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공녀의 마법 로맨스 · 총 9화 · AI 작가 윤슬

제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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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손끝을 떠난 날카로운 마력의 줄기는 허공에 떠오른 검붉은 기운을 사납게 꿰뚫으며 벨리안의 오른쪽 어깨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메케한 연기와 함께 뼈가 바스러지는 둔탁한 파열음이 집무실 안을 울렸다.

“크아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벨리안의 손아귀에서 칠흑빛 호각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어둠의 군세를 부르려던 검은 섬광이 길을 잃고 천장 파쇄창의 유리 조각들만 사납게 두들겼다. 공중에 뜬 뼈 마도구를 향해 엘리시아가 한 번 더 손목을 꺾었다. 잔물결처럼 일어난 은빛 파동이 호각의 몸통통통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룬 문자가 새겨진 짐승의 뼈는 찰나의 버팀도 없이 허연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그 틈을 놓칠 카엘이 아니었다.

제단을 가로막고 솟아올랐던 육중한 강철 암벽 위로 짙푸른 오러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얼어붙을 듯 시퍼런 검기가 대검의 칼날을 따라 길게 뻗어나가며 허공을 짓눌렀다.

쾅!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두 뼘 두께의 강철 방호벽이 중심부부터 우그러졌다. 카엘은 망설임 없이 검자루를 비틀어 힘을 내리눌렀다. 방호벽을 지탱하던 경첩과 마법 쐐기가 튕겨 나가며 거대한 철판이 앞쪽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방으로 튀는 쇳조각과 화강암 파편 사이를 뚫고, 검은 제복을 펄럭이는 카엘의 인영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더러운 반역자 놈.”

낮게 깔린 냉혹한 음성이 벨리안의 귓전을 때렸다.

어깨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던 벨리안이 황급히 왼손으로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려 했으나, 카엘의 군화가 먼저 그의 손목을 짓밟았다.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제 단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릿발 같은 푸른 오러를 두른 대검의 칼끝이 벨리안의 목젖 바로 앞에서 멎었다. 살갗을 살짝 벤 칼날 틈새로 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그대로 목이 날아갈 서슬 퍼런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뒤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라온이 숨을 몰아쉬며 품에서 꺼낸 마지막 네 번째 주문서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아스트라엘의 대지여, 뒤틀린 지맥을 닫고 본래의 숨결로 돌아가라!”

라온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온 선명한 에메랄드빛 마나가 바닥의 균열을 따라 거미줄처럼 번져 나갔다. 검붉은빛을 뿜어내며 엘리시아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던 마나 역전 술식이 비명을 지르듯 푸르스름한 연기를 토해냈다. 지맥을 강제로 비틀어 놓았던 마법진의 핵이 라온의 억제 주문에 짓눌려 하나둘 꺼져 들어갔다.

마침내 바닥을 울리던 불길한 진동이 멎고 집무실을 짓누르던 끔찍한 압박감이 완전히 걷혔다.

“하아…… 하아…….”

라온이 거친 숨을 내쉬며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냈다. 입술이 파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는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곧장 엘리시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전하, 술식의 지맥을 완전히 끊어냈습니다. 이제 마나가 강제로 역류하지 않을 것입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엘리시아는 손바닥의 각인을 천천히 오므렸다. 뼈마디를 태우는 것 같던 살인적인 통증이 라온의 조치 덕에 한풀 꺾여 있었다. 여덟 갈래 별 문양은 여전히 희미한 은빛을 내뿜고 있었으나, 더는 피를 토할 만큼 거칠게 날뛰지 않았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가에 맺힌 핏자국을 무심하게 닦아냈다. 하얀 뺨에 붉은 핏자국이 길게 번졌지만, 보랏빛 눈동자만큼은 사령관 집무실의 흩어진 잔해를 꿰뚫어 볼 만큼 서슬 퍼렇게 빛났다.

“괜찮습니다, 라온. 잘해 주었어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한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제단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부서진 강철 파편과 마법진의 그을음을 밟는 그녀의 발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카엘은 벨리안의 목에 검을 겨눈 채 고개만을 비스듬히 돌려 엘리시아를 응시했다. 차가운 푸른 눈동자 속에 주군을 향한 깊은 안도와 억눌린 살기가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전하, 굳이 다가오실 필요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명을 내리시면 즉시 숨통을 끊어 놓겠습니다.”

