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공녀의 마법 로맨스 · 총 14화 · AI 작가 윤슬

제13화 · 옥좌 아래 숨겨진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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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천장 너머로 몸을 던진 카엘의 귓가에 찢어지는 바람 소리가 내리꽂혔다. 허공을 가르는 순간 손에 쥔 비전 제어구에서 날카로운 진동이 손목을 타고 뼈마디까지 울렸다. 본전 옥좌 아래서 강제로 뽑혀 나온 말뚝은 여전히 핏빛 마나를 토해내며 카엘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놓칠 성싶으냐.”

카엘이 이를 악물고 손잡이를 짓이겼다. 서슬 퍼런 빙결 오러가 장갑 틈새로 뿜어져 나와 제어구 표면의 붉은 열기를 억누르며 하얗게 얼려 붙였다.

그의 시선 아래로 펼쳐진 중앙 공명실 지하는 거대한 입을 벌린 지옥의 아가리와 같았다. 갈라진 결계석 밑바닥에서 치솟아 오른 붉은 역류 마나가 거센 소용돌이를 그리며 허공을 뒤흔들었다. 그 살기등등한 기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동안, 본전 회랑 난간에 몸을 기댄 라온의 목소리가 바람을 뚫고 희미하게 닿았다.

“대공 전하! 지맥 궤적을 벗어나면 제어구의 축이 뒤틀립니다! 남서쪽 세 번째 균열로 낙하각을 맞추십시오!”

라온은 마나홀이 마비된 채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손가락 끝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품에서 꺼낸 초대의 금서 마지막 장을 허공으로 펼쳐 들었다. 종이 표면에 스며든 핏방울이 공명석의 파편과 반응하며 가느다란 푸른빛 유도선을 심연 바닥으로 곧게 쏘아 올렸다.

카엘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답 대신 허리에 찬 대검을 단숨에 뽑아 들었을 뿐이었다.

공명실 심연의 입구에 도달하자마자, 붉은 번개를 머금은 마나 폭풍이 칼날처럼 날아와 그의 어깨 갑주를 때렸다. 쨍강, 하는 파열음과 함께 쇠붙이가 부서져 나가고 검은 제복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살갗이 통째로 뜯겨 나갔을 반동이었다. 그러나 카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떨어지는 속도를 높였다.

“비켜라.”

대검을 양손으로 고쳐 쥔 카엘이 푸른 검기를 일직선으로 내리베었다.

콰아아앙!

낙하를 가로막던 붉은 소용돌이가 빙결 오러에 정면으로 쪼개지며 얼어붙은 파편으로 흩날렸다. 폭풍의 중심을 뚫고 수직으로 내리꽂힌 카엘의 군화가 마침내 심연 바닥의 단단한 제단 대리석을 강타했다.

쿵!

바닥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일어난 돌먼지 너머로,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차디찬 한기가 폐부를 찔렀다. 카엘은 거칠게 숨을 고르며 자세를 낮췄다. 주변은 온통 깨진 결계석 조각과 검게 타버린 회로뿐이었다.

그리고 그 파멸의 중심에,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은빛 잔향이 가냘프게 일렁이고 있었다.

엘리시아가 갈라진 틈새로 몸을 던지며 남겨둔 마지막 별빛 마나였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바닥에는 초대 공녀의 여덟 갈래 별 문양이 바위 표면에 깊게 새겨진 채, 심연 깊은 곳에서 기어오르는 탁한 암흑을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카엘의 시선이 그 문양에 닿자 차갑게 굳어 있던 턱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들고 있던 비전 제어구를 바닥에 묵직하게 내려놓으며 몸을 굳혔다.

“엘리시아, 약속대로 그 더러운 족쇄를 뽑아 가지고 돌아왔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제단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가느다란 마나의 파동만이 그의 발목을 차갑게 스칠 뿐이었다.

카엘은 한쪽 무릎을 꿇고 은빛 별 문양 옆에 내려놓은 제어구를 세밀하게 살폈다. 옥좌 밑에서 뽑아낼 때만 해도 단순한 결계 봉인 장치라 여겼던 말뚝이었다. 그러나 제단에 남은 엘리시아의 잔류 마나와 제어구가 맞닿는 순간, 제어구의 흑철 껍질 안쪽에 숨겨져 있던 본래의 마나 회로가 선명한 핏빛으로 드러났다.

회로는 결계를 수복하거나 지탱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단 바닥에 묶인 공녀의 영혼과 생명력을 강제로 쥐어짜내, 특정한 혈통의 통로로 일방적으로 밀어 넣는 잔혹한 흡수 관로였다.

카엘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회로의 종착점은 명백했다. 왕궁 본전 옥좌 대전의 황금 옥좌, 바로 국왕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안전장치라고 속여 놓고…….”

