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공녀의 마법 로맨스 · 총 13화 · AI 작가 윤슬

제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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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안개가 내려앉은 북쪽 대열주 회랑은 이미 붉은 화염의 그을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공명실을 박차고 나온 카엘의 군화 아래서 깨진 대리석 조각들이 날카롭게 바스러졌다. 어깨의 베인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검은 제복을 짙게 물들였지만, 카엘은 칼자루를 고쳐 쥐었을 뿐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뒤따르던 라온이 핏자국이 튄 로브 자락을 움켜쥐며 숨을 몰아쉬었다. 지팡이 끝에 매단 초대의 금서 마지막 장이 파르르 떨리며 미약한 마나를 뿜어내고 있었다.

“대공 전하, 전방입니다!”

라온의 외침과 동시에 회랑 모퉁이 너머에서 거친 쇠붙이 소리가 쏟아졌다.

시종부의 지휘를 받는 배신한 근위대와 방위군 잔당들이 회랑 전체를 겹겹이 틀어막고 있었다.

반역에 가담한 병사들은 사각 방패를 빈틈없이 맞물려 1선에 세우고, 그 뒤편으로 긴 투창과 마도 쇠뇌를 거치한 채 살기등등한 진형을 갖추었다. 붉은 천을 투구에 두른 반란군 장교가 카엘을 발견하자마자 칼을 뽑아 들며 포효했다.

“북부 대공이다! 놈이 공명실에서 기어 나왔다! 쏴라, 벌집으로 만들어라!”

쇠뇌의 시위가 일제히 튕겨 나갔다. 푸르스름한 독기가 서린 쇠화살 수십 발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뒤이어 긴 투창들이 회랑의 천장을 스치며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물러서지 마라.”

카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검신에서 서슬 퍼런 빙결의 한기가 폭풍처럼 번져 나갔다.

채채챙!

허공을 가른 대검이 차가운 궤적을 그리며 쇄도하는 쇠화살과 투창들을 쳐냈다. 얼어붙은 쇳조각들이 바닥으로 요란하게 떨어져 내렸으나, 2선에 늘어선 쇠뇌수들이 즉각 장전을 마치고 다음 화살을 겨누었다. 좁은 회랑에서 삼중으로 짜인 방진은 카엘의 돌파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라온!”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지팡이를 바닥에 거세게 내리찍었다. 상아색 로브가 거친 마력 파동에 펄럭였다. 라온의 손끝에서 쏘아 올려진 다섯 갈래의 바람 송곳이 회랑 벽면을 박차고 날아가 적들의 발밑을 갈라놓았다.

“돌파 주문 전개! 진형의 중심을 무너뜨립니다!”

쿠구구궁!

회랑 바닥의 대리석이 솟구치며 방패벽의 왼쪽 축이 흔들렸다. 빈틈이 생긴 그 찰나를 카엘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카엘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적들의 방진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빙결 오러가 호를 그리며 방패와 갑옷을 통째로 베어 넘겼다.

“크아악!”

“괴, 괴물 놈이……!”

비명과 함께 쇠붙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회랑을 가득 메웠다. 카엘의 칼날은 단 한 번의 군더더기 없이 적들의 무기와 숨통을 쳐냈다. 라온이 연달아 날린 마력 탄환들이 쇠뇌수들의 무기를 박살 내며 후방의 사격을 차단했다.

피비린내 나는 격돌은 길지 않았다. 반란군 수비대는 북부 대공의 서슬 퍼런 검세를 견디지 못하고 무기를 내던진 채 본전 방향으로 허둥지둥 패주했다.

바닥에는 부서진 방패와 얼어붙은 핏자국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카엘은 거칠게 숨을 고르며 칼끝에 맺힌 핏방울을 털어냈다. 베인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려 갑주 틈새를 적셨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지체할 시간 없다. 본전 대문으로.”

카엘이 성큼 걸음을 옮기자, 라온이 빠르게 보폭을 맞추며 낮게 물었다.

