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소설 속 관찰자 · 총 10화 · AI 작가 백야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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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간으로 파고드는 검푸른 칼날의 서슬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엘리샤는 피하지 않았다. 좁은 마차 바닥에서 뒤로 물러서는 순간 벽에 막혀 목이 꿰뚫릴 뿐이었다.

손바닥에 쥐고 있던 흑철 파편을 비스듬히 세워 치켜올렸다. 단검의 뾰족한 칼끝이 흑철 조각의 옆면을 사납게 긁고 지나갔다.

채애앵!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칼날의 궤적이 빗나가며 엘리샤의 귓가를 스쳤고, 잘려 나간 갈색 머리칼 몇 가닥이 허공에 흩어졌다.

단검을 쥔 암살자의 손목에 힘줄이 팽팽하게 솟구쳤다. 빗나간 공격을 수습하려는 듯 손목을 비틀어 다시 칼날을 가로로 베어내려 했다.

엘리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관찰자의 눈동자가 찌그러진 마차 내벽 하단에 그대로 노출된 구리빛 배선을 정확히 짚어냈다. 비상 마력 차폐 잔류선이었다.

왼발을 뻗어 피복이 벗겨진 굵은 전선을 힘껏 걷어찼다.

지지직!

차폐석의 잉여 마력이 합선되며 푸른 섬광이 사방으로 번쩍 터졌다. 암살자의 가죽 장갑에 닿은 구리선이 타들어가며 지독한 연기와 함께 강력한 전류가 튀어 올랐다.

“큭……!”

암살자의 자세가 무너졌다. 번쩍이는 빛에 눈이 먼 사내가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엘리샤는 반대쪽 벽을 짚고 몸을 굴려 마차 구석의 찌그러진 좌석 뒤편으로 파고들었다. 다친 손목을 감싼 붕대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멈출 겨를은 없었다.

“황태자가 보낸 개들이 제법 요란하네.”

엘리샤는 거친 숨을 고르며 서늘한 목소리를 뱉었다. 부러진 철봉을 한 손으로 짚고 상체를 낮췄다.

어둠 속에서 시야를 되찾은 암살대 수장이 입가를 비틀었다. 검은 복면 위로 드러난 뱀 같은 눈매에 조소가 걸렸다.

“발버둥 쳐봐야 헛수고다. 그 쥐새끼 같은 눈깔로 세상을 내다보는 것도 여기까지야.”

“세드릭이 직접 시켰겠지. 지맥을 터뜨려 결투장을 무너뜨린 흉계가 그 석판 하나로 다 까발려졌으니까.”

“죽을 계집이 말이 많군.”

암살자가 다시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 뒤편 뜯겨 나간 문틈으로 검은 복면을 쓴 둘이 더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통로 바깥에는 여전히 호송병들의 살육이 이어지는 비명과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엘리샤는 관찰자의 시야를 바닥 쪽으로 돌렸다. 회랑 바닥을 타고 흐르는 마력의 결이 황궁 지하 깊은 곳을 향해 비정상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단순히 도주하려는 게 아니었다.

“원로원 수석 집행관이 황태자와 한통속이었나 보네. 증거 석판을 빼돌리려고 이딴 짓까지 벌인 걸 보면.”

엘리샤가 굳은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암살대 수장의 어깨가 굳었다. 상대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눈치가 제법 빠르구나. 그렇다 한들 네가 뭘 어쩌겠나? 칼릭스 드 라온은 저 뒤편 화강암 차단벽에 갇혀 한 발짝도 못 나온다. 원로원이 준비한 마력 억제 진식이 그놈의 오른팔을 통째로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 테니까.”

암살자가 턱짓으로 통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증거 석판? 학장 놈이 걸어둔 봉인 따위는 수석 집행관 어르신의 손에서 이미 가루가 되고 있다. 공인된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지. 드 라온 공자가 지맥을 건드려 재앙을 일으켰고, 궁지에 몰리자 호송대를 습격해 탈주했다는 사실.”

수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명의 부하가 좌우로 갈라져 좁은 차내를 포위했다.

“그러니 얌전히 눈을 내놓아라. 황태자 전하께 바칠 진상품이다.”

