을 타고 기어올라 얼굴 절반을 뒤덮은 모습이었다. 파괴되었던 단전 자리에서는 외곽 경계탑에서 끌어들인 암흑 군세의 탁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바닥의 대리석을 까맣게 녹여 댔다.
“크하하하! 훌륭하군, 베르만! 공녀 계집이 제 손으로 지맥을 터뜨려 준 덕에 결계의 빗장이 아주 활짝 열렸다!”
벨리안 바르샤트가 핏빛 안광을 희번덕거리며 찢어진 입가를 비틀었다. 인간의 성대를 벗어난 둔탁한 금속음이 제단 전체를 울렸다. 벨리안은 바닥에 널브러진 베르만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있는 결계석 핵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천한 피를 몽땅 들이마셨으니, 이제 저 돌덩이만 박살 내면 왕도는 끝장이다!”
벨리안이 거대한 흑철 검을 치켜들었다. 검날 주변으로 암흑 군세의 원혼들이 엉겨 붙으며 거대한 핏빛 파동을 형성했다. 제단 중앙에서 안정화 마법진을 유지하던 라온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안 됩니다! 지금 결계석 표면에 충격이 가해지면, 안정화 경로가 끊겨 공녀 전하께서 계신 심연마저 통째로 붕괴합니다!”
라온이 외쳤으나, 벨리안의 칼날은 이미 망설임 없이 결계석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굉음과 함께 핏빛 검풍이 제단을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쇄도했다.
채애앵!
그 찰나, 푸른빛 섬광이 벼락처럼 대각선으로 치솟아 암흑 검풍을 가로막았다.
카엘 드 아르테미스였다. 북부 대공의 묵직한 대검이 핏빛 칼날과 맞부딪치며 눈이 멀 듯한 불꽃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지면이 둥글게 파여 나가며 충격파가 공명실 천장을 때렸다.
“크윽……!”
카엘의 입술 틈으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암흑 군세의 무게가 대검을 타고 뼈마디를 짓눌렀다. 대공의 칼날을 감싸고 있던 푸른 오러가 비명을 지르며 잘게 부서져 나갔다.
“비켜라, 북부의 맹견 놈! 주군도 지키지 못하고 구렁텅이에 처넣은 패잔병 주제에 무엇을 막아서느냐!”
벨리안이 비열하게 짓이기듯 검을 비틀어 눌렀다. 짙은 마기가 폭발하며 기어이 카엘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갔다. 날카로운 암흑 파편이 카엘의 왼쪽 어깨를 깊게 베어 갈랐다. 가죽 갑주가 찢겨 나가며 붉은 피가 바닥으로 후둑 떨어졌다.
그러나 카엘은 단 반 뼘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왼쪽 무릎을 바닥에 박아 넣듯 버티며 대검의 칼날 각도를 비틀어 벨리안의 흑철 검을 쳐냈다.
파열음과 함께 벨리안의 몸이 반 걸음 뒤로 밀려났다. 그 반동으로 벨리안의 가슴팍에 걸려 있던 넝마 같은 제복 깃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 벌어진 틈새, 검게 부풀어 오른 피부 위에 붉은빛으로 박혀 있는 문양이 드러났다.
단전에서부터 흉골을 타고 새겨진 그 기괴한 문양을 확인한 순간, 카엘의 푸른 눈동자가 시퍼렇게 타올랐다. 학회 지하에서 보았던 살육 마도구의 핵, 그리고 사령부 비밀 통로에서 엿보았던 극비 서한에 찍혀 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인장이었다.
단순한 가문의 문장이 아니었다. 국왕의 최측근에서 옥좌의 그림자를 관장하는 왕실 시종부의 극비 통신 인장이었다.
“왕실 시종부의 인장…….”
카엘의 서늘한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사령관 직위를 남용해 결계를 연 것조차 네놈의 독단이 아니었군. 왕실 내부의 뱀이 네놈의 배후에 똬리를 틀고 있었어.”
벨리안이 목을 뒤로 꺾으며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괴수의 마기로 일그러진 얼굴 근육이 흉측하게 뒤틀렸다.
“이제야 알아챘느냐! 늙고 유약한 국왕을 폐위하고, 어둠의 군주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는 것이야말로 왕실의 진정한 뜻이다! 그 거룩한 제단에 공녀 계집의 피보다 더 어울리는 제물이 어디 있겠느냐! 통제권을 빼앗긴 결계 따위, 모조리 부수고 새 시대를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벨리안이 흑철 검을 다시금 높이 치켜들었다. 상처 입은 어깨를 타고 흐르는 카엘의 피가 대검의 손잡이를 적셨다.
통증이 뼈를 갉아먹듯 번져 왔지만, 카엘의 눈빛은 오히려 지독할 정도로 맑아졌다.
눈앞에 선명히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던 학회의 거짓을 알았을 때도, 마나가 역류해 피를 토하면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던 여인. 스스로를 지키는 방패막이가 되지 말고 적의 목을 베는 날카로운 검이 되라며, 오만한 대공을 질타하던 당당한 주군의 눈빛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카엘.’
그녀는 제단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이 아스트라엘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갈라진 심연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결코 도망치지 않고 제 운명을 손수 부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든 주군이었다.
그런 주군을 두고, 자신이 이따위 배신자의 칼날 앞에서 흔들릴 수는 없었다. 사사로운 비통함 따위로 칼날을 무디게 만들 여유는 없었다.
카엘이 피 묻은 손으로 대검 자루를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어깨의 상처를 무시한 채, 대공의 발걸음이 제단 중앙과 결계석 사이를 완벽히 가로막았다.
“물러서지 않는다.”
낮고 단단한 음성이 공명실의 메마른 대기를 갈랐다.
“공녀가 목숨을 걸고 남긴 검으로서,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어떤 칼날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다.”
검신을 따라 푸른 오러가 다시금 타올랐다. 단순한 마나의 불꽃이 아니었다. 주군의 유지를 잇겠다는 맹세가 서린 서슬 퍼런 살기였다.
“크하하! 그렇다면 그 잘난 충성심째로 결계석과 함께 갈아 마셔 주마!”
벨리안이 지면을 박차며 쇄도했다. 온몸의 검은 마기를 쥐어짠 흑철 검이 결계석의 핵을 부수기 위해 카엘의 미간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카엘의 푸른 검날이 그 궤적을 향해 망설임 없이 맞부딪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