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소설 속 관찰자 · 총 5화 · AI 작가 백야

제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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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을 파고드는 붉은 마력선이 뼈마디를 부러뜨릴 듯 조여들었다. 피부 위로 새겨지는 구속 술식이 체내 마력을 강제로 결계석 핵으로 끌어당겼다. 폐 안쪽까지 타는 듯한 압박감이 밀려왔지만, 엘리샤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지 않았다. 눈을 감거나 신음을 흘리는 순간, 눈앞의 포식자는 사냥감의 숨통을 더 빠르게 끊어 놓을 것이다.

세드릭은 나직한 걸음으로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제복 어깨에 달린 금빛 견장이 붉은빛 속에서 번들거렸다. 그의 장화 끝이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 외곽에 닿았을 때, 허공을 맴돌던 푸른 마력 불꽃이 세드릭의 손끝으로 스며들며 꺼졌다.

"꽤나 의연하군.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아직 덜 된 건가?"

세드릭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여유가 묻어 있었다. 그는 허리춤의 검자루를 툭툭 건드리며 엘리샤를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너는 칼릭스를 살렸다고 착각했겠지. 그 오만한 도련놈에게 비전 마법의 결함을 속삭이고, 은제 펜던트까지 받아 쥐었을 때는 자신이 역사의 영웅이라도 된 기분이었을 테고."

엘리샤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메마른 기침을 억누르며 말을 뱉었다.

"결계석 핵에 학생 등록 마력을 얽어매는 술식은 조잡합니다. 황태자 전하."

세드릭의 눈썹이 비틀렸다. 엘리샤는 숨이 턱 끝까지 멎어드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녹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 술식의 작동 기제와 세드릭의 진짜 노림수를 그의 입에서 직접 끌어내야만 관찰자의 분석 틀에 맞출 수 있었다.

"아카데미 경연 결계는 삼중 안전장치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조 요원이라 한들, 일개 장학생의 등록 마력으로 칼릭스의 폭주를 촉발했다는 시나리오에는 구멍이 많습니다. 제어실의 마력 유출 로그는 황실 감사관들이 도착하는 즉시 흑마법 촉매의 개입 흔적을 역추적해 낼 겁니다."

세드릭의 입가에 맺혀 있던 차가운 비소가 더 짙어졌다. 그는 조소하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감사관? 사태가 끝난 뒤에 문서를 들여다볼 관료들 따위가 진실을 알아서 무엇을 하겠느냐. 역사는 살아남은 자가 기록하는 것이다. 칼릭스가 손을 쓰는 순간, 그런 형식적인 검증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어지니까."

세드릭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차가운 금속 장갑을 낀 손가락이 엘리샤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장갑 표면의 냉기가 살갗을 베어 낼 듯 차가웠다.

"칼릭스는 너처럼 미천한 계집 하나 때문에 가문의 금기를 범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나? 천만에. 그 오만한 자존심이 제 발로 반역의 단두대로 걸어오게 만들 것이다."

엘리샤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물렸다.

"펜던트……."

"눈치는 빠르군."

세드릭이 손을 거두며 장갑을 가볍게 털었다.

"라온 가문의 은제 펜던트는 소지자의 생체 신호와 마력을 실시간으로 잇는 마도구지. 하지만 이 제어실의 마력 차폐벽은 황실 비전으로 밀폐되어 있다. 네 마력 반응이 기형적인 파동을 남기며 끊겼다는 사실을, 그 천재 도련님이 모를 리가 있겠나?"

세드릭의 노림수는 단순히 이틀 뒤 결선에서의 폭사가 아니었다.

"칼릭스는 규칙을 어기지 않고는 이곳에 올 수 없다. 결투장 지하 제어실의 봉인을 무단으로 부수고 들어오는 순간, 칼릭스 드 라온은 경연 규정을 위반한 침입자이자 황실 결계를 훼손한 대역죄인이 된다. 그가 가문의 금지된 마법을 쓰면 쓸수록, 내 명분은 완벽해지지."

세드릭의 입술이 잔인하게 호를 그렸다.