세 명의 암살자가 일제히 쇄도했다. 한 놈은 엘리샤의 다리를 베어 이동을 막으려 했고, 다른 한 놈은 철봉을 쳐내려 검을 내질렀다. 그리고 수장은 다시금 독기 서린 단검으로 엘리샤의 두 눈을 노려왔다.

셋의 호흡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린 치명적인 연격이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이미 그들의 근육 움직임과 체중 이동의 축을 꿰뚫고 있었다.

엘리샤는 부러진 철봉을 암살자들의 무기가 아니라, 천장에서 위태롭게 덜렁거리던 차내 마력등을 향해 위로 후려쳤다.

콰창!

유리 갓이 박살 나며 고농축 발광석 가루가 암살자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눈을 감아라!”

수장이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터져 나온 미세한 가루가 공기와 마찰하며 눈이 멀 것 같은 흰 섬광을 뿜어냈다.

“크아악!”

가장 왼쪽에 있던 암살자가 얼굴을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엘리샤는 그 틈을 타 몸을 웅크린 채 찌그러진 좌석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바닥에 고여 있던 차폐유를 발로 차 암살자들의 발밑으로 흩뿌렸다.

미끄러운 기름 탓에 중심을 잃은 암살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차벽에 머리를 세게 찧었다.

“잡아! 저 빌어먹을 년을 찢어 죽여라!”

수장의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수장은 눈이 먼 상태에서도 소리만을 의지해 맹렬하게 단검을 바닥으로 찍어 내렸다.

콰직!

좌석의 가죽 시트가 찢겨 나가며 엘리샤의 허벅지 바로 옆 바닥에 칼날이 깊숙이 박혔다. 섬뜩한 냉기가 바지 천을 뚫고 살갗에 닿았다.

엘리샤는 박힌 단검의 손잡이를 발로 걷어차 수장의 손가락을 꺾어버렸다.

“우두둑!”

뼈가 뒤틀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수장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엘리샤는 벽을 등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셋을 상대로 버티는 것은 한계가 뚜렷했다. 시야를 흐리는 잔류 마력도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샤의 입가에는 옅은 냉소가 걸려 있었다.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암살대 수장이 꺾인 손가락을 거칠게 맞추며 피 묻은 이를 드러냈다. 살의가 번뜩이는 눈빛이 마차 안을 짓눌렀다.

“독한 년. 고통 없이 보내줄 생각은 버려라. 사지를 꺾어놓고 네놈의 안구를 산 채로 파내 주마.”

살아남은 두 암살자가 독검을 다시 치켜들며 좁은 공간을 바짝 조여왔다. 퇴로는 없었다. 완전히 독 안에 든 쥐의 꼴이었다.

그때였다.

쿵!

화강암 격벽 너머에서 회랑 전체를 뒤흔드는 둔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었다. 뼈마디를 시리게 만드는 지독한 한기가 차폐벽의 미세한 틈새를 뚫고 마차 안쪽까지 매섭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암살대 수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지?”

쩌저적!

회랑의 두꺼운 석벽을 타고 얼음꽃이 무서운 속도로 피어오르는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얼어붙은 석벽이 마침내 파열되는 거대한 굉음이 회랑 끝에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아앙!

회랑을 틀어막고 있던 두 자 높이의 화강암 격벽이 하얗게 서리를 뿜으며 안쪽으로 터져 나갔다.

석재가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가 아니었다. 영하 수십 도의 냉기에 순식간에 수분을 빼앗긴 암석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난 파편을 쏟아냈다. 흩날리는 얼음 가루 너머로 서슬 퍼런 냉기를 두른 칼날이 회랑의 어둠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칼릭스 드 라온이었다.

붕대로 칭칭 동여맨 칼릭스의 오른팔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하얀 얼음 결정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력선이 뒤틀리고 찢어지는 반동 탓에 턱뼈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푸른 눈동자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칼릭스!”

엘리샤가 찌그러진 차벽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차단벽을……!”

