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공녀의 마법 로맨스 · 총 10화 · AI 작가 윤슬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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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부 발코니 난간을 박차고 내리뜬 발밑으로 붉은 폭풍이 사납게 소용돌이쳤다.

공중을 가르는 서늘한 낙하의 감각도 잠시, 카엘의 푸른 오러가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부드러운 완충막을 형성했다. 세 사람은 마법 학회 본관과 중앙 공명실을 잇는 드넓은 주랑 회랑의 대리석 바닥에 거친 마찰음을 내며 착지했다. 사방을 둘러싼 대리석 기둥들은 상공에서 쏟아지는 검붉은 벼락을 맞아 거미줄 같은 균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착지와 동시에 엘리시아의 오른손 손바닥에서 끔찍한 작열감이 치솟았다.

새겨진 여덟 갈래 별 문양이 공명실 쪽을 향해 맥동할 때마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팔을 타고 어깨뼈까지 번졌다. 문양의 틈새로 배어 나온 핏방울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려 차가운 바닥 위로 붉은 자국을 남겼다. 결계의 파괴를 감지한 각인이 주인의 생명력을 무자비하게 쥐어짜 내며 결계를 수복하려 발악하는 탓이었다.

엘리시아는 입술을 짓이기며 비틀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반 각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공명실에 닿지 못한다면 결계는 무너지고 온 수도가 불바다에 잠길 터였다.

그때 회랑 전방의 아치형 회랑 천장에서 거대한 암흑 마력의 덩어리가 쐐기처럼 곤두박질쳤다. 베르만이 결계 회랑 전체에 걸어 둔 암흑 차단 결계가 침입자를 감지하고 반응한 것이었다.

카엘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곧장 자신의 칠흑 같은 망토를 넓게 펼치며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물러서십시오, 주군!”

카엘의 시선은 날아드는 흑마법의 파편이 아니라 오직 엘리시아의 피 흘리는 오른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베르만을 향한 살의보다도, 주군이 부서져 내릴까 두려워하는 지독한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대검을 비스듬히 세워 방어 태세를 취하며 엘리시아를 자신의 등 뒤, 가장 안전한 사각지대로 밀어 넣으려 했다.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멈춰 선 그의 발걸음 탓에 전진의 속도가 둔화되고 있었다. 상대를 베어 넘겨야 할 검날이 오직 방패의 역할에 얽매여 굳어버린 꼴이었다.

엘리시아는 거친 숨을 내쉬며 그대로 손을 뻗었다.

피 묻은 그녀의 손바닥이 카엘의 어깨 흉갑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차가운 강철 위로 붉은 손자국이 짓이겨졌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카엘을 거세게 잡아당겨 그를 자신과 나란히 세웠다.

“카엘 드 아르테미스.”

낮고 서늘한 엘리시아의 음성이 붉은 번개가 내리치는 회랑의 파열음을 단숨에 찢고 들어갔다.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카엘의 시선을 옭아맸다.

“나를 감싸 안으려다 그대의 칼날이 무뎌지는 순간, 우리 모두가 저 붉은 불길 속에서 재가 될 뿐입니다.”

“주군, 하지만 손에서 흐르는 피가…….”

“내 상처를 살피느라 적을 벨 칼을 늦추지 마십시오!”

엘리시아의 목소리에 서릿발 같은 엄위가 실렸다. 그녀는 피 묻은 손을 들어 올려 정면의 어둠을 똑바로 가리켰다.

“나는 그대의 등 뒤에 웅크릴 나약한 계집이 아닙니다. 이 고통은 내가 감당할 몫이고, 왕국의 숨통을 쥐고 흔드는 배신자를 베어 넘기는 것은 그대의 칼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내 방패가 되려 하지 말고, 내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숨통을 끊어 내는 검이 되십시오.”

카엘의 턱 끝이 굳게 당겨졌다.

