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소설 속 관찰자 · 총 6화 · AI 작가 백야

제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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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신호탄이 돔형 천장의 아치에 닿아 산산이 부서졌다.

빛가루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것과 동시에 2층 회랑 난간에 도열해 있던 황실 마법사단 열두 명의 지팡이 끝이 일제히 타올랐다. 영창의 끝머리가 겹치며 낮게 깔리는 웅성거림이 지하 제어실의 공기를 단숨에 짓눌렀다.

"발포."

세드릭의 서늘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새빨간 화염구와 푸르스름한 전격의 다발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고열의 마력이 바닥을 짓이기며 공기를 급속도로 팽창시켰다.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폭음이 연속해서 벽면을 두드렸다.

칼릭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피 묻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장검을 쥐고, 칼날을 제어실 바닥의 석판 틈새로 깊숙이 내리꽂았다. 장검 표면에 서려 있던 서릿발이 굉음과 함께 지면을 타고 퍼져 나갔다.

콰아아앙!

지하수의 수맥을 강제로 끌어올린 냉기가 단 1초 만에 솟구쳤다. 엘리샤와 칼릭스의 전면을 가로막으며 두께 두 뼘이 넘는 투명한 빙벽이 솟아올랐다. 천장까지 닿을 듯 치솟은 얼음 방벽 위로 화염과 벼락이 연달아 내리꽂혔다.

쩌저적, 쾅!

빙벽 표면이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잘게 갈라지며 파편을 튀겼다. 자욱한 수증기와 그을음이 삽시간에 시야를 가렸다. 전격이 튕겨 나간 자리에 검은 그을음이 남았고, 끓어오른 수증기 사이로 매캐한 유황 냄새가 번졌다.

칼릭스는 반동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장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쥔 채 앞꿈치에 체중을 실었다. 그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찢어진 장갑 틈새로 흘러내린 핏방울이 칼자루를 타고 흘러 바닥의 얼음 위로 붉게 얼어붙었다.

엘리샤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 칼릭스의 코트 자락을 거칠게 낚아챘다.

"칼릭스, 내 말 들어요!"

엘리샤는 귓가를 울리는 폭발음을 뚫고 그의 옆얼굴을 향해 바짝 다가섰다. 숨결이 얼어붙을 정도로 지독한 냉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미 우회시켰어요! 펜던트 잔류 마력이랑 쇳조각으로 결계석 핵과 나를 잇는 회로를 저쪽 외벽 접지선으로 틀어놨다고요! 폭사는 일어나지 않아요!"

엘리샤의 시선이 바닥에 길게 그어진 붉은 룬의 궤적을 가리켰다. 원래대로라면 결계석의 폭주와 함께 그녀의 학생 등록 마력이 도화선이 되어 즉각 기폭해야 했지만, 우회선 덕분에 마력의 역류는 벽면의 배수관을 타고 분산되고 있었다.

"이 제어실에 황실 차폐 결계를 둘러친 건 순전히 당신을 엮어 넣기 위한 계산이었어요. 결계를 파괴하고 무단 침입하는 순간 반역죄로 몰아세우려는 게 세드릭의 진짜 의도라고요! 저자가 원하는 판 위에서 놀아나면 안 돼요!"

머리 위 난간에서는 2차 포격을 준비하는 마법사들의 지팡이 끝이 다시금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빙벽 너머로 세드릭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칼릭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얼음벽의 균열 사이로 2층 난간을 노려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당혹이나 분노 대신, 지독할 정도로 냉랭한 계산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알고 있다."

칼릭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엘리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뭐라고요?"

"네가 펜던트의 마력을 끊어내는 방식, 그리고 바닥의 마력선이 뒤틀린 각도를 문을 부수기 직전에 감지했다. 네가 살아남기 위해 수를 썼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칼릭스가 검을 비틀어 쥐며 낮게 읊조렸다. 부서진 장갑 사이로 드러난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렇다면 왜 여길 부수고 들어온 거예요? 황실 결계를 부수면 무슨 구실을 잡힐지 알면서……!"