암살대 수장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소리쳤다. 그들이 내린 격벽은 고대 룬이 새겨진 황실 특수 석벽이었다. 마력 봉인구에 묶여 오른팔마저 망가진 상태의 검사가 제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부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칼릭스는 대답조차 주지 않았다. 칼릭스의 발이 바닥을 박차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회랑을 휩쓸었다.

쉬익!

엘리샤를 겨누고 있던 두 암살자가 반사적으로 독검을 휘둘렀으나, 칼릭스의 은빛 검영이 훨씬 빨랐다. 허공에 둥근 호를 그린 푸른 검날이 암살자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핏방울이 채 튀기도 전에 칼릭스의 왼손이 다른 암살자의 흉부를 정확히 찔렀다.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서슬 퍼런 냉기가 순식간에 폐와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두 구의 시체가 돌바닥에 얼어붙은 채 맥없이 나뒹굴었다. 칼릭스는 숨도 고르지 않은 채 검끝을 수장의 목젖 앞으로 찔러 넣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내 증인을 네놈들 손에 넘길 생각은 없다.”

낮게 깔린 칼릭스의 음성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상처 입은 오른팔의 떨림조차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괴물 새끼가…….”

암살대 수장이 이를 갈며 품속에서 독침을 꺼내려 들었다. 하지만 칼릭스의 검날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콰득!

“크아악!”

얼음 쐐기가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며 수장의 양 무릎뼈를 꿰뚫었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수장은 뒤이어 목덜미를 휘감은 냉기 사슬에 결박당해 벽면에 꼼짝없이 처박혔다.

칼릭스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검을 거두었다. 그의 오른팔을 감싼 붕대는 이미 검붉은 피로 흥건했다. 지맥을 가르며 금기 마법을 억지로 끌어올린 대가였다.

“괜찮나.”

칼릭스가 엘리샤를 향해 돌아섰다.

엘리샤는 바닥에 떨어진 흑철 조각을 움켜쥐고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 상태가 더 위험해 보여요. 무리해서 격벽을 깨부수지 말았어야죠.”

“네가 죽으면 증언도, 가문의 결백도 전부 사라진다. 계산이 맞지 않아.”

칼릭스는 무뚝뚝하게 답하며 턱짓으로 쓰러진 암살자들을 가리켰다.

“이놈들은 단순한 사설 자객이 아니다. 황실 직속 호송대의 마차를 정확히 알고 퇴로를 차단했다. 내부에서 길을 열어주지 않고는 불가능해.”

엘리샤는 벽에 처박혀 피를 토하고 있는 수장에게 다가갔다. 관찰자의 감각을 집중하자 굳어버린 시체들과 수장의 품 안에서 특유의 마력 반응이 찌릿하게 감지되었다.

엘리샤는 주저 없이 수장의 가슴팍을 거칠게 뒤졌다. 암살자의 옷자락 속에서 두툼한 양피지 한 장이 손에 잡혔다.

“이건…….”

양피지를 펼친 엘리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거기에는 황실 최고 재판소가 발부한 정식 공문서가 들어 있었다.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인장은 아카데미나 일반 감찰관의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 황실 원로원 수석 집행관의 직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호송 경로 임의 변경 인가서.”

엘리샤가 문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피의자 세드릭 폰 아스타르의 마력 불안정성을 이유로, 이송 경로를 지하 제3 회랑에서 황궁 지하 방호실로 긴급 변경한다.’”

칼릭스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방호실이 아니라 지하 제단이겠지. 놈들은 처음부터 재판소로 갈 생각이 없었던 거다.”

“맞아요. 세드릭을 재판정에 세우지 않고 지하 제단으로 빼돌려 고대 유적의 잔여 지맥을 흡수시키려는 속셈이에요. 그리고 원로원 수석 집행관이 그 판을 직접 짜고 있었던 거죠.”

엘리샤는 손에 든 인가서를 구겨 쥐었다. 대결투장에서 세드릭이 궁지에 몰렸을 때, 아카데미 학장과 함께 나타나 마력을 봉인했던 재판관 중 하나가 바로 그 수석 집행관이었다. 사태를 수습하는 척하며 뒤로는 세드릭을 탈출시키고 자신들을 죽여 증거를 영구히 파묻으려 한 것이다.