"너는 미끼다, 엘리샤. 칼릭스를 유인해 목을 칠 덫에 올려놓은 살점 하나에 불과해. 네가 여기서 고통스럽게 마력을 쥐어짜일수록, 칼릭스는 더 조급하게 문을 부수려 들 테고…… 그게 바로 라온 가문의 종말이다."

세드릭은 더 이상 엘리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이미 끝난 장기 말에게 줄 관심은 끝났다는 듯, 그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이틀 뒤 결선 당일, 네가 칼릭스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도화선이 되어 타버릴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라."

철제 난간 위로 올라선 세드릭이 벽면의 제어 레버를 내렸다.

쿵!

육중한 철문이 닫히며 쇠빗장이 서너 겹으로 맞물리는 둔탁한 소리가 지하 돔을 뒤흔들었다. 벽면을 따라 흐르던 미약한 공기 순환음마저 완전히 멎었다. 외부와 연결된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고, 제어실 안에는 결계석 핵이 뿜어내는 기괴한 진동과 바닥의 붉은빛만이 감돌았다.

엘리샤는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발목을 옥죄던 주박이 체중을 싣자 살을 파고들었지만, 신음을 억누르며 옷자락 안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주머니 안쪽에 박혀 있던 푸른 늑대 은제 펜던트.

겉으로는 마력이 차단되어 싸늘하게 식어 있었으나, 금속 표면 깊숙한 곳에서 아주 잘게 떨리는 미세 진동이 남아 있었다. 칼릭스가 자신의 마력을 엮어 넣어 만든 핵은 외부 차폐벽에 막혀 흩어지면서도, 여전히 이 공간의 마력 파동을 흡수하며 버티고 있었다.

엘리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관찰자의 시야가 열렸다.

망막 위에 제어실의 모든 마력 흐름이 푸른 선과 붉은 선으로 분리되어 떠올랐다. 세드릭이 새겨 둔 붉은 마법진은 흑마법 촉매를 중심축으로 삼아 결계석의 방대한 에너지를 왜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왜곡된 파동의 끝자락이 엘리샤의 학생 등록 마력 코드를 움켜쥔 채, 심장 부근의 마력 회로로 침투해 들어가고 있었다.

‘세드릭의 계산은 정확해. 하지만 한 가지를 간과했어.’

엘리샤는 펜던트를 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마력을 얇은 바늘 형태로 뽑아 올렸다.

세드릭은 엘리샤를 단순한 도구로 보았다. 고대 마법식을 흉내 낼 줄 아는 영민한 평민 장학생. 그러나 김수현은 이 세계의 마법식이 어떤 언어로 조립되었는지, 그 구조적 근간을 수없이 뜯어보고 분석했던 편집자였다.

완전한 해제는 불가능하다. 차폐벽을 뚫고 밖으로 신호를 보낼 수도 없다.

하지만 이 결계석과 자신을 잇고 있는 흑마법 촉매의 공명 주파수를 비틀어, 기폭제의 타이밍을 지연시키거나 역류시키는 우회로는 만들 수 있었다.

엘리샤는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가다듬으며 펜던트의 서늘한 금속면을 바닥의 붉은 룬 문자 중심에 밀착시켰다.

은제 펜던트의 잔류 마력이 관찰자의 렌즈를 통과하자, 붉은 술식의 뒤틀린 접합부가 푸른 불꽃처럼 번쩍이며 선명한 균열의 좌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결투장 서쪽 외곽 회랑의 석조 난간 위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칼릭스 드 라온은 기둥 그늘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긴 채 왼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가죽 장갑을 벗어 낸 손바닥 중앙에는 작은 마력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푸른 늑대 문양의 중심부가 핏빛에 가까운 탁한 보랏빛으로 물든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반응이 끊겼다.

도서관 뒤편 정원에서 엘리샤에게 건넸던 푸른 늑대 은제 펜던트는 단순한 호신부가 아니었다. 드 라온 가문의 직계만이 다룰 수 있는 원격 마력 연동석으로, 소지자의 생체 마력 파동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이정표였다.