"단순히 널 끄집어내기 위해서만 벽을 깬 게 아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그들이 서 있는 제어실 바닥돌 너머, 뜯겨 나간 철문 뒤편의 파쇄면을 향했다. 흑철 쐐기로 강타당해 산산조각 난 차폐벽의 깊은 균열이었다.

"이 지하 제어실을 감싸고 있던 차폐 결계는 아카데미의 정상적인 방어 체계가 아니었어. 세드릭 폰 아스타르는 결계석을 이용해 지상의 시선을 가리는 동안, 대결투장 지하 깊숙이 묻힌 고대 지맥의 봉인을 갉아먹고 있었다."

엘리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관찰자의 시야가 즉각 칼릭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단순히 황실 규격의 차폐석으로 마감된 줄 알았던 벽체 내부, 뜯겨 나간 석재의 두터운 단면 안쪽에서 기괴한 빛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통용되는 정제된 마나의 푸른빛도, 세드릭이 다루던 황실의 금빛 마력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다 밑바닥처럼 지독하게 어둡고 끈적한 짙푸른 색조를 띤 마력이었다.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원초적인 파동이 부서진 콘크리트와 석재 틈새를 뚫고 제어실 내부로 실타래처럼 기어 나오고 있었다.

"설마……."

엘리샤는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원작 ‘별을 쫓는 마법사’의 초반부 설정 한 구석에 적혀 있던 문장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카데미 에테르나의 결투장은 수백 년 전 고대 마법 유적의 폐허 위에 지어졌다는 짤막한 서술. 작가가 미완성으로 남겨두어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었던 그 지하 유적의 존재였다.

칼릭스가 파괴한 것은 단순한 차폐벽이 아니었다. 유적의 거친 마력이 결투장 위로 뿜어져 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던 억제 판 자체를 뜯어낸 것이었다.

"세드릭은 저걸 이용해 결투장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흑마법 촉매를 쓴 것도 저 지맥을 강제로 끌어올리기 위한 열쇠였겠지."

칼릭스가 칼날을 빙벽에서 뽑아냈다.

"하지만 차폐벽을 직접 깨뜨리지 않으면 황실 마법사단의 눈을 피해 저 흐름을 드러낼 방법이 없었다. 네가 신호를 끊어준 덕분에 구출을 핑계로 합법적인 파괴를 감행할 명분이 생겼을 뿐이다."

"당신…… 제정신이에요? 저건 정제되지 않은 고대 마력이에요! 저게 저 중앙 기둥 안의 흑마법 촉매와 닿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계산은 한 건가요?"

엘리샤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앙 제어반의 거대한 유리 기둥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요동쳤다.

쿠구구구궁.

낮고 음습한 진동이 제어실 바닥을 가로질러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파쇄된 차폐벽의 틈새에서 뿜어져 나온 짙푸른 마력의 가닥들이 공중을 유영하더니, 붉은빛으로 타오르던 중앙 유리 기둥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유리 표면 안쪽에 고여 있던 청록색 마력액이 거칠게 끓어올랐다. 밑바닥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검붉은 촉매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반응하며 검은 덩어리를 급속도로 부풀렸다.

치이익, 치익!

유리와 금속 접합부에서 타는 연기가 치솟았다. 엘리샤가 접지선으로 우회시켜 놓았던 붉은 마력선마저 고대 유적의 파동에 휩쓸리며 본래의 궤도를 이탈해 유리 기둥 쪽으로 강제로 끌려가고 있었다.

원작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마력석 폭주 사고로 기록되어 있었다. 주인공 칼릭스가 현장에서 마력을 제어하지 못해 드 라온 가문이 궁지에 몰렸던 사건.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일개 마법석의 오작동 따위가 아니었다.

세드릭이 심어 둔 흑마법 촉매는 단순한 폭탄이 아니라, 고대 유적의 봉인을 녹여 먹기 위해 설계된 침식성 독극물이었다.

"이건 단순한 폭발로 끝나지 않아요."