“크, 크큭…… 늦었다.”

벽에 박혀 피를 쏟아내던 수장이 찢어진 입술을 말아 올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격벽 너머에서 시간을 끈 것만으로도 내 임무는 끝났다. 1호차는 이미 제단 입구에 도착했을 거다. 전하께서는 마력 봉인을 풀고 제국의 진정한 지배자로 거듭나실 거다. 너희 같은 버러지들은…….”

칼릭스가 검자루 끝으로 수장의 턱을 걷어찼다.

퍽 하는 파열음과 함께 수장의 고개가 꺾이며 흰자를 드러내고 기절했다.

“더 들을 가치도 없다.”

칼릭스가 엘리샤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세웠다.

“선두 마차를 잡아야 한다. 세드릭이 제단의 힘을 온전히 손에 넣으면 황궁 결계 자체가 놈의 손에 떨어진다.”

“잠깐만요, 칼릭스.”

엘리샤가 칼릭스의 핏빛 어린 오른팔을 붙잡았다. 찢어진 옷소매 사이로 드러난 살갗 아래에서 마력선이 뒤엉켜 푸르스름한 열을 뿜고 있었다.

“그 몸으로 정면 돌파는 무리예요. 수석 집행관 곁에는 원로원의 정예 결계사들이 붙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카데미와 공동 보관하기로 했던 통제 석판…… 그것도 지금 그자들 손에 있어요.”

“석판이 넘어가면 세드릭의 반역 증거는 흔적도 없이 인멸된다.”

“알아요. 그러니까 놈들이 석판의 학장 측 봉인을 푸는 그 틈을 노려야 해요.”

엘리샤는 바닥에 떨어진 흑철 쐐기 조각을 주워 칼릭스의 손에 쥐여주었다.

“학장의 마안 봉인은 외부 충격으로 강제로 깰 때 순간적인 마력 역류를 일으켜요. 수석 집행관이 그 봉인을 억지로 뜯어내는 순간, 결계사들의 진식에 반드시 빈틈이 생깁니다.”

칼릭스가 흑철 조각을 쥔 채 엘리샤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통으로 창백해진 얼굴 위로 서슬 퍼런 투지가 떠올랐다.

“단 한 번의 기회라는 뜻이군.”

“네. 그 한 번으로 세드릭의 탈주로를 끊고 석판을 되찾아야 해요.”

그때였다.

쿵―!

회랑의 저편, 호송 행렬의 최선두가 위치한 방향에서 기괴한 진동과 함께 검붉은 마력의 파동이 벽면을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차폐벽의 룬들이 불길한 붉은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호송 행렬 1호차의 결계가 강제로 파괴되는 소리였다.

칼릭스가 검을 고쳐 잡았다. 엘리샤 역시 바닥의 파편을 털어내며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은 흩날리는 얼음 파편을 밟으며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회랑 전방을 향해 짓쳐 나갔다.

붉은 마력의 잔해가 자욱한 복도를 가로지르자, 짓눌린 철판과 부서진 바퀴살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호송 행렬의 맨 앞에 섰던 1호차였다.

차량의 육중한 강철 문은 밖에서 뜯겨 나간 것이 아니었다. 안쪽에서 터져 나온 강력한 폭압에 밀려 경첩째 뜯겨져 나가 벽면에 처박혀 있었다.

칼릭스가 검을 비껴 쥔 채 찌그러진 차내를 들여다보았다.

“없다.”

바닥에는 손목과 발목을 묶었던 마력 봉인구 여섯 개가 날카롭게 잘려 나가 뒹굴고 있었다. 결박 부위마다 푸른 불꽃이 사그라진 흔적이 선명했다. 세드릭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엘리샤가 찌그러진 마차 문틀을 짚으며 바닥의 흔적을 훑었다. 관찰자의 시야가 열리며 흩어진 마력의 찌꺼기들이 선명한 선으로 이어졌다. 흑마법 촉매 특유의 썩은 내와 황실 정예 마법사들의 은색 마력 파동이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호송 근위병들이 문을 열어 준 게 아니에요. 세드릭 자신이 안에서 힘을 터뜨렸어요. 봉인구의 해제 코드를 누군가 밖에서 넘겨줬다는 뜻입니다.”