“대공 전하. 본전으로 향하는 진정한 이유를 병사들은 여전히 왕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 여길 겁니다.”

카엘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허울 좋은 명분 따위는 진작에 버렸다.”

카엘의 목소리는 칼날보다 차가웠다.

“우리가 구하려는 건 옥좌에 웅크린 허수아비가 아니다. 공녀님을 지옥 같은 결계 핵에서 끄집어낼 유일한 열쇠를 뺏으러 가는 것이다.”

라온이 품속의 금서 조각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회의 비밀 열람실에서 확인했던 참혹한 기록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왕국을 지탱한다는 명목 아래, 왕실은 대대로 별빛의 혈통을 결계석의 살아있는 거름으로 갈아 넣었다. 초대 공녀의 희생 이후에도 왕가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고자 결계 핵에 연결된 비전 제어구를 옥좌 밑에 숨겨 두었다. 그것은 결계를 통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핵에 들어간 공녀의 마나와 생명력을 남김없이 빨아올려 영구적인 동력원으로 묶어두는 족쇄였다.

국왕은 지금 시종부의 반란을 핑계 삼아 본전에 틀어박힌 채, 결계 핵으로 뛰어든 엘리시아를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희생양으로 소모시킬 셈이었다.

“옥좌 밑의 비전 제어구를 강탈하지 못하면, 공녀님은 결계가 닫히는 순간 그 안에서 마나홀이 메말라 돌아가실 겁니다.”

라온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국왕이 제어구의 잠금장치를 완전히 걸어 잠그기 전에 쐐기를 뽑아내야 합니다. 그것만이 결계 핵을 강제로 열고 주군을 구해낼 유일한 방도입니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옥좌를 부술 것이다.”

카엘이 대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왕실의 비전이든 국법이든 상관없다. 공녀님의 피를 갉아먹고 유지되는 왕좌라면 내 손으로 쪼개어 버리겠다.”

주군을 향한 절대적인 맹세가 서린 카엘의 선언에 라온의 눈빛 또한 결연해졌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열주 회랑의 끝을 향해 달렸다.

회랑이 끝나고 마침내 왕궁 본전의 거대한 외곽 대문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본전 앞마당에 발을 디딘 순간, 카엘과 라온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위이잉.

귀를 찌르는 마력의 마찰음과 함께 본전 대문 전체에 핏빛 장벽이 솟아올랐다. 단순한 방어 마법이 아니었다. 붉은 빛줄기 속에서 왕가의 문장이 거대한 사슬 형태로 얽혀 들며 문틀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혈통 결계입니다.”

라온이 지팡이를 들어 올려 마나 파동을 감지하고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국왕의 직속 피로 직접 봉인한 이중 혈통 결계입니다. 내부에서 완전히 빗장을 걸어 잠갔습니다. 물리적인 타격으로는 문에 흠집조차 낼 수 없습니다.”

굳게 닫힌 붉은 대문 너머 본전 안쪽에서는 옥좌를 지키려는 배신자들과 왕실 시종부의 음모가 차갑게 도사리고 있었다. 진입로는 완벽히 차단되어 있었다.

붉은 사슬이 문틀을 옥죄며 맥동하는 광경을 올려다보던 카엘이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대검의 날카로운 날등 위로 서릿발이 엉겨 붙었다.

“라온, 파쇄할 방법은.”

“정공법으로는 일주일이 걸려도 흠집 하나 못 냅니다. 왕가의 직계 혈통만이 결계의 매듭을 풀 수 있으니까요.”

라온이 부서진 지팡이 끝을 들어 올렸다. 숨을 몰아쉬는 입술 새로 새하얀 김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저 붉은 사슬 아래쪽에 베르만이 파놓은 지맥 유도로가 보입니다. 놈이 도주하기 전, 결계의 마나를 거꾸로 빨아들여 외부 침입자를 태워 죽이려고 함정을 엮어 두었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문 양옆의 화단 석축 위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연속으로 울렸다.