자신이 행하던 과보호가 충성이 아니라, 주군의 존엄을 깎아먹고 진격을 지체시키는 오만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물러섬 없이 전방을 응시하는 공녀의 기백 앞에서 대공의 검끝을 짓누르던 망설임이 산산이 바스러졌다.

“……명령을 받듭니다.”

카엘이 대검을 고쳐 쥐었다.

망토를 젖히고 반 보 앞으로 나선 그의 전신에서 푸른빛 오러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주군을 감싸기 위해 웅크렸던 검격이 아니라, 앞길의 모든 장애물을 짓이기겠다는 순수한 살의가 서린 서슬 퍼런 칼날이었다.

회랑을 메우고 있던 베르만의 암흑 방어벽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칠흑의 가시들을 쏘아 보냈다.

카엘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지체 없이 대검을 대각선으로 내리쳤다.

공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간 푸른 오러의 파도가 회랑 바닥을 밭고랑처럼 갈아엎으며 쇄도했다. 암흑의 가시들은 오러의 궤적에 닿는 족족 유리조각처럼 깨져 나갔고, 회랑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먹빛 장벽은 단 한 번의 검격에 완벽히 양단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돌파구가 열렸다.

“가십시오!”

카엘이 길을 트며 낮게 외쳤다. 엘리시아는 지체 없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앞으로 달렸다. 나란히 발을 맞추는 두 사람의 보폭 사이에는 더 이상 주저함이나 불필요한 망설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뒤를 바짝 따르던 라온이 품에서 결계 제어 기록 원부를 펼쳐 들었다. 양피지 위로 푸른 마나를 주입해 수치를 읽어 내리던 라온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공녀님, 대공 전하! 잠시 제 말을 들으십시오!”

달리는 와중에도 라온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그의 손끝에서 원부의 기록이 붉은빛으로 번뜩이며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공명실 내부의 지맥 반응이 비정상적입니다. 베르만 대마법사가 술식을 자폭으로 전환했다고 했으나, 기록 원부에 찍히는 마나의 흐름은 단순한 폭발의 궤적이 아닙니다.”

“단순한 자폭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카엘이 전방의 잔해들을 발로 걷어차며 되물었다. 라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원부의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강하게 짚었다.

“마나가 밖으로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응축되고 있습니다! 공명실 내부의 술식은 마나를 소모해 자폭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거대한 무언가를 강제로 빨아들이는 거대한 소용돌이 형태로 뒤틀려 있습니다. 마치…… 무언가를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함정 같습니다!”

라온의 경고에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른손의 각인은 지금도 맹렬하게 피를 토해내며 공명실을 향해 당겨지고 있었다. 이 고통이 단순한 파괴의 여파가 아니라, 제단 밑바닥에 숨겨진 악의가 자신을 제물로 끌어당기는 덫이라는 라온의 분석은 지나치게 맞아떨어졌다.

“함정이든 소용돌이든 상관없습니다.”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주랑 회랑의 끝자락, 거대한 원형 돔으로 이어지는 공명실의 흑철 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아가리를 찢어발겨서라도 배신자의 숨통을 끊겠습니다. 멈추지 마십시오.”

세 사람의 그림자가 붉게 물든 회랑의 어둠을 가르며 공명실의 굳게 닫힌 문전을 향해 거침없이 쇄도했다.

육중한 흑철 문 앞 계단에 다다르자, 바닥의 붉은 균열에서 피어오른 핏빛 마나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엉겨 붙었다. 계단 양옆의 석조 난간이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내렸고, 허공에 맺힌 피비린내 나는 마력 덩어리가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검은 로브를 걸친 노인, 마법 학회 원로원 수장 베르만의 환영 영체였다.

공명실 안쪽에서 쏘아 올린 원격 투영 마법이었다. 반투명한 영체는 붉은 안개를 두른 채 계단 꼭대기에 우뚝 서서 계단 아래의 엘리시아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영체의 등 뒤로는 열두 겹의 검붉은 흑마법 방호진이 겹겹이 회전하며 흑철 문을 빈틈없이 틀어막고 있었다.