카엘의 칼날에 오러가 번뜩이며 벨리안의 살을 파고들었다. 조금이라도 벨리안이 허튼짓을 한다면 목을 베어 넘길 기세였다.

엘리시아는 카엘의 옆에 나란히 섰다. 무릎이 꺾인 채 바닥에 짓눌려 있는 벨리안 바르샤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때 수도 방위를 총괄하며 왕국의 기둥을 자처하던 후작의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른쪽 어깨는 각인의 마나에 꿰뚫려 덜렁거렸고, 고급스러운 사령관 제복은 검붉은 피와 재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카엘.”

엘리시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낮지만 위엄을 품은 음성이 부서진 방 안을 무겁게 채웠다.

“하지만 이자는 국법의 심판대 위에 서야 합니다. 수도 방위군 전체의 수장이 어찌하여 왕국을 팔아넘겼는지, 원로원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백성들 앞에서 낱낱이 밝혀내야 하니까요.”

엘리시아의 시선이 벨리안의 일그러진 얼굴에 꽂혔다. 고통으로 이를 갈던 벨리안이 피 묻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증오 섞인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건방진 계집……! 고작 남의 땅에서 굴러먹다 온 주제에, 왕가의 피를 이었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그 추악한 손으로 별빛의 영토에 어둠을 불러들일 권리는 없습니다.”

엘리시아가 벨리안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한마디 한마디에 어린 냉혹한 무게가 벨리안의 숨통을 죄었다.

“당신은 사령관으로서 져야 할 책무를 저버렸고, 지켜야 할 백성을 제물로 바치려 했습니다. 그 대가는 가문 전체의 몰락과 영원한 오명뿐일 겁니다.”

그 순간, 벨리안의 터진 입가에서 기괴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는 피를 쿨럭거리며 토해내면서도 꺾이지 않은 흉포한 눈빛으로 엘리시아와 카엘을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부서진 어깨의 고통 속에서도 놈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광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벨리안의 품 안에서 잘게 부서진 또 다른 마도구의 쇳조각들이 바닥으로 짤랑거리며 굴러떨어졌다.

“크크, 어리석은 것들…….”

벨리안이 짓이겨진 턱을 비틀며 카엘의 서슬 퍼런 검날을 향해 오히려 목을 들이밀었다. 베인 피부에서 흘러내린 피가 차가운 강철 칼날을 타고 붉게 번졌다.

“신호기가 부서졌다고 끝난 줄 아느냐! 뼈로 깎은 신호탄 따위는 그저 불씨를 당기는 손짓에 불과했다. 외곽 경계탑은 이미 놈들의 손에 떨어졌다!”

악에 받친 외침에 카엘의 눈매가 얼음장처럼 가늘어졌다. 대공의 손목이 비틀리며 검면으로 후작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벨리안의 고개가 꺾이며 피 섞인 이빨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군 앞에서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지 마라. 썩은 살점을 더 도려내야 바른말이 나오겠나.”

카엘의 낮은 음성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벨리안은 바닥에 침을 뱉어내며 섬뜩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파멸을 확신한 자 특유의 뒤틀린 환희가 얼굴 가득 번져 나갔다.

“베르만 대마법사께서 이미 결계의 심장부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네년이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공명실의 주 결계는 안쪽에서부터 허물어질 것이다. 수도의 하늘이 열리고 어둠의 군세가 이 땅을 뒤덮는 꼴을 똑똑히 보게 될 테다!”

그 말에 라온이 굳은 표정으로 무너진 제단 앞을 성큼 넘어왔다. 라온은 쓰러진 벨리안의 멱살을 잡고 그의 피 묻은 제복 안쪽을 거칠게 헤집었다. 벨리안이 버둥거리며 저항하려 했지만, 카엘의 묵직한 군화가 그의 부러진 어깨를 짓밟아 꼼짝달싹 못 하게 내리눌렀다.

라온의 손끝에 걸려 나온 것은 검붉은 균열이 새겨진 흑요석 패였다. 정교한 마법진이 음각된 그 물건은 불길한 맥동을 토해내며 집무실 바닥의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건…… 결계 왜곡 연동 인장입니다.”

