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공녀의 마법 로맨스 · 총 8화 · AI 작가 윤슬

제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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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비밀 통로를 빠져나와 집무실로 향하던 회랑 끝, 국왕 시해를 서두르던 벨리안과 사령부 대전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적의 기습적인 암흑 마도구를 카엘의 대검이 쳐내고, 곧바로 엘리시아의 마나가 폭발했다.

눈이 멀 정도로 쏟아져 내린 은빛 파동이 대전 전체를 하얗게 집어삼켰다.

엘리시아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온 별빛은 카엘의 검풍을 타고 번져 나가며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암흑의 찌꺼기들을 모조리 태워 없앴다. 칠흑 같은 어둠을 머금고 있던 마도구가 높은 파열음을 내지르며 비명을 토해 냈다.

“크윽, 이 괴물 같은 계집이……!”

벨리안 바르샤트 후작은 다급히 검은 마도구를 가슴 앞으로 치켜세워 결계를 둘렀다. 끈적거리는 검붉은 장벽이 후작의 전면을 감쌌으나, 순수한 왕가의 별빛을 온전히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은빛 광채가 장벽의 중심을 가차 없이 꿰뚫는 순간, 쨍강 하는 굉음과 함께 암흑 마도구의 표면에 손톱만 한 균열이 쩍 갈라졌다.

거대한 충격파가 벨리안의 흉곽을 그대로 후려쳤다.

“푸학!”

탁한 핏덩이를 뿜어낸 후작이 상석의 계단 위로 거칠게 나뒹굴었다. 뒤편으로 물러서 있던 호위병 서넛이 경악하며 주군의 곁으로 달려들었지만, 그들 앞에는 이미 서늘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딜 감히.”

카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대검을 쥐어 잡은 그의 손목이 한 번 비틀리자, 푸른 오러의 궤적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번뜩이는 청빛의 섬광이 대전 바닥을 짓이기며 쇄도했다. 칼날이 살갗에 닿기도 전에 터져 나온 검압만으로도 방위군 정예병들의 방패가 부서져 나가고 사지가 꺾여 벽면돌에 처박혔다.

단숨에 퇴로를 틀어쥔 카엘이 대검을 고쳐 쥐고 계단 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서슬 퍼런 살기에 벨리안의 얼굴이 잿빛으로 질렸다. 후작은 부서진 마도구를 가슴팍에 쑤셔 넣으며 상석 뒤편 벽면의 해골 문양 부조로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경비대, 뭣들 하느냐! 쳐라! 당장 문을 내려!”

벨리안이 부조의 안구를 거칠게 눌렀다.

쿵, 쿵, 쿵!

천장을 떠받치던 석조 기둥들 사이에서 쇠사슬이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졌다. 대전과 최심부 회랑을 잇는 통로 위에서 세 뼘 두께의 육중한 흑철 방호벽이 바닥을 뒤흔들며 맹렬한 기세로 내리꽂혔다.

카엘의 대검이 방호벽의 틈을 향해 벼락처럼 꽂혀 들어갔으나, 간발의 차이로 흑철 문이 바닥에 완벽히 맞물렸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돌가루와 쇳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도망쳤습니다.”

카엘이 굳게 닫힌 흑철 문에 칼끝을 겨눈 채 낮게 으르렁거렸다. 푸른 눈동자에는 놓친 사냥감을 향한 서늘한 살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비상 격벽입니다. 사령부 요새가 포위되었을 때 본영을 단절시키는 장치인데, 집무실로 향하는 통로를 완전히 틀어막았습니다.”

그때, 대전 뒤편에서 서류철을 챙겨 들고 뛰쳐나오던 라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라온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바닥을 향해 곤두섰다. 금발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대공. 칼을 거두십시오.”

“무슨 소리지, 엘릭스 수석. 저 문 너머로 벨리안이 달아났다. 지체하면 놈이 경계탑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아닙니다. 바닥을 보십시오!”

라온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떨리는 손가락으로 갈라진 바닥의 석판을 짚었다. 조금 전 엘리시아의 별빛 마나와 벨리안의 암흑 마도구가 격돌하며 패인 균열이었다.

파여 나간 석재 틈새로 검붉은 마나의 실오라기들이 실핏줄처럼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공중에 흩어지지 않고 바닥 아래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마치 바닥 밑바닥에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괴물이 숨죽인 채 주변의 기운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는 형태였다.

라온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이건 단순한 방어 마법이나 결계의 잔흔이 아닙니다. 대전 바닥 전체에…… 학회 지하의 금서고에나 봉인되어 있어야 할 왜곡 마법진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도 방금 공녀 전하께서 방출하신 별빛 마나를 흡수해 어딘가로 흘려보내고 있어요.”