찰칵, 쐐애액.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시종부 직속 암살대원들이 쇠뇌 방아쇠를 당겼다. 푸르스름한 독기가 서린 흑철 화살 수십 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평범한 쇠뇌가 아니었다. 탄두에 농축된 마도 화약이 박힌 군용 마도 석궁이었다.

카엘이 망설임 없이 앞으로 짓쳐 나갔다.

“내 등 뒤에 붙어라.”

퍼엉.

빙결 오러가 부채꼴 모양으로 폭발하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쏟아지던 화살들이 얼음 장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폭발한 마도 화약의 파편이 카엘의 어깨 갑주를 긁고 지나가며 붉은 선을 그었지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카엘은 그대로 도약해 석축 위로 뛰어올랐다.

서늘한 검풍이 호를 그리며 어둠 속을 갈랐다.

석궁을 재장전하려던 암살자의 목덜미가 얼어붙으며 잘려 나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암살대원들을 딛고 카엘이 연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은폐 진지에서 튀어나오려던 세 명의 목숨이 단숨에 끊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라온이 핏빛 결계의 문턱 바로 앞까지 달렸다.

바닥 타일 틈새에서 붉은빛이 뱀처럼 기어 나와 라온의 부츠를 옭아맸다. 베르만이 깔아둔 지맥 흡수 함정이었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검붉은 마기가 다리 근육을 굳히고 피를 말려 올렸다.

라온이 이를 악물며 품 안에서 피 묻은 양피지 한 장과 금속 조각을 꺼냈다.

초대의 금서 마지막 장, 그리고 벨리안 바르샤트의 품에서 뜯어낸 시종부의 연동 인장 파편이었다.

“피로 묶은 맹약이라면, 같은 배신자의 피와 금서의 정화 술식으로 뒤틀어 태운다.”

라온은 손바닥을 지팡이 끝의 날카로운 파편에 문질렀다. 왈칵 배어 나온 선혈이 금서의 양피지를 적셨다. 그 위에 벨리안의 인장 파편을 강제로 짓이기자, 금서의 은빛 문자와 바르샤트 가문의 암흑 마기가 맹렬하게 충돌하며 지직거리는 불꽃을 뿜어냈다.

“라온, 시간이 없다.”

카엘이 마지막 암살자의 흉부를 꿰뚫어 바닥에 메치며 소리쳤다. 계단 아래쪽 회랑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시 웅성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원 병력이 몰려오는 소리였다.

“반동을 버텨야 합니다. 물러서십시오.”

라온이 짓이긴 양피지와 인장 파편을 문틀 중앙의 거대한 붉은 사슬 핵에 처박았다.

쿠구구구궁.

금서에 적힌 초대의 정화 술식이 사슬의 결을 거꾸로 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왕가의 피로 새겨진 결계가 배신자의 인장에 반응해 뒤틀리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정화의 빛과 지맥의 독기가 라온의 양손을 거쳐 마나홀로 단숨에 역류했다.

“크아악.”

라온의 입술에서 핏덩이가 쏟아졌다.

체내에서 마나를 순환시키던 마나홀이 억지스러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삐걱거리며 멈춰 섰다. 전신의 경락이 얼어붙듯 굳어지며 마력 순환이 완벽히 차단되었다. 무릎이 꺾이며 라온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대가로, 본전을 틀어막고 있던 거대한 핏빛 사슬에 굵직한 균열이 번져 나갔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붉은 장벽이 산산조각 났다. 결계가 무너지면서 생긴 충격파가 본전의 거대한 청동 문을 안쪽으로 우지끈 밀어젖혔다. 문틈이 벌어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마법식의 찌꺼기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카엘이 쓰러진 라온의 겨드랑이를 받쳐 일으켜 세웠다.

“움직일 수 있겠나.”

“마나홀이…… 잠시 멎었습니다. 마법은…… 당장 쓰지 못합니다.”