불과 서너 시간 전까지만 해도 미세하게 유지되던 파동이 대결투장 지하 수십 미터 지점에 닿는 순간 급격히 왜곡되더니, 이내 거대한 차폐막 안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잠겨 버렸다.

칼릭스는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아카데미 학생 자치 규율대가 허술하게 순찰을 돌던 결투장 지하 반입구 주변이었다. 지금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규율대 따위가 아니었다. 순백의 견갑 위에 황금빛 독수리 문장을 새긴 황실 직속 친위대원 여덟 명이 삼각 대형을 유지하며 통로 앞을 빈틈없이 차단하고 있었다.

학생 한 명이 들어갔다고 해서 황실 친위대가 이 야심한 시각에 결투장 지하 통로를 전면 통제할 이유는 없었다.

칼릭스의 서늘한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세드릭.’

황태자의 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어젯밤 엘리샤가 결계석 분석 메모를 떨어뜨렸을 때부터 세드릭의 칼끝은 이미 조여들고 있었다. 세드릭은 엘리샤가 드 라온 가문과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했거나, 최소한 결계석의 변조를 눈치챈 불순분자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결계석 관리 보조라는 명목으로 끌고 가 지하 제어실에 가두었다.

단순한 감금이 아니었다.

펜던트의 공명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끊긴 형태는 외부 마력이 강제로 주입되어 회로가 억눌렸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억류 반응이었다.

‘그 아이의 마력을 결계석 핵에 묶어 두었다는 뜻인가.’

칼릭스는 턱을 굳게 다물었다.

상황을 분석하는 머릿속은 얼음물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엘리샤는 평범한 평민 장학생에 불과하다. 마력 총량이 적은 그녀의 생체 코드를 결계석에 억지로 연결했다면, 그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도화선.

이틀 뒤 결선 당일, 칼릭스가 대결투장 무대 위에서 가문의 결빙 마법을 최대로 전개하는 순간 지하의 결계석은 그 마력을 먹이 삼아 폭주할 것이다. 그때 엘리샤는 그 반동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잿더미로 타버릴 터였다. 그리고 세드릭은 결계가 파괴된 현장에서 폭사한 희생양의 시신과, 폭주의 근원인 드 라온의 마력을 근거로 제시하겠지.

칼릭스를 희대의 폭주범이자 반역자로 몰아 드 라온 가문을 통째로 도륙하기 위한 완벽한 각본이었다.

"라온 가문의 마력을 미끼로 삼고, 그 조언자를 인질로 잡았다라."

칼릭스의 입술 사이로 낮게 깔린 조소가 흘러나왔다.

"세드릭, 네가 파놓은 덫이 얼마나 얕은지 똑똑히 보여주마."

이틀 뒤 결선까지 기다리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결선 무대에 오르는 순간 주도권은 온전히 세드릭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엘리샤의 목숨은 물론이고, 가문의 명예까지 황실의 단두대 위에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공터에서 마력 역류로 죽어가던 칼릭스의 마력 경로를 바로잡아 주었다. 드 라온 가문의 비전을 그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어 보며 길을 터준 은인이었다. 은혜를 입고도 덫이 두려워 물러서는 것은 라온의 검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칼릭스는 난간에서 조용히 발을 떼었다.

바람 한 점 일으키지 않는 은밀한 신법으로 석조 기둥 뒤편의 배수구 틈새를 타고 1층 회랑으로 내려섰다. 회랑 벽면을 따라 흐르는 그림자 속에 녹아들며, 지하 통로로 이어지는 외벽 배기구 쪽으로 접근했다. 발소리는 물론 옷자락 스치는 마찰음조차 철저히 억누른 보법이었다.

배기구 철창 틈 사이로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하 돔형 제어실에서 뿜어내는 기형적인 마력 압력이 배기구를 타고 지상으로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그 속에는 흑마법 특유의 역겨운 비린내와 결계석의 푸른 에너지가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저류 밑바닥에 아주 가늘게 맥동하는, 엘리샤의 미약한 마력 파동이 감지되었다.

버티고 있었다. 제어실의 거대한 마력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녀는 완전히 짓눌리지 않은 채, 무언가 저항의 실마리를 찾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없다.’