“어리석은 계집이 기어코 여기까지 발을 들였구나.”

공기를 짓누르며 울리는 베르만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메말라 있었다.

“초대 공녀의 각인을 쥐었다 하여 네가 진정한 왕이라도 된 줄 아느냐? 별빛 왕가의 피란 본래 이 거대한 수도 결계를 지탱하기 위한 거름이자, 재앙을 막아내는 제물에 불과했다. 너는 제단에 바쳐질 한 조각 고깃덩이로 태어났을 뿐이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배신자.”

카엘이 검자루를 틀어쥐며 한 발짝 앞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엘리시아가 손을 뻗어 카엘의 팔갑을 붙잡아 세웠다. 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베르만의 붉은 영체를 꿰뚫고 있었다.

“그 혓바닥으로 수백 년간 얼마나 많은 이들을 속여 넘겼습니까, 베르만 대마법사?”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석조 회랑 전체를 울릴 만큼 단단했다.

“각인의 대가를 숨기고, 금서를 뜯어고쳐 왕가의 후손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학회의 비전이었습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그 위대한 결계의 실체가, 고작 어린아이의 피를 짜내 연명하던 비겁한 껍데기였단 말입니까.”

영체가 비열한 조소를 흘렸다.

“비겁이라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질서였다. 한 사람의 피로 온 왕국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그보다 값싼 거래가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 너는 그 천명을 거부하고 제 분수도 모른 채 날뛰었지. 덕분에 결계는 무너지고 모든 것이 어둠의 군주들에게 바쳐질 것이다. 파멸을 부른 것은 바로 네 그 오만한 발버둥이다!”

“헛소리 집어치우십시오!”

참다못한 라온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고문서 연구실에서 챙겨온 금서의 마지막 장과 결계 제어 기록 원부를 높이 치켜들었다. 라온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학회는 평화를 지킨 것이 아니라, 공녀의 영혼을 착취해 원로원의 권력을 유지해 온 것입니다! 금서 원본에 적힌 결계의 본질은 희생이 아니라 순환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지맥의 흐름을 뒤틀고 공녀를 소모품으로 바치도록 법도를 오염시켰으면서, 감히 누구더러 파멸을 불렀다 탓하는 겁니까!”

라온이 품 안에서 산산조각 났던 벨리안의 결계 왜곡 연동 인장 파편을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파편에 새겨진 붉은 룬들이 라온의 에메랄드빛 마나와 맞물리며 파지직거리는 소음을 냈다.

“공녀님, 저 방호진의 핵은 연동 인장과 같은 궤적으로 회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상쇄진을 펼쳐 방벽의 간극을 비틀겠습니다!”

라온이 양손을 펼치며 주문을 읊조리자, 바닥의 파편에서 청록색 빛줄기들이 솟구쳐 베르만의 흑마법 방호진을 파고들었다. 열두 겹으로 회전하던 방벽의 회전축이 어긋나며 붉은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방호진의 핵이 찰나의 틈을 드러내며 겉으로 드러났다.

베르만의 영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붉은 손을 뻗어 마나 번개를 일으키려 했다.

“건방진 서고지기 놈이 감히 원로원의 술식을 능멸하려 들다니!”

“능멸당한 것은 당신의 그 뒤틀린 망상입니다.”

엘리시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손바닥의 각인에서 솟구치는 통증이 팔뚝을 타고 심장까지 찌르는 듯했으나, 그녀의 허리는 꼿꼿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차가운 살의를 담은 채 영체의 이마를 겨누었다.

“백성을 제물로 삼아 쌓아 올린 평화 따위는 군주의 통치가 아니라 도살자의 사기극에 불과합니다.”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단호한 선언이 떨어졌다.

