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공녀의 마법 로맨스 · 총 12화 · AI 작가 윤슬

제11화

뷰어에서 이어 읽기

푸른 불꽃과 칠흑빛 마기가 맞부딪친 지점에서 고막을 찢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두 자루의 검이 짓눌리며 뿜어낸 충격파에 바닥의 대리석 타일이 부챗살 모양으로 갈라져 튀었다. 흑철 검을 쥔 벨리안의 비대한 팔뚝에서 굵은 검은 핏줄들이 꿈틀거리며 기괴하게 팽창했다. 살점을 뚫고 솟아난 암흑 군세의 탁한 기운이 칼날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며, 카엘의 찢겨 나간 어깨 상처를 날카롭게 후벼 팠다.

“크윽…….”

상처를 파고드는 냉기 없는 불길에 생살이 타들어 가는 악취가 풍겼다.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압박이 팔을 타고 전해졌지만, 카엘의 두 발은 제단 바닥에 쐐기처럼 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냉혹함만이 서려 있었다.

“어리석은 놈! 네깟 놈의 오러 따위로 심연의 군세를 받아낸 육신을 당해낼 성싶으냐!”

벨리안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입술을 찢으며 포효했다. 부러진 단전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흑철 검의 칼날을 두 겹, 세 겹으로 덧씌웠다. 무게는 두 배로 무거워졌고, 카엘의 푸른 검신이 비명을 지르듯 휘어졌다.

“대공, 물러서십시오! 놈의 칼날에 닿은 마기가 상처를 썩혀 들어가고 있습니다!”

결계석 뒤편에서 안정화 진을 쥐어짜고 있던 라온이 소리쳤다. 초대의 금서 마지막 장에서 끌어올린 황금빛 마나가 라온의 손끝에서 뻗어 나와 카엘의 등 뒤로 반구형 방호벽을 세웠다. 공명실을 뒤흔드는 충격파를 간신히 걸러낸 라온의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있었다.

그러나 카엘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물러서면 제단이 깨진다.”

대공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검신 사이로 튀는 불꽃을 뚫고 울렸다.

“이 자리는 주군께서 명하신 곳이다. 단 한 뼘도 내어주지 않는다.”

그 서슬 퍼런 선언과 함께 카엘의 검신에서 타오르던 푸른 마나가 성질을 바꾸었다. 거칠게 넘실대던 불꽃 형태의 오러가 한순간에 얼어붙듯 응축되며 투명한 빙결의 칼날로 벼려졌다. 북부 아르테미스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비전, 극한의 냉기를 머금은 빙결 오러였다.

지독한 한기가 사방으로 번져 나가며 벨리안의 흑철 검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마기를 순식간에 하얗게 얼려 붙였다.

“뭐, 뭣이……?”

벨리안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쳤다. 마기가 굳어버리며 흑철 검의 압력이 둔탁해진 바로 그 순간, 카엘의 상체가 앞으로 짓쳐 들어갔다.

카엘은 어깨를 파고들던 통증 따위는 아예 없는 감각인 양 내던진 채, 대검의 칼날 각도를 비틀며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쩌정!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서리가 맺힌 흑철 검의 칼날 중앙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졌다. 벨리안이 반사적으로 마기를 더 끌어올리려 몸을 비틀었으나, 카엘의 움직임이 한발 더 빨랐다.

카엘의 대검이 허공을 둥글게 가르며 벨리안의 오른쪽 어깨 관절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서걱!

살점이 베이는 소리가 아니었다. 꽁꽁 얼어붙은 거대한 바위가 쪼개져 나가는 둔탁한 파쇄음이었다.

“크아아아악!”

공명실 천장을 찌르는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암흑 군세의 기운으로 흉측하게 부풀어 올랐던 벨리안의 오른팔이 어깨 관절째 깨끗하게 잘려 나가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 검은 피가 뿜어져 나오기도 전에, 카엘의 극한의 한기가 상처를 하얗게 동결시켰다. 손에 쥐고 있던 거대한 흑철 검 또한 주인을 잃고 바닥에 떨어지며 대리석을 깨부수었다.