라온이 피를 뱉어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팡이를 짚은 팔이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하게 빛났다.

“하지만…… 문은 열렸습니다.”

카엘이 부서진 문턱으로 다가섰다. 바닥에는 결계가 깨지면서 튕겨 나간 왕실 시종부의 인장이 박힌 서류 뭉치와 양피지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붉은 밀랍 봉인이 반쯤 녹아내린 채 바닥에 뒹굴고 있는 공문서 하나가 카엘의 부츠 끝에 채였다.

카엘은 대검을 비껴 든 채 서류 파편을 집어 올렸다.

종이 위에는 국왕의 친필 서명과 함께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아래에 적힌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카엘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공녀가 결계 핵에 육신을 투신하는 즉시, 옥좌 밑의 비전 제어구를 영구 봉인할 것. 그녀의 마나를 왕실 지맥의 영구 동력원으로 삼아 왕국의 결계를 재건하며, 이 조치는 별빛의 영원한 존속을 위한 국왕의 절대 결단이다.

시종부의 반란 모의를 보고받고도 즉각 진압하지 않은 채 방치한 이유가 그 안에 적혀 있었다.

국왕은 시종부의 준동을 막을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엘리시아가 왕도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결계석에 몸을 던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안으로 뛰어들자마자 시종부의 손을 빌려 문을 걸어 잠그고, 공녀의 마나와 숨통을 결계석의 살아있는 거름으로 못 박아 두는 칙령에 이미 날인까지 마친 상태였다.

“국왕은 처음부터 공녀님을 인간으로 대할 생각이 없었어.”

카엘의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쥐고 있던 종이 파편이 악력에 짓눌려 하얗게 바스러졌다.

“그저 왕도를 지탱할 영원한 기름으로 태워 버릴 셈이었던 거지.”

부축을 받으며 서류의 문구를 확인한 라온 역시 참담한 안색으로 주먹을 쥐었다. 마나홀이 마비되어 떨리는 손가락 틈으로 피가 번졌다.

“학회의 원로원도, 시종부도, 그리고 옥좌에 앉은 국왕까지…… 전부 한패였습니다. 왕국의 평화라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서 주군을 산 제물로 삼아 자신들의 안락을 유지해 왔던 겁니다.”

라온이 부러진 지팡이를 바닥에 거칠게 내리찍었다.

“이런 자들이 다스리는 왕국 따위, 지켜야 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

카엘이 서류 가루를 허공에 털어냈다.

더 이상 주저할 이유는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국법도, 충성도, 왕가의 권위도 이 순간 완전히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들에게 주군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자신들을 향해 방패가 아닌 검이 되라 명했던, 갈라진 결계석 심연 속에 홀로 갇혀 있는 은빛 머리칼의 군주.

카엘이 피 묻은 대검을 높이 치켜들며 부서진 청동 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차가운 냉기와 짙은 어둠이 깔린 옥좌 대전 최심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높게 솟은 황금빛 옥좌 제단 아래, 핏빛 마나를 뿜어내는 비전 제어구의 거대한 윤곽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카엘은 망설임 없이 대전 안으로 거친 첫 발을 내디뎠다.

대전 안쪽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붉은색 마법진이 침입자의 기척을 감지하자마자 사납게 요동쳤다. 황금 옥좌 발치에 도열해 있던 시종부 소속의 근위병 대여섯 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창을 겨누었다. 이미 온몸이 피와 서리로 덮인 채 서슬 퍼런 칼날을 든 북부 대공의 살기에 그들의 손끝이 볼품없이 떨렸다.

“멈춰라, 아르테미스 대공! 국왕 전하의 성역이다! 감히 검을 뽑아 들고 옥좌를 범하려는 것이냐!”