“나는 그 핏값 위에 군림할 생각이 없다. 맹약을 부수고, 당신들이 만들어낸 그 추악한 굴레를 내 손으로 직접 끊어내겠다.”

엘리시아의 서슬 퍼런 눈짓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엘이 대지를 박차고 솟구쳤다.

더 이상의 경고도, 대화도 필요치 않았다. 카엘의 대검에 서린 짙푸른 오러가 폭풍처럼 팽창하며 회랑의 천장을 뒤흔들었다. 허공을 가르는 서늘한 파열음과 함께 벼려진 칼날이 흑마법 방호진의 노출된 핵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귀청을 찢는 폭음과 함께 열두 겹의 방벽이 일제히 산산조각 났다. 튕겨 나간 마력 파편들이 석조 벽면에 박히며 불꽃을 튀겼다.

카엘은 칼날을 멈추지 않았다. 방패막이를 잃고 노출된 베르만의 거대한 환영 영체를 향해, 대검을 비틀어 쥐며 수평으로 맹렬하게 베어 넘겼다. 서늘한 오러의 궤적이 붉은 안개로 이루어진 노인의 목을 단숨에 갈라놓았다.

“크아악! 크하하하…… 소용없다! 공명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너희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나락에 빠질 것이다!”

잘려 나간 영체가 비명을 지르며 붉은 연기로 흩어졌다. 흩어지는 잔영 속에서도 베르만의 섬뜩한 비웃음이 계단 위를 맴돌았다.

엘리시아는 흩어지는 안개를 향해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계단을 밟아 올랐다.

“나락이든 지옥이든 상관없다. 네 목을 벨 장소일 뿐이니.”

계단 꼭대기에 선 카엘이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두 손으로 대검을 쥐고 몸을 회전시켰다. 푸른 오러가 칼날 전체를 집어삼키며 눈이 멀 듯한 빛을 뿜어냈다.

“열어라!”

카엘의 포효와 함께 대검의 끝단이 공명실의 굳게 닫힌 흑철 문 정중앙에 작렬했다.

쿵! 콰르르릉!

육중한 철문이 중심부부터 우그러지며 안쪽으로 거칠게 뜯겨 나갔다. 부서진 철판과 석재 파편들이 공명실 안쪽으로 굉음을 내며 쏟아졌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눈이 시리도록 붉은 핏빛 마나의 폭풍이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마침내 마법 세계 아스트라엘의 심장이자, 배신자가 마지막 자폭 술식을 완성하려는 중앙 공명실 최심부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시아는 칼자루를 고쳐 쥐는 카엘과 원부를 펼쳐 든 라온을 돌아보지 않은 채, 부서진 문턱을 밟고 붉은 지옥도를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부서진 문턱 너머로 발을 들이자마자 살갗을 베어 낼 듯한 열풍이 얼굴을 때렸다.

원형 홀의 높은 돔 천장 아래, 본래 맑고 짙푸른 빛을 내뿜어야 할 거대한 공명석은 이미 검붉은 핏빛으로 흉측하게 물들어 있었다. 공중에 매달린 거석의 표면마다 지옥의 핏줄 같은 균열이 징그럽게 뻗어 나가고, 그 아래 제단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 양팔을 치켜든 채 서 있었다. 마법 학회 원로원 수장, 베르만이었다.

“기어코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구나, 별빛의 망령들이.”

베르만이 고개를 돌렸다. 퀭하게 파인 눈구멍 안쪽에서 탁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의 발치에 깔린 제단 바닥에는 이미 피로 짓이긴 듯한 어둠의 주술 문양들이 살아 꿈틀거리며 공명석을 향해 검은 마나를 쏘아 올리고 있었다.

“벨리안 그 멍청한 군인이 시간을 조금 더 끌어줄 줄 알았건만. 하지만 상관없다. 제단의 주맥은 이미 완전히 뒤틀렸으니!”