라온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인장에 새겨진 문양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원로원 최고 권한자만이 쥘 수 있는 인장입니다. 학회 최상층의 통제 마법진과 직접 닿아 있어요. 벨리안의 말이 사실입니다. 외곽 경계탑의 신호가 끊겼음에도, 중앙 공명실의 결계핵을 강제로 해체하는 역류 술식이 이미 학회 쪽에서 가동되었습니다.”

라온이 들고 있는 흑요석 인장 표면에서 붉은빛이 번쩍일 때마다, 발밑의 석판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벨리안이 이 집무실에 펼쳐 두었던 마나 역전 결계는 단순한 방어벽이 아니었다. 엘리시아의 별빛 마나와 공명실의 결계를 맞물려 부수기 위한 기폭 장치였던 것이다.

엘리시아는 바닥에 처박힌 벨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의 각인이 찌르는 듯한 통증을 보내왔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보랏빛 눈동자에 서린 빛은 차가울 정도로 맑고 엄숙했다.

“왕국의 수호자여야 할 자가 수도의 목줄을 끊어 적에게 바치려 들다니.”

엘리시아가 벨리안의 앞에 한 걸음 다가섰다. 발걸음마다 서늘한 권위가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수도 방위군 총사령관 벨리안 바르샤트. 그대는 태초의 맹약을 저버리고 왕국과 백성을 도륙하려 한 대역죄인이다.”

“하! 계집 따위가 감히 나를 단죄하겠다고……?”

“조용히 해라.”

엘리시아의 차가운 일갈이 벨리안의 조소를 찢어발겼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선고를 내렸다.

“이 순간부로 그대의 사령관 직위를 즉결 박탈한다. 후작위 역시 영구히 몰수될 것이며, 바르샤트의 이름은 반역자의 낙인과 함께 역사에서 지워질 것이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카엘을 향했다.

“상황이 정리되는 즉시, 아스트라엘의 국법에 따라 이자의 목을 베어 성벽에 걸 것입니다. 백성들이 배신자의 최후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왕국의 질서가 바로 설 테니까요.”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카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의 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히며 벨리안의 남은 한쪽 쇄골을 깊게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켜는 벨리안의 단전에 카엘의 서늘한 푸른 오러가 파고들어 잔존 마나의 흐름을 단숨에 끊어 놓았다. 완벽한 무력화였다.

축 늘어진 벨리안은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만을 몰아쉬었다. 라온은 품에서 마나 구속구를 꺼내 후작의 양손과 목을 결속했다.

“인장의 왜곡 흐름을 끊으려 해도, 이미 주 결계의 지맥에 깊은 쐐기가 박혔습니다.”

라온이 흑요석 인장을 손바닥으로 부수며 창밖을 응시했다.

그 순간, 사령부 요새 전체가 뒤흔들릴 만큼 거대한 파동이 지면을 타고 밀려왔다. 왕궁 중앙 공명실 쪽에서 쏘아 올려진 붉은 기둥이 먹구름 낀 하늘을 사납게 꿰뚫고 있었다. 외곽 경계탑이 무너지며 흘러나온 탁한 마나가 결계의 심장부를 향해 무섭게 휘몰아치는 소리가 창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베르만이 마침내 왕국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발코니로 향하는 두꺼운 유리문이 거센 충격파에 비명을 지르며 덜컹거렸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사령관 집무실의 테라스 난간으로 나아갔다. 밤하늘을 찌른 붉은빛의 진원지는 왕궁 정중앙, 왕국의 숨결을 지탱하던 중앙 공명실 상공이었다. 반투명한 은빛 장막이어야 할 결계 표면에 검붉은 균열이 번개처럼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거대한 유리 덮개가 부서져 내리듯 하늘 전체가 삐걱거리는 파열음이 수도 전역을 뒤흔들었다.

“상태가 심각합니다.”

뒤따라 나온 라온이 난간에 손을 짚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비친 하늘은 이미 재앙의 전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베르만이 공명실의 주 결계 제어석에 원로원 금기 주술을 강제로 덧씌웠습니다. 외곽 경계탑이 무너지며 밀려든 탁한 마나를 주 결계 내부로 빨아들여 자폭 술식으로 전환하고 있어요. 이대로 결계가 완전히 깨지면, 수도 방벽 너머의 어둠 무리가 한순간에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라온의 손끝에서 푸른 탐지 마법진이 부서지며 잔해가 모래처럼 흩어졌다. 지맥의 흐름 자체가 완전히 뒤틀려 통상적인 억제 주문은 닿지도 않는 상태였다.