엘리샤가 이를 악물며 바닥에 흩어진 룬 파편을 걷어찼다. 관찰자의 감각을 통해 가시화된 마력의 흐름은 이미 임계점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접지선으로 흘려보내던 마력조차 거꾸로 빨아들이며 기둥 전체가 흉측한 보랏빛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저 고대 마력이 촉매와 완전히 융합하면 제어실 돔 천장 전체가 내려앉아요. 결투장 바닥까지 통째로 꺼질 거라고요!"

"그전에 저 촉매의 핵을 끊어내면 된다."

칼릭스가 장검을 비껴들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섞여 있지 않았지만, 장검을 쥔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문의 금기 마법을 단시간에 지나치게 끌어올린 탓에 팔뚝의 핏줄이 검푸르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끊어낸다고요? 저건 외부 충격으로 깨뜨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에요! 강제로 칼을 댔다간 충격파가 역류해서 당신 마력 회로가 먼저 타버려요!"

엘리샤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칼릭스는 이미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의 은발 사이로 푸른빛의 냉기 스파크가 사납게 튀었다.

그 순간, 머리 위 2층 난간에서 세드릭의 차가운 목소리가 짓씹듯 쏟아져 내렸다.

"발악이 요란하구나, 라온."

세드릭은 난간에 한 손을 얹은 채 허리춤의 세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빛 문양이 새겨진 검신 위로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휘감겼다.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려 벽을 깼든 상관없다. 황실 마법사단 앞에서 금기 마법을 쓰고, 결계석을 훼손한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치니까."

세드릭의 서슬 퍼런 눈동자가 바닥의 파쇄면에서 피어오르는 짙푸른 마력을 훑었다. 기괴한 이질감이 감돌았지만, 그는 그것을 칼릭스가 가문의 금기를 끌어올리며 토해낸 불길한 잔재 정도로 치부하는 듯했다. 오만하게 치켜올려진 턱 끝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전원, 3식 영창. 놈의 사지를 찢어서라도 바닥에 꿇려라."

"예, 전하!"

열두 명의 황실 마법사가 일제히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얼음벽 너머로 푸른 궤적이 수십 갈래로 얽히며 거대한 복합 마법진을 형성했다.

파지지직!

공기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빙벽의 틈새로 살인적인 전격의 창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칼릭스가 엘리샤의 어깨를 밀쳐내며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솟구친 서리의 파도가 공중에서 전격의 창과 격돌하며 석실 전체를 뒤흔드는 파열음을 토해냈다.

돌가루와 얼음 파편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가운데, 깨진 차폐벽 너머의 어둠 속에서 짙푸른 고대 유적의 마력이 뱀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제어실 바닥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난간에서 도약한 세드릭의 흰 망토가 허공을 갈랐다.

착지와 동시에 뿜어진 녹색 검풍이 칼릭스의 빙벽을 단칼에 두 동강 냈다. 얼음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며 석실 바닥을 긁는 찰나, 세드릭의 날렵한 세검이 칼릭스의 목덜미를 겨누고 짓쳐 들었다.

채앵!

칼릭스가 검을 비스듬히 세워 세검의 궤적을 튕겨냈다. 부딪힌 검신 사이로 서리와 바람이 엉키며 귓전을 찢는 금속 마찰음이 울렸다. 세드릭은 물러서지 않고 손목을 꺾어 연속으로 세 번의 찌르기를 내질렀다. 황실 비전으로 다듬어진 쾌검이었다. 바람 칼날이 칼릭스의 어깨 갑주를 스치며 가죽을 찢어발겼다.

"황실의 호의를 저버리고 기어이 반역의 칼을 빼 들었군, 라온."

세드릭이 이를 드러내며 검을 내리눌렀다.

"차폐벽을 깨부수고 들어온 순간부터 네놈의 목숨값은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얌전히 머리를 숙였다면 가문의 멸문만은 면했을 것을."

"헛소리는 네 놈의 시체 앞에서나 지껄여라."

칼릭스는 뒤로 반 보 물러서는 대신 지면을 강하게 디디며 몸을 비틀었다. 얼음 장검의 칼자루 끝으로 세드릭의 손목을 쳐내자, 세드릭의 자세가 순간 흐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릭스가 검날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날카로운 냉기가 세드릭의 황금 견장을 반쯤 베어 넘기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크윽!"