베르만의 메마른 손가락이 허공을 할퀴자, 제단 사방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점액질로 뭉쳐진 사역마 대여섯 마리가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짐승의 뼈와 썩은 마나로 빚어진 괴물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일행을 향해 쇄도했다.

“공녀님께서는 제단으로 가십시오!”

카엘의 서늘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한 걸음 앞서 튀어 나간 카엘의 대검이 짙푸른 궤적을 그리며 맹렬하게 휘둘러졌다.

채앵!

선두에서 달려들던 사역마의 뼈 관절이 푸른 오러의 일격에 단칼에 두 동강 났다. 흩뿌려지는 검은 피를 갑주로 쳐낸 카엘은 칼날을 반대로 꺾어 쥐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잔상을 남길 만큼 빠른 연속 베기가 이어졌고, 쇄도하던 괴수 세 마리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짓이겨졌다.

“길을 열겠습니다. 뒤는 돌아보지 마십시오!”

카엘이 포효하며 남은 사역마들의 진로를 완벽히 가로막았다. 그의 칼날 끝에서 폭발하는 푸른빛 검기가 제단으로 향하는 회랑을 깨끗하게 청소해 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라온이 품에서 결계 제어 기록 원부와 금빛 상쇄 주문서를 꺼내 들었다.

“베르만 대마법사, 당신이 왜곡한 룬의 좌표는 이미 파악했습니다. 학회의 이름으로 당신의 마나 순환을 동결합니다!”

라온이 주문서를 찢어 바닥에 내던졌다. 녹색 에메랄드빛 진열이 부챗살처럼 퍼져 나가며 베르만의 발치를 휘감았다. 바닥을 기어오르던 검붉은 주술의 흐름이 라온의 정화 술식에 정면으로 충돌하며 찌르르한 마찰음을 토해냈다.

“크윽, 어린 마법사 놈이 감히!”

베르만의 마나 경로가 일시적으로 묶이며 제단으로 쏟아지던 암흑 마법의 유입이 멈칫했다.

그 찰나의 틈을 엘리시아와 카엘이 결코 놓치지 않았다.

카엘이 잔여 사역마들을 일거에 베어 넘기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짙푸른 오러가 응축된 대검이 베르만의 정수리를 향해 번개처럼 내리꽂히며, 노인이 급조해 펼친 암흑 방벽을 단 일격에 산산이 박살 냈다.

“크아악!”

부서진 방벽의 파편 사이로 엘리시아가 쇄도했다. 그녀의 오른손에 새겨진 각인이 눈부신 은빛 섬광을 토해내며 서슬 퍼런 칼날의 형상을 이루었다. 망설임 없는 엘리시아의 손끝이 베르만의 가슴팍 명치에 그대로 작렬했다.

콰아아앙!

푸른 오러와 순수한 별빛 마나가 베르만의 전신을 뒤흔들며 폭발했다.

노인은 흉곽이 함몰되는 파열음과 함께 검붉은 피를 한 바가지 토해내며 제단 계단 아래로 날아가 처박혔다. 지팡이는 산산조각 났고, 베르만은 저항할 기력조차 잃은 채 흰자를 드러내며 완전히 바닥에 쓰러져 제압당했다.

배신자를 완전히 쓰러뜨린 엘리시아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제단 중심부로 달렸다.

손바닥 안쪽에서부터 타오르는 여덟 갈래 별 문양이 주인의 부름에 응하듯 은빛 섬광을 뿜어냈다. 수명을 갉아먹는 각인의 날카로운 통증이 손목을 타고 뼈마디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호흡 한 번 흐트러트리지 않고 붉게 폭주하는 거대한 공명석 바로 앞까지 내달렸다.