그 순간, 엘리시아의 오른손 손바닥에서 맹렬한 열기가 치솟았다.

새겨진 여덟 갈래 별 문양이 붉은 균열에 반응하듯 날카로운 빛을 뿜어냈다. 결계와 연결된 초대 공녀의 각인이 공명실의 붕괴를 고스란히 전해오며 영혼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일으켰다. 엘리시아는 비틀거리지 않으려 난간을 굳게 쥐었다. 입술 새로 핏방울 하나가 배어 나와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각인이 결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스스로 주인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려 요동치고 있었다.

시퍼렇게 질린 카엘이 순식간에 다가와 엘리시아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의 손아귀에 실린 힘은 다급했고, 서늘한 푸른 눈동자 속에는 억누를 수 없는 동요가 번져 있었다.

“공녀님,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카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긁히듯 울렸다.

“각인이 마나를 역류시키며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저 공명실의 붕괴는 공녀님을 제물 삼아 삼키려는 덫입니다. 사령부 지하에 북부로 이어지는 비밀 이송진이 있습니다. 공녀님께서는 호위 기사들과 함께 수도를 빠져나가십시오. 베르만과 배신자들의 목은 제가 공명실로 들어가 직접 베어 오겠습니다.”

카엘은 엘리시아를 안전한 집무실 안쪽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전장의 사지에서 오직 주군만을 지켜내겠다는 냉혹한 기사의 맹목적인 충성이 그의 단단한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서서 카엘의 손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잡힌 팔을 매섭게 쳐내어 그의 손아귀를 풀어냈다.

차가운 바람이 발코니를 휘감고 지나가는 사이,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카엘의 시선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나를 등 뒤에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카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입가에 번진 붉은 피를 손등으로 거칠게 훔쳐낸 엘리시아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섰다.

“내 앞을 막아서는 방패가 아니라 내 곁을 지키는 검이 되십시오.”

“공녀님!”

“아스트라엘의 결계가 무너지면 도망칠 땅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북부로 물러서서 백성들이 도륙당하는 꼴을 지켜본 뒤에 살아남은들, 그게 무슨 주군이고 군주란 말입니까? 나는 누군가의 희생 뒤에 숨어 목숨을 구걸하러 이 세계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엘리시아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은빛 마나가 밤하늘의 붉은 노을을 서서히 밀어내며 서늘한 위엄을 세웠다.

“초대의 맹약이 내 영혼을 갉아먹는 족쇄라면, 내가 직접 그 족쇄를 부수겠습니다. 공명실을 뒤흔드는 베르만의 목을 치고 결계를 억누를 자는 오직 별빛의 각인을 지닌 나뿐입니다. 카엘 드 아르테미스, 그대는 북부의 대공이자 내게 검을 바친 신하입니다. 주군의 명을 거스르고 사사로운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를 새장에 가두려 들지 마십시오.”

서늘하면서도 결연한 군주의 일갈이었다.

카엘은 쳐내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 남은 차가운 잔향과 눈앞에 선 공녀의 단단한 눈빛이 그의 오만을 산산이 깨부수고 있었다. 그녀는 지켜주어야 할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왕국의 파멸을 온몸으로 막아서려는 진정한 지배자였다.

카엘의 푸른 눈동자에서 일렁이던 불안이 잦아들었다. 대신 그 자리에 한층 더 깊고 서늘한 결의가 차올랐다.

“……어리석은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주군.”

카엘이 허리춤의 대검 자루를 으스러질 듯 고쳐 쥐었다. 검신을 타고 피어오른 짙푸른 오러가 발코니의 석조 난간을 날카롭게 갈라놓았다.

“주군의 명이 그러하다면 공명실의 바닥이 피로 물들 때까지 앞을 가로막는 모든 숨통을 끊어 놓겠습니다.”

라온 역시 품 안에서 금서의 마지막 장과 해독 주문서를 쥐며 엘리시아의 곁으로 나란히 섰다.

“주 결계석의 한계 시간은 길어야 반 각입니다. 베르만이 결계의 핵을 완전히 역전시키기 전에 공명실 최심부에 도달해야 합니다.”

“출진합니다.”

엘리시아의 명과 함께 세 사람의 모습이 사령부 발코니 아래, 붉게 타오르는 왕궁 중심부를 향해 매섭게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