“내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다고요?”

엘리시아가 다가가며 물었다.

오른손 바닥을 감싼 붕대 너머로 여덟 갈래 별 각인이 욱신거리며 지독한 한기를 뿜어냈다. 방금 일격을 가한 대가로 손끝의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있었지만, 엘리시아는 주먹을 말아 쥐어 떨림을 억눌렀다.

라온이 고개를 들며 경고했다.

“베르만 대마법사의 솜씨가 분명합니다. 결계석을 망가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왕궁의 지맥을 통째로 뒤틀어 놓았어요. 이 왜곡진의 종착지는…… 바로 저 방호벽 너머, 후작의 집무실입니다. 그곳에서 전하의 마나를 역이용해 더 끔찍한 주술을 완성하려는 속셈입니다.”

지하에서부터 올라오는 불길한 맥박이 군화 밑창을 통해 전해졌다. 사령부 건물 전체가 기괴한 진동에 휩싸이고 있었다.

카엘이 엘리시아의 곁으로 다가서며 대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전하, 제가 저 방호벽을 부수고 앞장서겠습니다. 놈들이 판을 벌려 놓았다면, 그 판 자체를 짓밟아 버리면 됩니다.”

엘리시아는 굳게 닫힌 흑철 문을 서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도망친 배신자를 향한 분노와 왕국의 법도를 바로 세우겠다는 주군의 결의가 서려 있었다.

“도망칠 곳은 없다, 벨리안. 네가 더럽힌 왕국의 땅 위에서 죗값을 치러라.”

엘리시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카엘, 라온. 길을 엽니다. 왕궁 결계가 완전히 찢겨 나가기 전에 배신자의 목덜미를 잡겠습니다.”

엘리시아의 단호한 명에 카엘의 검신에서 다시금 푸른 오러가 치솟았고, 라온 역시 품에서 양피지 주문서를 뽑아 들며 두 사람의 뒤를 바짝 따랐다. 세 사람의 발걸음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집무실로 향하는 흑철 문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흑철로 주조된 집무실 문은 사령부 복도 끝을 틀어막은 채 육중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문 표면에는 방위군의 문장 대신 기괴하게 뒤틀린 주술 표식들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그 틈새마다 끈적한 암갈색 마나가 스며 나와 불길하게 요동쳤다.

문턱에 다다르자마자 라온이 급히 팔을 뻗어 두 사람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문의 형태가 이상합니다. 보통의 폐쇄 마법이 아닙니다.”

라온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품 안에서 투명한 에메랄드빛 탐지석을 꺼냈다. 그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마나를 주입하자, 보석에서 가느다란 녹색 빛줄기가 뻗어 나가 문짝 아래의 좁은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러나 빛줄기가 문 너머의 공기에 닿은 찰나였다.

맑게 빛나던 탐지석 표면이 순식간에 썩은 피처럼 검붉게 물들었다. 돌 내부에서 치솟은 거센 열기에 라온의 손가락 끝이 데인 듯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타앙!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탐지석이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며 튀었다. 라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섰다. 창백해진 그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원로원의 금기 술식입니다. 베르만 대마법사가 학회 지하 서고에서 빼돌린 게 틀림없어요. 집무실 내부 전체에 마나 역전 결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카엘이 검자루를 고쳐 쥐며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역전 결계라니. 구체적으로 어떤 함정이지?”

“별빛 마나를 감지하는 순간, 그 흐름을 정반대로 뒤집어 술자의 체내로 밀어 넣는 덫입니다. 공녀 전하께서 저 문을 넘는 즉시, 전하의 마나 회로 전체가 역류할 겁니다. 혈관이 타들어가고 종국에는 심장이 파열되고 맙니다. 애초에 전하를 죽이기 위해 맞춤형으로 짜인 결계예요.”

라온의 설명에 복도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엘리시아는 붕대로 동여맨 오른손을 굳게 쥐었다. 손바닥 안쪽에서 고동치는 여덟 갈래 별 문양이 문 너머의 사악한 기운을 감지한 듯 격렬하게 욱신거렸다. 조금 전 대전에서 놈의 마도구를 부수며 겪었던 고통보다 훨씬 더 지독한 반동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엘이 엘리시아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대검을 가슴 앞으로 바짝 세웠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주군의 안위를 염려하는 빛과 함께, 정면 돌파의 칼날이 되겠노라 맹세했던 기사의 서늘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결계가 마나를 노린다면, 문을 부수고 터져 나올 첫 번째 반동은 제 오러로 가르겠습니다. 전하의 회로에 닿기 전에 제가 충격을 끊어 낼 테니, 제 뒤를 따라붙으십시오.”