카엘이 제어구의 핵을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결국 공녀의 숨통을 빨아먹으며 제 명줄을 늘려온 기생충의 주술이었군.”

이 비전 제어구는 결계를 지키는 열쇠가 아니었다. 공녀를 영구히 심연에 가두어 거름으로 소모시키고, 그 대가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을 왕실 직계에게 바치도록 고안된 추악한 착취 말뚝이었다. 국왕이 시종부의 반란을 방치하며 벨리안과 결탁했던 이유가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었다.

그때, 제어구에 주입되었던 카엘의 빙결 오러와 바닥에 흐르던 왜곡된 왕실 지맥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지직!

붉은 섬광과 푸른 냉기가 거칠게 맞물리며 사방으로 튀었다. 지맥의 반발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심연 입구를 지탱하고 있던 고대의 바위 방호벽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거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궁!

머리 위쪽 통로가 순식간에 수십 톤의 암석으로 뒤덮였다. 지상으로 이어지던 유일한 탈출로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었다.

퇴로는 사라졌다.

사방은 무너져 내린 암벽에 갇혔고, 바닥에서는 제어구의 파열음과 함께 검붉은 지맥의 족쇄가 검은 뱀처럼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카엘은 등 뒤에서 쏟아지는 돌무더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대검을 고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비전 제어구의 말뚝 끝을 제단 중심핵에 겨누었다.

주군이 스스로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끊어내려 했던 사슬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검을 바친 신하로서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카엘은 바닥의 은빛 별 문양을 향해 차분하게 검끝을 내렸다.

카엘은 제어구를 쥔 손에 서슬 퍼런 빙결 오러를 감아쥐었다.

제단 바닥에서 치솟은 검붉은 사슬들이 뱀처럼 대검의 도신을 타고 기어올랐다. 금속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살갗을 파고드는 지독한 열기가 장갑을 검게 태웠다. 왕실이 대대로 새겨 넣은 저주와 원념이었다. 피를 바치지 않은 자는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게 막아서는 금기 술식이 그의 전신을 으스러뜨릴 듯 옥죄었다.

카엘은 턱을 굳게 다물며 대검의 무게를 온몸으로 실었다.

“비켜라.”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푸른 오러가 폭발하듯 뻗어 나갔다. 검은 사슬 몇 가닥이 얼어붙어 튕겨 나갔으나, 바닥에 거미줄처럼 박혀 있던 거대한 족쇄의 본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맥을 타고 역류해 들어온 검은 기운이 카엘의 혈도를 틀어쥐며 마나의 흐름을 거꾸로 뒤집으려 들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비릿한 피 맛이 치밀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반동 속에서도 그는 손끝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바로 곁, 제단 중심부의 별 문양에서 가느다란 은빛 마나가 파르르 떨렸다. 엘리시아가 결계석을 억누르며 심연으로 가라앉기 직전, 온몸을 던져 새겨두었던 마지막 흔적이었다. 백성을 구하겠다며 망설임 없이 뛰어들던 그 눈빛, 자신을 가두는 새장이 되지 말라며 주군으로서 내렸던 서슬 퍼런 명령이 귓가에 쟁쟁하게 맴돌았다.

그녀는 제물이 되기 위해 심연에 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왕가라는 기생충들이 덧씌워 놓은 이 추악한 족쇄를,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거짓된 굴레를 안쪽에서부터 깨부수기 위해 뛰어든 것이었다.

카엘은 피가 흐르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녀의 피를 거름 삼아 유지해 온 가짜 평화 따위, 오늘 내 손으로 남김없이 부숴버리겠다.”

카엘이 제어구의 말뚝 끝을 은빛 별 문양의 정중앙에 정확히 맞물렸다.

치이익!

엘리시아의 잔류 마나와 카엘의 빙결 오러가 하나로 뒤엉키며 제어구 안쪽의 핏빛 회로를 강타했다. 제어구가 격렬하게 진동하며 은백색의 빛을 뿜어냈다. 왕가의 피만을 받아들이도록 뒤틀려 있던 착취의 회로가 공녀의 순수한 별빛 마나에 닿자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제단 밑바닥에 박혀 있던 검은 사슬들이 비명을 지르듯 뒤틀렸다. 허공에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역대 국왕들이 남겨놓은 잔혹한 의념들이 카엘의 귓전을 찢을 듯 울부짖었다.

물러나라, 불경한 자여. 왕가의 영광을 지탱하는 제단이다. 별빛의 제물 없이는 이 땅의 지맥이 성립하지 않는다.

“영광?”

카엘은 차갑게 반문하며 비전 제어구의 자루를 대검 자루와 함께 틀어쥐었다.