벨리안은 비틀거리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한쪽 팔을 잃은 육중한 몸이 휘청거리며 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하, 하하…… 북부의 맹견 놈이 기어코 발악을 하는구나.”

벨리안은 잘려 나간 어깨를 남은 왼손으로 감싸 쥐지도 않은 채, 피거품을 물며 조소했다. 눈앞에 검을 겨눈 카엘을 향해,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번진 것은 패배자의 절망이 아니었다. 비열하고 섬뜩한 승자의 미소였다.

“하지만 끝났다, 카엘 드 아르테미스. 네놈이 여기서 내 팔 한 짝을 자르고 제단을 지킨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이냐?”

벨리안이 남은 왼손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거칠게 끄집어내 바닥에 내던진 것은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한 장의 양피지였다.

봉인 표면에는 왕실 시종부의 극비 통신 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거친 대리석 바닥을 뒹굴며 펼쳐진 양피지 위로 붉은 먹으로 휘갈겨 쓴 글귀들이 드러났다.

‘결계석 자폭 술식 가동 즉시, 수도 방위군 제1, 제3 연대는 왕궁 본전으로 진입하여 국왕을 폐위하고 옥좌를 확보하라.’

밀령서의 내용을 확인한 라온의 숨결이 거칠게 멎었다.

“이건…… 방위군 내부의 군사 쿠데타 지령서……!”

“크하하하! 이제야 판을 읽었느냐!”

벨리안이 뒤틀린 목을 꺾으며 공명실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네놈들의 충성은 이미 늦었다, 대공! 지금 이 순간 늙은 국왕의 목에는 시종부의 올가미가 씌워지고 있다! 베르만이 결계석을 흔들어 네놈들의 발을 이 지하에 묶어둔 순간부터, 수도 방위군 본대는 이미 무주공산이 된 본전을 장악하도록 안배되어 있었단 말이다!”

핏빛으로 물든 제복 자락을 펄럭이며 벨리안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결계가 온전하든 부서지든 상관없다! 본전의 숨통을 끊어버리면 이 나라의 새 주인은 어둠의 군주들과 손을 잡은 시종부다! 공녀 계집이 제 목숨을 던져 결계를 기워 붙인들, 돌아갈 왕궁 자체가 잿더미가 될 텐데 무엇을 지켰단 말이냐!”

폭로된 진실은 잔혹했다. 결계 파괴는 왕도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끼이자 신호탄에 불과했고, 진짜 독니는 이미 왕궁의 심장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카엘의 시선이 바닥에 흩뿌려진 밀령서로 향했다.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대검의 손잡이를 적시며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대공의 푸른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으며, 검 끝을 벨리안의 미간을 향해 똑바로 겨누었다.

“주군께서는 이 왕도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사지로 뛰어드셨다.”

카엘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섞여 있지 않았다.

“네놈들이 본전을 짓밟든 옥좌를 불태우든, 그분의 뜻이 닿아 있는 한 이 나라는 무너지지 않는다. 왕도를 유린하려는 반역의 무리는 내가 모조리 베어 넘길 뿐이다.”

그 서늘한 살기 어린 일갈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제단 뒤편, 바닥이 갈라진 결계석의 심연 속에서 메마른 침묵을 찢고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붉게 오염되어 있던 공명실의 공기가 일순간 숨을 멈추더니, 깊은 구덩이 밑바닥에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은빛 마나의 파동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은빛 마나의 폭풍이 뿜어져 나오는 심연의 입구에서, 라온 엘릭스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열풍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제단 턱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는 대리석 바닥이 불에 달군 쇠판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단 밑바닥을 핏빛으로 옥죄고 있던 원로원의 마나 역전 술식이 공명석의 거대한 파편들을 쥐어짜며 자폭 쐐기를 제단 깊숙이 밀어 넣고 있었다.

“크윽……!”