독단적으로 앞을 가로막는 대신, 주군이 나아갈 길목의 칼바람을 먼저 베어 내겠다는 뜻이었다.

엘리시아는 붕대 감긴 손으로 카엘의 단단한 어깨 갑주를 가볍게 짚었다.

“믿습니다, 카엘. 하지만 무리해서 모든 충격을 홀로 받아낼 필요는 없어요. 내 싸움은 내가 끝낼 테니, 당신은 문 너머의 퇴로를 단단히 틀어쥐세요.”

“존명.”

카엘이 짧게 답하며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불필요한 망설임 없이 하나의 호흡으로 맞물린 두 사람의 시선이 굳게 닫힌 흑철 문으로 향했다.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라온을 돌아보았다. 라온 역시 흩어진 탐지석 파편을 수습하며 안색을 굳히고 있었다. 엘리시아의 서슬 퍼런 결의에 학자로서의 두려움마저 떨쳐낸 듯, 그의 눈동자 또한 단단하게 빛났다.

“라온, 역전 결계의 핵을 누를 방법이 있습니까?”

“완전히 무력화할 시간은 부족하지만, 전하께서 진입하시는 찰나에 결계의 지맥을 교란해 역류의 반동을 지연시킬 수는 있습니다. 제가 준비한 상쇄 주문서 석 장을 바닥에 동시에 박아 넣겠습니다.”

라온이 품에서 마나를 머금은 푸른빛 주문서들을 꺼내 들었다.

“그 짧은 틈에 벨리안을 제압해야 합니다. 만약 신호가 지체되면 결계의 압력이 사령부 전체를 덮칠 겁니다.”

“그 틈이면 충분합니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굳게 닫힌 흑철 문으로 향했다. 문 너머에서 벨리안의 거친 숨소리와 음산하게 웅얼거리는 주문 소리가 미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놈은 이미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의식을 준비해 놓았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엘리시아가 턱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부수세요, 카엘.”

“존명.”

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검신을 휘감은 짙푸른 오러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사령부 복도의 공기를 사납게 찢어발겼다.

엘리시아는 오른손에 응축된 은빛 마나를 끌어올렸다. 피부를 에는 듯한 지독한 통증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힌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기운이 흑철 문을 향해 날카롭게 정렬했다.

대검이 묵직한 호를 그리며 흑철 문을 강타했다. 검신을 휘감은 짙푸른 오러가 쐐기처럼 파고들자, 거대한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안쪽으로 뜯겨 나갔다.

파편과 쇳가루가 자욱하게 이는 복도를 지나 세 사람이 발을 디딘 곳은 더 이상 일상적인 집무실이 아니었다.

원래 양탄자가 깔려 있어야 할 바닥은 거칠게 파헤쳐져 있었고, 그 자리에는 검붉은 피로 새겨 넣은 듯한 거대한 역전 마법진이 섬뜩한 박동을 토해내고 있었다. 책상과 장식장은 벽가로 밀려나 부서져 있었으며, 방 중앙에는 이계의 제단을 연상시키는 돌무더기가 높게 솟아 있었다.

엘리시아의 발끝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오른손 손바닥이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듯 타올랐다.

“큭……!”

살갗 아래 새겨진 여덟 갈래 별 문양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탁한 기운이 허공의 별빛 마나를 강제로 빨아들여 거꾸로 밀어 넣었다. 정상적인 순환을 벗어난 마나가 혈맥을 쥐어짜듯 역류했고, 목구멍 안쪽으로 비릿한 피 맛이 치솟았다. 엘리시아는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붉은 핏방울을 닦아낼 겨를도 없이 상체를 숙였다.

“전하!”

카엘의 푸른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엘리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손을 뻗었지만, 엘리시아는 떨리는 주먹을 벽에 짚으며 스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물러서지 마세요, 카엘.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보랏빛 눈동자가 핏발 선 시야 속에서도 번뜩였다. 주군의 서늘한 일성에 카엘은 입술을 짓이기며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그의 전신에서 일어난 오러가 사나운 파도처럼 굽이치며 엘리시아의 주변으로 쏟아지는 악의적인 마나 압력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제단 위에 비스듬히 서 있던 벨리안 바르샤트가 낮게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황금 견장이 비뚤어진 감청색 사령관 제복 위로 튄 흙먼지도 털어내지 않은 채였다. 그의 가늘고 차가운 호박색 눈에는 패배자의 초조함 대신 뒤틀린 광기가 가득 차 있었다.

“제 발로 무덤에 걸어 들어왔구나, 버림받았던 계집이.”

벨리안이 제단 바닥을 군화로 짓이기며 조롱 섞인 말을 뱉었다.