그때, 통로 깊숙한 곳에서 나직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딱, 딱, 딱.

돌벽을 타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짙은 보랏빛 장막 너머에서 서너 명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황실 최고 재판소의 붉은 법복 위에 금빛 매듭을 두른 노인, 원로원 수석 집행관이었다. 노인의 뒤편에는 은색 투구를 눌러쓴 정예 결계사 네 명이 사각 진형을 갖춘 채 마법봉을 비스듬히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수석 집행관의 오른손에는 아카데미 학장의 푸른 마안 인장이 찍힌 통제 석판이 들려 있었다.

“역시 대단하군. 그 좁은 격벽 사이에서 암살조를 모조리 베어 넘기고 여기까지 올 줄이야. 라온 가문의 칼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어.”

수석 집행관이 턱을 치켜들며 차가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칼릭스가 검끝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드릭은 어디로 빼돌렸지?”

“빼돌리다니. 말을 조심하게, 공자. 제1황위 계승자께서는 황국의 안위를 위해 더 중대한 결단을 내리러 가셨을 뿐이다.”

“반역자를 비호하는 게 원로원의 중대한 결단인가.”

“반역이라.”

노인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지, 억울하게 죽은 자의 것이 아니다. 황실의 위엄에 흠집을 내는 사소한 진실 따윈 묻어버려야 마땅하지. 이 석판에 새겨진 기록 하나 때문에 제국 전체의 권위가 흔들릴 수는 없다.”

“그래서 아카데미와의 합의를 깨고 증거를 강탈했군.”

엘리샤가 한 걸음 나서며 수석 집행관의 손에 든 석판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이 세드릭의 흑마법 실험을 처음부터 묵인했군요. 지맥을 터뜨려 얻으려던 건 단순한 결계 통제가 아니었어. 황궁 지하 제단에 묶인 고대 병기를 깨우려던 거죠?”

수석 집행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름 없는 계집이 제법 혀를 놀리는군. 황태자 전하께서 왜 네놈의 눈깔부터 뽑아버리라 명했는지 알 것 같구나. 너무 많은 것을 들여다보는 눈은 제 명을 갉아먹는 법이다.”

노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결계사 네 명이 동시에 바닥에 마법봉을 내리찍었다.

차폐벽 전체가 울리며 네 겹의 은색 결계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동시에 수석 집행관의 왼손에서 검은 단도가 솟구치더니 석판 표면에 박힌 학장의 푸른 봉인식을 찍어 눌렀다.

치지직―!

봉인된 마안의 룬이 찢겨 나가며 보랏빛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순간, 통로 저편에서 맹렬한 지진이 일어났다. 바닥이 울렁거리며 벽체 틈새로 짙붉은 고대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하 제단에서 지맥을 끌어올리는 신호였다. 세드릭이 이미 제단의 중심에 도달한 것이다.

“원로원의 정의 따윈 처음부터 없었군.”

칼릭스가 검신을 비틀었다. 오른팔의 붕대를 뚫고 배어 나온 핏방울이 얼음 쐐기 위로 떨어져 검붉은 서리를 피워 올렸다.

엘리샤의 눈동자 속에서 석판의 마력 흐름이 수십 가닥의 붉은 실로 분해되었다. 수석 집행관이 학장의 봉인을 강제로 파괴하면서 발생한 마력의 충돌 지점이 보였다.

“칼릭스, 놈의 손에서 석판부터 부숴요!”

엘리샤가 외쳤다.

“저자가 학장의 마안을 완전히 깨부수기 직전이에요. 지금 봉인식을 짓이기면 역류하는 충격파가 결계사들의 오른쪽 축을 무너뜨려요. 남동쪽 결계사가 마력을 몰아주고 있어요!”

칼릭스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을 박찼다.

지면이 얼어붙으며 그의 신형이 은빛 궤적을 그리며 쏘아져 나갔다.

수석 집행관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칼릭스의 얼어붙은 검날은 이미 결계사들의 방어막을 찢고 석판의 균열로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