라온의 목구멍에서 밭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단과 연결된 결계 안정화 진을 쥐고 있는 손끝을 타고 베르만의 악의적인 흡혈 주술이 무섭게 역류했다. 마나홀이 뒤틀리며 명치 부근이 불덩이를 집어삼킨 듯 타들어 갔다.

베르만이 새겨둔 자폭 쐐기는 지맥의 숨통을 막아서고, 그 반발력으로 수도 전역의 방어선을 일거에 터뜨리려는 독니였다. 쐐기가 한 바퀴 더 회전하면 공명석은 영원히 산산조각 나고, 그 안으로 뛰어든 엘리시아의 흔적조차 지맥의 불길 속으로 삼켜질 터였다.

“물러서지 않는다.”

라온은 떨리는 손을 뻗어 품 안에서 초대의 금서 마지막 장을 꺼내 들었다.

베르만의 부러진 지팡이 핵을 제단 중앙의 홈에 거칠게 박아 넣자, 튕겨 나온 마력 파편이 라온의 뺨을 스치며 붉은 핏줄기를 그었다. 살갗이 찢어지는 통증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라온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제단 바닥에 얽힌 마나의 왜곡 경로를 무섭게 훑어 내렸다.

흡혈 주술은 지맥의 마나를 삼키며 점점 더 비대해지고 있었다. 마법 학회가 수백 년 동안 숨겨온 잔혹한 기만이었다. 결계는 공녀의 생명을 땔감 삼아 타오르는 화로였고, 베르만은 그 순수한 불씨를 제단의 자폭 핵과 맞물려 놓았던 것이다.

‘어떻게 끊어내야 하지? 억지로 힘을 부딪쳤다간 지맥이 먼저 폭발해 버린다.’

마나홀을 쥐어짜듯 주문을 영창하던 라온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삼중 봉인으로 둘러친 방벽조차 핏빛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쩌적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거세게 솟구치던 은빛 기둥 너머, 심연의 밑바닥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박동이 라온의 귓전을 때렸다.

그것은 절망이나 파멸의 파동이 아니었다. 타인의 희생 위에 군림하려던 거짓된 규율을 비웃듯, 굳건하고 맑게 타오르는 불꽃의 기운이었다.

라온의 뇌리에 고문서 연구실 테라스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단호하게 검을 겨누던 엘리시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라온, 내 운명을 가두는 껍질 뒤에 숨지 마세요. 나는 누군가의 제물이 되기 위해 이곳에 선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손바닥의 여덟 갈래 별 문양을 억누르지 않았다. 깎여 나가는 수명을 한탄하는 대신, 그 힘의 방향을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틀어쥐었다.

‘학회의 거짓된 금서는 공녀를 소모품으로 규정했어. 하지만 전하께서 쓰신 별빛은…….’

라온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공명실에 들어서기 전, 중앙 제단에서 엘리시아가 폭주를 잠재울 때 펼쳐 보였던 은빛 궤적이 머릿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선명한 선으로 이어졌다.

그녀가 결계석 핵에 밀어 넣은 마나는 단순히 결계를 땜질하기 위한 생명력의 소모가 아니었다.

왜곡된 술식을 근본부터 부정하고, 이물질처럼 끼어든 저주를 단숨에 잿더미로 태워 없애는 배척의 힘. 그것이야말로 초대 공녀가 남겨둔 진짜 비전이었다. 희생으로 지탱하는 결계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로원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공녀의 권능을 왜곡하고 조작했던 사슬에 불과했다.

“공녀 전하께서 남기신 길은 희생이 아니었어.”

라온이 쥐어짜듯 말을 내뱉으며 양손으로 금서의 양피지를 움켜쥐었다.

“왜곡된 마나를 불태우는 정화의 불꽃이었지!”

라온은 자신의 마나홀을 닫아걸려던 방어 술식을 단숨에 해제했다.

역류해 들어오던 핏빛 마기가 온몸의 혈관을 찢을 듯 날뛰었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시아가 심연 속으로 뛰어들며 바닥에 흩뿌려 두었던 잔류 각인의 마나 조각들을 자신의 순수한 마력과 정면으로 맞물렸다.