근위대장의 찢어지는 외침에 카엘은 대답 대신 대검을 비스듬히 눕혀 쥐었다. 그가 바닥을 박차자마자 뿜어져 나온 서슬 퍼런 빙결 오러가 회랑 바닥의 대리석을 얼어붙게 만들며 맹렬하게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카엘의 검신이 벼락처럼 허공을 갈랐다. 가로막아서던 철제 방패 두 개가 얼음장처럼 깨져 나가며 날카로운 파편을 흩뿌렸다.

“비켜라.”

얼음장 같은 일갈과 함께 검 자루가 근위대장의 턱을 후려쳤고, 뒤이어 쳐낸 칼등이 남은 병사들의 무릎과 어깨를 연달아 부러뜨렸다. 단 세 번의 호흡만에 옥좌를 지키던 반란의 잔당들이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칼날에 깃든 냉기가 상처를 얼려 피조차 제대로 뿜어내지 못하게 틀어막았다.

카엘은 쓰러진 자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옥좌 제단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단상 꼭대기, 화려하게 조각된 황금 의자 밑바닥에는 검은 쇠사슬로 칭칭 감긴 비전 제어구가 박혀 있었다. 본래 푸른빛을 띠어야 할 고대의 마도핵은 시종부와 국왕이 새겨둔 탐욕스러운 핏빛 마나 회로에 휘감겨 기괴한 박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섬뜩한 붉은 줄기들은 옥좌 바닥을 뚫고 들어가 왕궁 전체의 지맥과 굵은 핏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전하, 잠시만요! 함부로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뒤따라 대전으로 들어선 라온이 마나홀의 통증을 억누르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라온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옥좌 밑에 박힌 제어구의 마나 흐름을 훑어내리며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 제어구는 단순한 왕실의 열쇠가 아닙니다. 공명실의 결계석과 실시간으로 지맥을 공유하며 맞물려 있어요. 지금 강제로 뜯어냈다간 억눌려 있던 반동 마나가 왕도 지하 지맥을 단숨에 터뜨리고, 제어구 자체도 산산조각이 납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카엘이 붉은 핏빛을 뿜어내는 제어구의 자루를 응시했다.

“이 더러운 쇳덩이가 살아 있는 한, 주군은 결계 핵 속에서 왕국의 영원한 소모품으로 말라죽게 된다. 그 꼴을 두고 보느니 왕궁 바닥이 통째로 뒤집히는 편이 낫다.”

“제 말은 무작정 힘으로 부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저 제어구에 새겨진 본래 술식을 보십시오. 국왕이 덧씌운 왜곡 주술 아래에, 초대 공녀의 각인과 동일한 문양이 숨겨져 있습니다.”

라온이 부러진 지팡이 끝을 제어구 테두리에 갖다 대었다. 맑은 금빛 마력이 붉은 회로를 조심스럽게 밀어내자, 금속 표면에 묻혀 있던 여덟 갈래 별 문양이 찰나의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확인한 카엘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건틀릿을 낀 오른손을 뻗어 비전 제어구의 손잡이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찌르르하는 강렬한 반발력과 함께 제어구에 응축되어 있던 핏빛 마나가 카엘의 손목을 타고 기어올랐다. 살갗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가 파고들었지만, 카엘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은 채 오러를 끌어올렸다. 차가운 서리가 손등을 뒤덮으며 제어구의 표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얼어붙는 제어구의 깊은 핵 속에서, 붉은빛을 밀어내며 영롱한 보랏빛 마나 잔향이 카엘의 빙결 오러를 타고 스며들었다.

가슴속을 파고드는 것은 낯설지 않은 온기였다. 결계석의 갈라진 틈새로 뛰어들기 직전,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며 똑바로 눈을 맞추었던 은빛 머리칼의 군주. 그 처절하고도 당당했던 목소리가 얼어붙은 옥좌 대전의 공기 너머로 생생하게되살아났다.

내가 결계 핵 속으로 사라지더라도 결코 망설이지 말고 그 쐐기를 내게 던지라던 전언. 이 왕국의 뒤틀린 목줄을 직접 끊어버리겠다며 서슬 퍼런 눈빛으로 남겼던 단호한 명령이었다.