“어린 공녀의 영혼을 쥐어짜 만든 누더기 옥좌가 너희의 영광이었더냐.”

카엘은 온몸의 마나를 한 점으로 끌어모았다. 가슴 안쪽의 마나홀이 깨져나갈 듯 삐걱거렸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제어구를 바닥 깊숙이 내리찍으며 빙결 오러를 지맥 전체에 쏟아부었다.

쩡, 쩌적!

제단 바닥의 거대한 암석이 십자로 갈라졌다. 비전 제어구가 박힌 핵을 중심으로 서리가 폭포수처럼 번져 나가며 검붉은 사슬들을 모조리 얼려 붙였다. 사슬에 깃든 왕가의 원념들이 푸른 냉기에 짓눌려 비틀거리자, 엘리시아의 보랏빛 마나가 그 틈을 파고들어 족쇄의 연결부를 사정없이 끊어냈다.

콰아아앙!

귀청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수백 년간 지맥을 옭아매고 있던 거대한 검은 사슬들이 일제히 유리알처럼 산산조각 났다.

공녀의 생명력을 빨아올려 왕궁 옥좌로 보내던 영구적인 흡수 통로가 완벽히 끊어진 것이었다. 제단에 짓눌려 있던 공기의 무게가 순식간에 흩어지며 은빛 파편들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카엘은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손바닥은 불에 덴 듯 검게 그을려 있었고 전신의 근육이 마나 역류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군을 옭아매던 가장 추악한 굴레를 끊어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안도는 찰나에 불과했다.

사슬이 깨져나간 제단 바닥의 중심부에서 기괴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쿠구구궁.

단순한 지맥의 흔들림이 아니었다. 사슬이 뜯겨 나간 균열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벨리안이 다루던 어둠의 마도구나 베르만이 부리던 사역마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훨씬 더 깊고 태고의 악의에 가까운 기운이었다.

카엘이 반사적으로 대검을 들어 올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바닥에 부서진 제어구의 파편을 자세히 살피던 그의 시선이 싸늘하게 굳었다.

왕실이 공녀를 옭아매기 위해 박아 넣었던 검은 지맥 사슬. 그것은 단순히 공녀의 생명력을 착취해 왕실의 수명을 늘리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사슬이 얽혀 있던 바닥판 자체가 아스트라엘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이 제단 밑바닥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의 거대한 암흑 심연을 억누르는 덮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왕실은 공녀를 제물로 삼아 국왕의 목숨을 연장하는 동시에, 그녀의 고결한 마나를 거름으로 써서 이 고대의 괴물을 제단 아래에 영구히 눌러두었던 것이었다. 공녀를 희생시키지 않고는 감당할 수조차 없는 재앙을 바닥에 숨겨둔 채, 건국의 위업이라 떠들어대던 추악한 진실이 드러난 셈이었다.

치이익, 콰아아!

갈라진 석판 틈새로 검은 안개가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솟구쳐 올랐다. 안개가 닿는 바위마다 부식하듯 검게 녹아내렸고, 심연 전체의 공기가 얼어붙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카엘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자세를 낮췄다. 퇴로는 막혔고, 제단 아래에서는 잠들어 있던 고대의 어둠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때,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는 균열 뒤편의 허공에서 낯익은 붉은빛이 번뜩였다.

지맥의 균열을 타고 피어오른 어둠의 마나 사이로, 누군가 미리 새겨둔 듯한 정교한 공간 전이 마법진이 붉은 번개를 튀기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폭주가 아니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자의 명백한 개입이었다.

붉은 번개가 허공을 가르자마자 카엘은 검집을 쥔 손가락 마디를 으스러지도록 굳혔다.

“라온!”

외침과 동시에 흑철 회랑 끝자락에서 거친 발소리가 울렸다. 마나홀이 마비되어 창백해진 안색의 라온이 비틀거리며 부서진 난간을 짚고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 전하, 물러서십시오! 단순한 지맥 폭주가 아닙니다. 이 공간 진동은…… 전송 좌표가 제단 한복판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라온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찢겨 나간 공간의 틈바구니에서 시커먼 혈안의 형체들이 쏟아져 내렸다. 하나같이 잿빛 암살 로브를 걸치고 손에는 결계 차단용 단검을 쥔 자들이었다. 원로원 최정예 결계 암살대 열두 명이 붉은 마법진을 둘러싸며 일제히 산개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이미 흉곽이 부서져 숨이 끊어진 줄 알았던 노인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베르만……!”

카엘의 칼끝이 붉은 번개의 중심을 겨누었다.