파지직-!

라온의 손바닥에서 핏빛 번개와 푸르스름한 학회의 마력이 격렬하게 마찰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입술 틈으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턱 끝을 적셨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라온은 시선을 제단 정중앙에 박힌 자폭 쐐기의 핵에서 떼지 않았다.

“초대의 맹약에 묶인 거짓을 파기한다!”

라온이 부러진 지팡이 핵을 향해 전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마력의 줄기가 엘리시아의 은빛 궤적을 덧그리며 자폭 쐐기의 회전축으로 파고들었다. 더 이상 결계를 지키기 위해 물러서거나 버티는 술식이 아니었다. 제단을 좀먹고 있던 베르만의 흡혈 주술을 연료 삼아 집어삼키는 정화의 일격이었다.

콰아아아앙-!

귀를 찢을 듯한 파열음과 함께 자폭 쐐기의 중심부가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베르만이 새겨두었던 핏빛 주술 문양들이 은빛 불꽃에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듯 뒤틀리며 증발했다. 지맥을 억누르고 있던 검은 족쇄가 부서져 나가자, 지하 깊은 곳에서 억눌려 있던 맑은 마나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쩌저적!

갈라졌던 결계석의 거대한 틈새가 역류를 멈췄다.

심연 속에서 차오른 은빛 파동이 깨진 바위 표면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흉측하게 벌어졌던 균열들을 순식간에 메워 나갔다. 검붉은 암흑에 오염되었던 공명석 표면이 본래의 영롱한 푸른빛과 은빛을 되찾으며 눈부신 광휘를 토해냈다.

라온은 무릎을 꿇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에 새겨진 마력의 화상이 쓰라렸지만, 제단을 집어삼키던 파멸의 진동은 완벽히 가라앉아 있었다.

공명석은 다시금 수도의 하늘을 지탱하는 본래의 심장으로 돌아왔다. 제단 전체를 뒤덮었던 핏빛 어둠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흩날리고, 그 자리에는 오직 주군이 남겨놓은 고결한 정화의 온기만이 가득 차올랐다.

라온이 피투성이가 된 고개를 들어 결계석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나의 역전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왕궁 본전을 향해 다가오는 반역의 불길을 완전히 꺼뜨리는 일뿐이었다.

푸른 광휘가 제단 바닥을 뒤덮자마자 한쪽 구석에서 짓이겨진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른팔이 잘려 나간 채 검은 피를 쏟아내던 벨리안이 바닥을 긁으며 비틀비틀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찢겨진 흉갑 사이로 드러난 단전에서는 암흑 마기가 제멋대로 요동치며 살갗을 태우고 있었다. 결계석이 정화되면서 외곽 경계탑과의 마나 연결이 단절된 탓이었다. 육신을 지탱하던 어둠의 군세가 흩어지자 후작의 얼굴은 급속도로 말라붙어 잿빛으로 변해 갔다.

“결계를…… 기어이 봉합했단 말이냐.”

벨리안이 성한 왼손으로 핏덩이를 토해내며 카엘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광기에 젖어 흐리멍덩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소용없다. 결계석 하나 살렸다고 해서 너희가 이긴 줄 아는가! 본전에서는 이미 시종부의 칼날이 유약한 국왕의 목을 땄을 것이다!”

벨리안이 품속 깊숙이 왼손을 찔러 넣었다. 그가 끄집어낸 것은 흑철 표면에 붉은 균열이 거미줄처럼 새겨진 계란 크기의 구체였다. 학회에서 극형을 선고받은 파괴 술사들이 쓰던 농축 자폭 마도구였다.

“이 공명실째로 묻혀라, 북부의 사냥개 놈!”

구체 표면의 마력 회로가 맹렬하게 붉은빛을 뿜어내며 팽창하기 시작했다. 제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라온이 숨을 들이켜며 외쳤다.

“대공 전하! 저건 마나를 강제로 압축해 폭발시키는 자폭 핵입니다!”