칼릭스는 품 안에서 흑철로 벼려낸 세 마디짜리 마력 쐐기를 꺼냈다.

라온 가문 깊은 수장고에 봉인되어 있던 물건이었다. 본래 적의 강력한 마법 방벽을 강제로 파쇄하고 내부 술식을 동결시키기 위해 고안된 비전의 촉매였으나, 마력 역류와 사용자 신체 훼손의 위험성 때문에 가문 내에서도 엄격히 사용이 금지된 물건이었다.

정상적인 절차로는 저 차폐 결계를 뚫을 수 없다. 황실 마법단의 공인된 해제석이 없는 상태에서 결계에 손을 대는 순간 경보가 울리고 황실 친위대가 몰려들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경보 술식이 작동하기도 전에 차폐막의 한 지점을 절대 영도의 냉기로 얼려 터뜨리는 것.

칼릭스는 마력 쐐기를 양손 사이에 끼워 넣고, 전신의 마력 회로를 급격하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엘리샤가 일러준 대로 교정된 새로운 마력 궤적이 심장을 거쳐 양팔로 뻗어나갔다. 예전 같으면 살을 찢는 듯한 고통과 함께 역류했을 방대한 냉기가, 지금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정제되어 쐐기 끝으로 모여들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칼릭스의 장갑 위로 하얀 서리가 피어올랐다.

가문의 금기를 어기는 대가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세드릭은 이를 빌미 삼아 반역죄를 들먹이며 자신을 옭아매려 들 터였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결선 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 되는 것보다는, 적이 파놓은 함정의 목덜미를 먼저 뜯어내는 편이 훨씬 승산이 있었다.

칼릭스는 배기구 너머, 지하 제어실로 뻗어 있는 주 결계선의 교차 좌표를 정확히 응시했다.

"버텨라, 엘리샤."

차가운 서릿발이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 가장자리를 타고 번져 나갔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결빙 마력으로 푸르게 타오르는 흑철 쐐기를 배기구 틈새, 제어실 외벽 결계의 급소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제어실 바닥을 가득 채운 붉은 마법진의 윤곽이 파르르 떨렸다.

십 미터 높이의 돔형 천장에서 떨어진 먼지가 엘리샤의 뺨을 스쳤다. 이틀 밤을 한자리에서 버텨낸 탓에 무릎 관절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손가락 끝은 감각조차 무뎠다. 하지만 관찰자의 감각으로 들여다보는 마력의 흐름만은 머릿속에 칼날처럼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중앙 유리 기둥 안에서 회오리치던 청록색 마력액 밑바닥, 검붉은 흑마법 촉매가 기생충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촉매의 끝자락이 결계석 핵을 거쳐 엘리샤의 가슴팍, 학생증에 각인된 고유 마력 파동과 단단히 얽혀 있었다.

세드릭이 설계한 기폭 회로였다.

결선이 시작되어 지상의 일곱 결계석이 공명하는 순간, 흑마법 촉매는 엘리샤의 마력을 먹어치우며 폭주할 터였다. 결계석은 산산조각 나고,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며, 폭주 흔적에는 칼릭스의 마력과 엘리샤의 마력만이 남아 완벽한 반역의 증거로 둔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회로를 완전히 끊을 필요는 없다.’

엘리샤는 바닥에 떨어진 쇳조각을 단단히 쥐었다. 이틀 동안 주박의 압박을 버텨내며 관찰자의 시야로 짚어낸 궤적은 단순한 단절이 아니라, 우회로의 개척이었다.

결계석 핵의 간섭 주파수를 역이용해, 촉매가 빨아들이는 표적 마력을 학생 고유 식별 번호에서 돔 외벽의 접지선으로 틀어버리는 것.

손끝을 타고 흘러나온 마지막 마력이 쇳조각을 매개로 바닥의 붉은 룬에 닿았다. 치지직, 소리와 함께 바닥의 붉은 선 하나가 방향을 비틀며 벽면을 향해 뻗어 나갔다.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쇠사슬 같은 압박감이 툭, 소리를 내며 풀렸다.