베르만의 몰골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짓눌렸던 가슴팍 한가운데에는 맥동하는 검붉은 마도 핵이 박혀 있어, 부러진 뼈와 찢긴 혈관을 억지로 이어 붙이고 있었다. 마도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겨운 암흑 마나가 노쇠한 육신을 좀비처럼 움직였다. 숱 적은 백발 아래 깊게 패인 주름 속 회색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어리석은 대공이여, 그 족쇄를 부순 순간 네놈이 무엇을 세상 밖으로 풀어놓았는지 알기나 하는가!”

베르만의 쇳소리 섞인 갈가마귀 같은 웃음이 동굴 벽면을 뒤흔들었다.

카엘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대검의 무게중심을 낮추었다. 손바닥의 그을린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검자루를 적셨지만, 푸른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죽은 척 기어 나가더니 결국 이 더러운 시궁창으로 기어들어 왔군. 벨리안이 네놈의 손에 놀아나다 목숨을 버렸거늘, 아직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다.”

“벨리안? 크하하! 그 무식한 칼잡이 놈 따위는 제 몫을 다하고 죽었을 뿐이다. 왕궁 본전으로 시선을 돌려 네놈들을 그곳으로 유인하고, 옥좌 밑바닥의 비전 제어구를 기어이 뽑아내도록 만든 훌륭한 장기말이었지!”

베르만이 손에 쥔 검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콰앙 소리와 함께 암살대원들이 일제히 결계 차단 단검을 바닥에 박아 넣으며 흑철 회랑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퇴로를 핏빛 결계벽으로 차단했다.

라온이 부러진 지팡이를 짚은 채 벽에 등을 기대며 소리쳤다.

“네놈은 애초에 결계석을 지킬 생각 따위 없었어! 공명실에서 패퇴한 척 위장해 자폭 쐐기를 기폭시킨 것도, 우리가 비전 제어구를 옥좌에서 뽑아내 족쇄를 부수도록 유도한 술책이었군!”

“이제야 깨달았느냐, 수석 마법사?”

베르만이 턱을 치켜들며 부서진 제단 틈새를 가리켰다. 검붉은 마도 핵이 그의 흉곽에서 끔찍한 박동음을 울려댔다.

“왕실 놈들이 수백 년간 감춰온 비밀이지. 공녀의 목숨을 갉아먹던 사슬은 단순히 왕실 혈통의 수명을 늘리는 족쇄가 아니었다. 아스트라엘 이전부터 이 땅의 근원에 봉인되어 있던 태고의 암흑을 억누르는 뚜껑이었지. 왕실은 감당 못 할 재앙을 공녀라는 제물로 덮어두었을 뿐이다.”

베르만의 옅은 회색 눈동자가 균열에서 솟구치는 검은 안개를 집어삼킬 듯 응시했다.

“그 덮개를 정면에서 부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녀의 피와 공명한 비전 제어구뿐. 네놈들이 그 족쇄를 박살 내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 심연 아래 잠든 순수한 고대의 힘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없었을 터!”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베르만의 지팡이 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단 바닥에 박아 넣은 비전 제어구 주변으로 태고의 어둠이 형체를 이루며 솟구쳐 올랐다.

카엘은 이빨을 악물었다. 사슬을 부수어 공녀를 구원했다고 여긴 순간, 적들은 그 구원의 행위 자체를 이용해 가장 거대한 봉인을 풀어헤친 것이었다.

“네놈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베르만. 그 힘에 먼저 먹혀 살점이 녹아내릴 뿐이다.”

“감당? 크하하하! 이미 내 심장은 원로원 비전 마도 핵으로 대체되었다. 나는 이 힘을 흡수해 나약한 국왕도, 가증스러운 별빛 왕가도 뛰어넘는 새로운 군주로 군림할 것이다!”

베르만의 외침과 함께 암살대 열두 명이 일제히 검은 결계진을 전개하며 카엘과 라온을 향해 좁혀왔다. 제단 아래에서는 풀려난 고대의 악의가 파도처럼 일렁이며 공간 전체를 부식시키고 있었고, 등 뒤의 퇴로는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라온이 마나홀의 마비로 떨리는 손을 뻗어 품에서 마지막 주문서를 더듬었다.

“대공 전하, 제게 남은 마나는 없지만…… 놈들이 펼치는 차단 결계의 중심축은 보입니다. 삼 초만 벌어주신다면 저 결계벽의 연동 고리를 물리적으로 깨뜨릴 수 있습니다!”

카엘은 대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빙결 오러를 날카롭게 벼렸다. 전신의 혈도가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삼 초면 차고 넘친다.”

카엘이 지면을 박차고 쇄도했다. 푸른 오러가 핏빛 결계벽을 향해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순간, 베르만의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고대의 암흑이 카엘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