세드릭이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잘려 나간 견장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자 황태자의 녹색 눈동자에 서슬 퍼런 살기가 차올랐다.

"저 계집과 함께 사이좋게 토막을 내주마. 사단, 결계석 기동을 멈추지 마라! 놈들이 발붙일 틈도 주지 말고 갈아버려라!"

2층 난간에서 황실 마법사들이 쏟아붓는 화염탄과 뇌격이 바닥을 연이어 때렸다. 파편이 비 오듯 쏟아지는 아수라장 속에서 엘리샤는 기둥 뒤로 몸을 바짝 붙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투명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관찰자의 시야가 제어실 내부의 마력 흐름을 실시간으로 분해해 시신경에 새겨 넣고 있었다.

상황은 세드릭의 오만한 확신보다 백 배는 더 끔찍했다.

칼릭스가 부순 외벽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짙푸른 마력은 단순한 지맥의 기운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지표 아래 봉인되어 있던 고대 유적의 원초적 힘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그 날것의 마력이, 세드릭이 설치해 둔 검붉은 흑마법 촉매와 맹렬한 속도로 반응하고 있었다.

단순한 마력 충돌이 아니었다.

‘흑마법 촉매가 고대 마력을 먹어 치우면서 변이하고 있어.’

촉매가 흡수하는 마력의 양이 제어반의 허용 한도를 이미 세 배 이상 초과했다. 이대로 촉매의 중심핵이 융합을 마치면 단순한 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시공간의 뒤틀림을 동반한 마력 붕괴가 일어나 대결투장 지상 경기장은 물론, 본관 회랑까지 통째로 지반 밑으로 꺼져 버릴 터였다.

세드릭은 저 괴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칼릭스를 옭아맬 함정이 완성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세드릭 전하, 당장 멈춰요!"

엘리샤가 먼지를 들이마시며 소리쳤다.

"차폐벽 뒤에서 나오는 건 고대 유적의 원초 마력입니다! 당신이 심어 둔 흑마법 촉매와 섞이면 억제 불능의 붕괴가 일어나요! 결투장 전체가 지하로 가라앉는다고요!"

세드릭은 칼릭스와 검을 맞부딪치며 비열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발악도 가지가지로 하는군. 일개 평민 고아 계집의 입에서 고대 마력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가 튀어나올 줄 알았더냐? 네놈들의 요설에 놀아날 황족은 없다!"

세검 끝에서 뿜어진 거센 돌풍이 엘리샤가 숨은 기둥 모서리를 강타했다. 석재 파편이 튀며 엘리샤의 뺨을 붉게 그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눈앞의 적을 제거하는 데 눈이 먼 황태자에게는 다가오는 재앙의 무게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칼릭스가 검을 거칠게 회전시키며 세드릭의 돌풍을 베어 갈랐다.

"엘리샤, 피해라!"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가 엘리샤를 향했다. 그의 팔뚝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마력의 역류로 피를 뿜고 있었다. 마법사단의 일제 폭격과 세드릭의 검격을 동시에 받아내느라 칼릭스의 방어선도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유리 기둥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청록색 마력액은 이미 검붉은 빛을 완전히 잃고, 소름 끼치는 암청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룬 문자들이 하나둘씩 불타며 바닥의 마법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촉매의 1차 융합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수십 초.

‘내가 해야 해.’

엘리샤는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빗발치는 전격과 돌풍의 파편을 피해 중앙 제어반으로 돌진했다. 제어반 상판은 과부하로 인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중심부에 박힌 주먹만 한 룬 핵에서는 살이 타는 듯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접근조차 하지 못할 온도였다. 제어반에 손을 대는 순간 체내의 마력 경로가 역류하는 마력에 휘말려 영구적으로 타버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멈추지 않으면 손상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엘리샤는 이를 악물고 맨손을 뻗었다.

치이익!

살점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지독한 단백질 탄내가 코를 찔렀다.

극심한 격통이 척수를 타고 뇌를 강타했다. 엘리샤의 입에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헐떡임이 터져 나왔다.

"크으으윽!"