완전한 해제는 아니었으나 결계석과 엘리샤의 마력 결속이 빗겨 나간 것이다. 이로써 결선이 시작되어 촉매가 기폭하더라도 그녀의 마력이 폭사의 방아쇠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엘리샤가 숨을 내쉬며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쿠웅!

고막을 찢을 듯한 파열음이 제어실 천장을 강타했다.

단단한 화강암 벽면을 둘러싸고 있던 황실 차폐 결계가 거대한 충격파에 흔들렸다. 배기구 쪽 환기 통로를 시작으로, 제어실 벽면 전체에 새파란 서릿발이 핏줄처럼 번져 나갔다. 지독하게 차가운 냉기가 단숨에 제어실 내부의 미지근한 공기를 얼려버렸다.

파자작, 쩌적!

절대 영도에 도달한 차폐막이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이어 육중한 제어실 철문이 경첩째 뜯겨 나가며 안쪽으로 나뒹굴었다. 짙은 냉기 안개 속에서 한 인영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칼릭스 드 라온이었다.

그의 은발은 서리로 하얗게 덮여 있었고, 흑철 쐐기를 쥐었던 양손의 가죽 장갑은 찢겨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가문의 금기인 결빙 비전 마법을 억지로 끌어올린 대가로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푸른 눈동자만은 타오르듯 선명했다.

칼릭스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 엘리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서릿발을 머금은 장검이 바닥을 겨누며 팽팽한 살기를 뿜어냈다.

"늦지 않았군."

낮게 깔린 칼릭스의 목소리가 얼어붙은 석실에 울렸다. 그는 엘리샤의 옷자락과 바닥에 흩어진 파쇄된 룬을 흘끗 훑어보더니,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엘리샤, 물러서라. 여기서부터는 라온의 결투다."

"칼릭스, 잠깐만요! 이건 함정이에요. 당신이 여길 부수고 들어오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고요!"

엘리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는 바닥의 마력 우회로를 가리키려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 2층 감시 난간에서 메마른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짝, 짝, 짝.

철제 난간에 기댄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순백의 황실 제복에 금빛 견장을 두른 사내, 세드릭 폰 아스타르였다. 그의 뒤편 회랑에서는 푸른 로브를 걸친 황실 마법사단 열두 명이 이미 영창을 끝낸 지팡이를 아래로 겨누고 있었다.

세드릭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녹색 눈동자에는 상대를 완전히 옭아맸다는 확신과 잔혹한 만족감이 번들거렸다.

"역시 나타났군, 라온의 맹견."

세드릭이 난간을 짚으며 조소를 흘렸다.

"가문의 금지된 결빙 술식까지 꺼내 들어 아카데미 결투장의 공식 차폐 결계를 박살 낸 꼴이라니. 변명의 여지가 없겠구나."

칼릭스의 검끝이 세드릭을 향해 똑바로 치솟았다.

"비열한 술수를 꾸민 건 네놈이다, 황태자. 결계석 핵에 손을 대고, 무고한 학생을 인질로 삼아 가문을 모함하려 한 죄는 황실이라 해도 덮을 수 없다."

"무고한 학생?"

세드릭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 계집은 외부 세력과 결탁해 결계석을 조작하려다 현장에서 체포된 공범일 뿐이다. 그리고 넌 그 공범을 탈취하고 결계를 무력화하기 위해 황실 시설을 습격한 반역자지. 이 현장을 본 증인이 여기 황실 마법사단 전원이다."

"궤변이다."

"어리석은 놈, 네 손으로 황실의 차폐 결계를 부순 순간 라온 가문의 반역은 완성되었다!"

세드릭의 서슬 퍼런 일갈과 함께, 그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마력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단순한 공격 마법이 아니었다. 미리 지상 결투장의 동쪽과 북쪽 결계석에 심어둔 공명 술식을 강제로 깨우는 신호탄이었다.

"황실 결계를 침범한 반역자 칼릭스 드 라온과 그 하수인을 즉결 처형하라."

세드릭이 허공으로 붉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동시에 중앙 유리 기둥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검붉은 흑마법 촉매가 맹렬한 기세로 맥동하며, 지하 제어실 전체를 집어삼킬 듯 붉은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