거석의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류 마나가 엘리시아의 은빛 머리칼을 거칠게 흩날렸다. 이대로 두면 수도 전역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수많은 백성이 어둠의 세력에게 도륙당한다.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엘리시아는 각인이 새겨진 오른손을 들어 올려, 피를 흘리듯 붉게 물든 공명석의 핵 중심에 망설임 없이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은빛 마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가며 붉은 오염을 맹렬하게 밀어내기 시작했다. 별빛 왕가의 순수한 마나가 주입되자, 미친 듯이 진동하던 공명석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표면을 뒤덮고 있던 검붉은 균열들이 별빛에 씻겨 나가며 본래의 맑은 빛을 되찾아가는 듯 보였다.

“잡았다……!”

라온이 희망 섞인 탄성을 터뜨렸다. 검을 거둔 카엘 역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제단 위의 엘리시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채 찰나도 이어지지 못했다.

치이이익!

베르만이 쓰러진 제단 바닥 밑바닥에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괴한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패배한 노인이 사전에 깊숙이 은폐해 두었던 고대 원로원의 역전 주술이 마침내 깨어난 것이었다.

공명석을 정화하던 은빛 마나가 멈추지 않고, 바닥에 숨겨져 있던 역전 술식 속으로 물밀듯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얗게 빛나던 엘리시아의 정화 마나는 제단 바닥을 통과하는 순간 핏빛보다 더 짙은 파괴의 암흑 에너지로 뒤바뀌어 맹렬하게 역류했다.

“공녀님, 손을 떼십시오! 은폐되어 있던 역전 주술입니다!”

라온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공명석과 제단 바닥이 하나의 거대한 흡수판이 되어 엘리시아의 손바닥을 집어삼킬 듯 끌어당기고 있었다. 억지로 손을 떼어내려 해도, 각인과 제단이 뒤엉켜 그녀의 생명력과 순수한 별빛 마나를 무자비하게 쥐어짜 내며 결계를 파괴하는 에너지로 전환하고 있었다.

정화를 위해 쏟아부은 순수한 힘이 도리어 결계의 숨통을 끊는 최악의 독으로 뒤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우르릉, 쾅!

제단 한가운데의 거대한 공명석이 역전된 에너지를 버티지 못하고 중심부에서부터 쩍 갈라졌다. 그 틈새로 은빛과 핏빛이 흉측하게 뒤엉킨 마나 폭풍이 솟구쳐 오르며 공명실의 천장을 꿰뚫었다.

동시에 수도 상공을 지탱하던 거대한 결계 벽 전체가 뒤틀리며, 전례 없는 굉음과 함께 수도 전역의 하늘이 붉은 번개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결계는 붕괴를 넘어 완전한 폭주 상태로 치달았고, 쩍 갈라진 결계석 중심부에는 모든 마나와 공간을 집어삼킬 듯한 심연의 소용돌이가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주군!”

사태를 파악한 카엘이 사색이 되어 제단 위로 몸을 던졌다. 폭주하는 마나 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녀를 강제로 떼어내 끌어안으려 했다.

“오지 마십시오, 카엘!”

엘리시아의 날카로운 일갈이 귓전을 때렸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오른손이 결계석 핵에 단단히 얽힌 채,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는 결의로 타올랐다.

“지금 밖에서 손을 떼면 결계는 즉시 박살 나고 수도는 잿더미가 됩니다! 제단 중심부로 파고들어 안쪽에서부터 왜곡된 술식을 바로잡아야만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안 됩니다! 저 심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육신조차 부서져 사라질 뿐입니다!”

카엘이 절규하며 손을 뻗었으나, 엘리시아는 이미 망설임 없이 결단을 내린 뒤였다. 그녀는 카엘의 개입을 만류하듯 왼손으로 푸른 바람의 결계를 밀어내며 그의 접근을 완벽히 차단했다.

“내 검이 되겠다고 맹세했지 않습니까. 나를 믿으십시오.”

엘리시아는 결연한 시선으로 카엘을 마주한 뒤, 갈라진 결계석 심연에서 포효하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로 망설임 없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