“원로원의 베르만 대마법사와 내가 공들여 파 놓은 함정이다. 그 각인이 강해질수록, 이 방의 술식은 네 년의 명줄을 남김없이 빨아먹게 되어 있지. 순순히 결계석 틈바구니에서 말라 죽었으면 곱게 끝났을 것을, 감히 여기까지 기어올라와?”

“입을 찢어 놓기 전에 닥쳐라.”

카엘이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대검을 찔러 넣으려 발을 내딛는 순간, 라온이 빠르게 품에서 푸른 주문서 석 장을 꺼내 바닥을 향해 내리꽂았다.

“카엘 전하, 멈추십시오! 바닥의 경계선을 밟으면 역류 파동이 증폭됩니다!”

라온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에메랄드빛 마나가 세 장의 주문서로 흘러들었다. 주문서가 바닥에 박히자마자 청량한 빛의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검붉은 술식의 지맥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붉은빛과 푸른빛이 충돌하며 마룻바닥이 자갈처럼 부서져 튀었다.

“전하, 마나 회로를 강제로 닫으려 하지 마십시오! 이 술식은 억누를수록 살을 파고듭니다. 제가 결계의 호흡을 교란할 테니, 호흡을 제 마나 파동에 맞추셔야 합니다!”

라온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학회 원로원의 수장이 직접 설계한 금단의 결계를 혼자의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수석 마법사에게도 영혼을 갉아먹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라온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엘리시아의 안전만을 좇고 있었다.

라온의 주문이 붉은 마법진을 짓누르자, 엘리시아의 흉통이 미세하게 잦아들었다. 거꾸로 솟구치던 마나의 흐름이 둔해진 틈을 타 엘리시아가 한 걸음 제단을 향해 나아갔다.

“베르만과 작당해 왕궁의 결계를 찢고, 수도의 백성들을 어둠의 아가리에 던져 넣으려 한 대가가 고작 이것입니까, 벨리안 바르샤트?”

서늘하게 가라앉은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부서진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총사령관이라는 자가 왕국을 팔아넘겨 얻고자 한 것이 고작 썩어 문드러진 권좌 하나였습니까.”

벨리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제단 뒤편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품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멍청한 소리! 태초의 맹약 따위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시효가 끝났다! 왕가는 쇠락했고, 결계는 공녀들의 목숨을 갈아 넣지 않고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족쇄일 뿐이야! 어둠의 군주들이 강림하는 순간, 이 가짜 낙원은 영원한 밤에 잠길 것이다!”

벨리안의 손이 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칠흑 같은 짐승의 뼈를 깎아 만든 기괴한 호각 형태의 마도구였다. 표면에 음각된 핏빛 룬 문자가 불길하게 요동치며 주변의 빛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라온이 핏기를 잃은 얼굴로 소리쳤다.

“저건…… 침식의 신호기입니다! 외곽 경계탑 너머의 군세를 사령부 한복판으로 직접 끌어들이려는 겁니다!”

“막아야 한다!”

카엘이 지체 없이 바닥을 박차고 솟구쳤다. 짙푸른 오러가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며 제단을 향해 쇄도했다. 칼끝이 벨리안의 목덜미를 겨눈 순간, 벨리안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제단 바닥의 비밀 레버를 걷어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제단 전면에 두꺼운 강철 암벽이 솟구쳐 오르며 카엘의 궤적을 가로막았다. 대검이 강철벽을 내리찍으며 귀를 찢는 굉음과 불꽃을 튀겼지만, 단단한 방호벽은 카엘의 진격을 반 뼘 차이로 지연시켰다.

“하하하! 늦었다! 영원한 밤을 맞이해라!”

벨리안이 뼈 마도구를 집무실 천장의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파쇄창을 향해 치켜들었다. 칠흑 같은 암흑 마나가 마도구의 주둥이로 응축되며 하늘을 꿰뚫을 검은 섬광을 뿜어낼 준비를 마쳤다. 저 빛이 밤하늘로 치솟는 순간, 결계 너머에 웅크린 수천의 어둠이 수도 한복판으로 쏟아져 내릴 터였다.

그 짧은 틈, 엘리시아의 발이 움직였다.

고통으로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난폭하게 낚아채며, 그녀는 손바닥의 각인을 억지로 쥐어짰다. 역류하는 결계의 압박 속에서 피어난 은빛 마나는 이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시린 빛을 띠고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밤을 부른다는 겁니까.”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낸 엘리시아가 천장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뒤틀린 마나가 손가락 끝을 찢고 터져 나오며 서늘한 보랏빛 궤적을 허공에 그렸다. 마도구를 쏘아 올리려는 벨리안의 팔과, 그 팔을 겨눈 엘리시아의 섬광이 같은 찰나를 향해 날카롭게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