카엘의 시선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찢어진 견갑 너머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의 손에 쥐인 대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카엘은 대답 대신 앞을 가로막고 있던 대리석 파편을 박차며 쇄도했다.

채앵!

한 줄기 서슬 퍼런 빙결의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벨리안의 엄지손가락이 마도구의 기폭 뇌관을 내리누르기 직전, 카엘의 칼끝이 구체의 중심부를 정확히 꿰뚫었다. 파지직하는 비명과 함께 마도구 안에서 폭주하려던 붉은 불꽃이 시퍼런 냉기에 짓눌리며 얼어붙었다.

이어진 일격은 추호의 자비도 없었다.

대검의 검신이 마도구를 통째로 으스러뜨리며 전진했다. 뼈가 부서지는 둔탁한 감촉과 함께 차가운 칼날이 벨리안의 흉골을 뚫고 등 뒤의 석벽까지 틀어박혔다.

“커헉……!”

벨리안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흉갑을 꿰뚫은 검날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카엘의 건틀릿을 적셨다. 후작은 핏발 선 눈으로 카엘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가락은 허공을 긁다가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주군께서 네놈에게 공개 처형을 선고하셨다.”

카엘이 벨리안의 귓가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박아 넣었다.

“그러나 주군이 지키신 이 제단을 더럽히는 자에게는 법통의 판결조차 과분하다. 이곳에서 죽어라, 반역자.”

카엘이 검자루를 비틀어 뽑아냈다.

벨리안의 거구는 한 줄기 숨도 더 잇지 못한 채 바닥으로 털썩 꺾여 쓰러졌다. 그의 가슴팍에 박혀 있던 시종부의 통신 인장이 마력을 잃고 잘게 부스러져 재로 날렸다.

공명실을 울리던 괴수의 포효가 멎고, 오직 푸르게 정화된 결계석만이 맑은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라온이 비틀거리며 카엘의 곁으로 다가왔다. 금서의 마지막 장을 손에 쥔 라온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결계석의 역류가 완전히 멎었습니다. 공녀님의 은빛 마나가 지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균열을 모두 봉합했습니다. 이제 수도의 방어막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군은.”

카엘이 결계석 중앙, 아물어 버린 바위 표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푸른 눈동자 속에 억눌러 둔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심연 속에 남겨진 마나의 궤적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공녀님께서는 분명…… 결계의 가장 깊은 핵에서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결계가 유지되는 한, 결코 스러지지 않으실 겁니다.”

라온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그 순간, 부서진 흑철 문 너머 왕궁 상공에서 둔탁한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콰앙! 콰아앙!

공명실 천장의 환기창을 통해 붉은 화염의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피처럼 붉은 세 발의 신호탄이 왕궁 본전의 하늘을 찢어발기며 타오르고 있었다.

카엘의 시선이 그 붉은 궤적을 좇아 굳어졌다.

“시종부의 반란군이 본전을 포위했다는 신호다. 놈들이 국왕을 폐위하고 옥좌를 장악하려는 군사 행동을 개시했군.”

라온이 입술을 짓씹으며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사령부의 반역자들은 처단했지만, 궁내부는 이미 적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방위군 잔당과 결탁한 근위대가 옥좌를 손에 넣는다면 결계의 제어권마저 강탈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카엘은 벨리안의 피로 젖은 대검을 번쩍 들어 올려 검면에 묻은 암흑의 잔재를 털어냈다. 차가운 쇳소리가 공명실의 적막을 갈랐다.

“주군께서는 나더러 앞을 가로막는 방패가 아닌, 길을 여는 검이 되라 명하셨다.”

카엘이 부서진 흑철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베인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의 보폭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이 땅을 한 치도 반역자들의 손에 넘기지 않겠다. 본전으로 진격한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의 상쇄 주문서들을 갈무리했다.

두 사람은 피 묻은 대검과 학회의 금서를 앞세운 채, 붉은 불길이 번져 가는 왕궁 본전을 향해 흑철 문을 박차고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