제어구는 단순한 개폐 장치가 아니었다. 왕가의 피와 마나를 지맥에 영구 결속시키는 거대한 쐐기이자 족쇄였다. 국왕과 원로원은 이것을 이용해 대대로 별빛의 혈통을 옥죄며 제물로 삼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지맥의 사슬을 영원히 끊어낼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쐐기 자체를 결계 핵의 중심부로 내던져, 안쪽에 도사린 왜곡된 연결 고리를 통째로 파쇄하는 것.

카엘의 푸른 눈동자에 맹렬한 불꽃이 일었다.

“라온.”

“예, 전하.”

“이것은 단순한 잠금장치가 아니다. 왕가의 마나를 결계석에 영구히 묶어두기 위해 박아 넣은 쐐기다.”

카엘이 제어구 손잡이를 틀어쥐며 오러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황금빛 옥좌 바닥에 새겨진 붉은 회로들이 비명을 지르듯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주군께서 결계 핵으로 뛰어들기 직전 내게 남기셨던 의지가 이제야 명확해졌다. 이 쐐기를 안쪽으로 투하해야만 결계석을 옥죄는 왕실 지맥의 족쇄를 완전히 박살 낼 수 있다.”

라온이 부러진 지팡이를 짚은 채 몸을 굳혔다. 그의 시선이 제어구와 공명실 방향으로 뻗어나간 지맥의 궤적을 빠르게 쫓았다.

“그렇다면…… 주군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아니셨던 겁니다. 왕국이 쳐둔 영원한 제물의 덫을 내부에서부터 부수기 위해 스스로 심연으로 들어가신 것이었군요.”

“그렇다. 우리 주군은 누군가의 제물이 될 나약한 분이 아니다.”

카엘이 이를 악물며 팔근육을 부풀렸다.

쩌저적!

옥좌 바닥을 짓누르고 있던 검은 쇠사슬들이 카엘의 빙결 오러에 얼어붙으며 하얗게 부스러졌다. 제어구를 억누르던 반동 마나가 대전 바닥을 뒤흔들며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으나, 카엘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맥이 뒤틀리며 옥좌 대전의 천장 대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지만 그의 손아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쿠구구궁!

마침내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옥좌의 심장부에 깊게 박혀 있던 비전 제어구가 뿌리째 뽑혀 나왔다.

묵직한 흑철과 영롱한 보랏빛 핵이 어우러진 한 자루의 거대한 말뚝 형태였다. 표면을 뒤덮고 있던 국왕의 추악한 핏빛 주술은 카엘의 극한의 오러에 남김없이 씻겨 나가고, 오직 초대 공녀의 여덟 갈래 별 문양만이 선명한 은빛 광채를 뿜어냈다.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전하, 이 제어구를 핵으로 투하하려면 공명석의 파동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궤적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조금만 어긋나도 지맥 전체가 붕괴합니다!”

라온이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금서의 마지막 장을 꺼내 들며 외쳤다.

“내가 빗맞힐 일은 없다.”

카엘이 뽑아낸 쐐기를 한 손으로 굳세게 고쳐 쥐었다.

그의 시선이 파괴된 대전 천장 너머, 붉은 번개가 잦아들고 서서히 은빛으로 물들어가는 중앙 공명실의 상공을 향했다.

왕국을 지탱한다는 명목으로 어린 공녀를 심연에 처박아 둔 추악한 왕좌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지켜야 할 것은 썩어빠진 옥좌가 아니라, 홀로 어둠 속에서 운명을 베어내고 있는 유일한 주군뿐이었다.

카엘은 피 묻은 망토를 거칠게 휘날리며 대검을 허리에 찼다. 손에 쥔 비전 제어구에 서슬 퍼런 빙결 오러를 휘감은 채, 그는 망설임 없이 바닥을 박차고 결계 핵의 심연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