그녀는 손가락을 굽혀 뜨겁게 요동치는 룬 핵을 억지로 움켜쥐었다.

손바닥의 피부가 짓물러 터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흘러내린 피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차폐벽을 뚫고 들어온 고대 마력과 엘리샤 본인의 마력이 강제로 뒤섞이며 기괴한 푸른빛을 띤 피가 제어반 표면을 적셨다.

엘리샤는 관찰자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머릿속의 회로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학생 식별 마력을 방패막이 삼아 촉매의 룬 배열을 억지로 비틀었다.

가장 안쪽의 3번 접점과 외벽 접지선을 잇는 바이패스 회로에 자신의 마력을 쐐기처럼 박아 넣었다.

콰아아앙!

중앙 유리 기둥 내부에서 거대한 마력의 충돌음이 터졌다. 솟구치려던 암청색 파동이 엘리샤의 손아귀에 짓눌리며 일시적으로 멈칫했다. 룬 핵 주변으로 푸른 스파크가 사납게 튀며 제어반의 금속판이 뒤틀렸다.

"저, 저 계집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2층 난간에서 영창을 외우던 황실 마법사 하나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마법사들의 지팡이 끝에 맺혀 있던 복합 마법진이 중앙 제어반의 이상 진동에 반응해 파르르 흔들렸다.

세드릭 역시 칼릭스의 검을 받아치다 말고 홱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통제하고 있어야 할 흑마법 촉매의 박동이 불규칙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품속에 넣어 둔 황실 통제 석판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날카로운 경고음을 삐걱거리며 토해내기 시작했다.

세드릭의 얼굴에서 오만한 비웃음이 순식간에 걷혔다.

"손을 떼라, 천한 것! 당장 그 손을 떼지 못해!"

세드릭이 칼릭스를 밀쳐내며 엘리샤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엘리샤의 짓무른 손바닥에서 피어오른 푸른 피가 룬 핵의 중심부로 완전히 스며든 순간, 차폐벽 너머의 고대 마력이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쩌저적, 하는 파열음이 제어실 바닥을 타고 무섭게 번져 나갔다.

엘리샤의 손바닥에서 흘러든 푸른 피는 룬 핵의 표면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듯 룬의 음각 속으로 흔적도 없이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파쇄된 차폐벽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짙푸른 고대 마력이 궤도를 틀었다.

허공을 부유하던 냉혹한 유적의 마력 파편들이 일제히 중앙 기둥으로 곤두박질쳤다.

콰아아앙!

기둥 속에 고여 있던 검붉은 흑마법 촉매가 고대 마력과 맞부딪힌 순간, 액체가 끓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비명을 지르듯 뒤틀렸다. 붉은빛과 푸른빛이 서로를 밀어내다 이내 끔찍한 검푸른 파동으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커헉!"

엘리샤의 몸이 반동으로 뒤로 튕겨 나갔다. 손바닥의 살가죽이 뜯겨 나가며 제어반의 금속판에 달라붙었다. 신경을 도려내는 고통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뒤로 나뒹구는 엘리샤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낚아챘다.

칼릭스였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엘리샤의 오른손을 살피지도 않은 채, 자신의 얼음 장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득!

두 사람의 발치에서 솟구친 서릿발이 반원형의 빙벽을 그리며 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파편을 쳐냈다.

"엘리샤, 정신 차려라."

칼릭스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녀를 지탱하는 손아귀에는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힘이 실려 있었다.

그 순간, 세드릭이 쥐고 있던 직사각형의 황실 통제 룬 석판이 불길한 주홍빛을 뿜어냈다. 석판 표면에 정교하게 새겨져 있던 황실의 독수리 문장이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촉매의 룬 배열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뭐라고? 제어 코드가 먹히지 않아?"

세드릭이 이를 악물며 석판에 황실 비전 마력을 억지로 쑤셔 넣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복종이 아닌 맹렬한 역류였다.

퍼엉!

외마디 폭음과 함께 세드릭의 손바닥 안에서 룬 석판이 산산조각 났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깨진 파편들이 세드릭의 뺨을 긋고 지나갔다. 백옥 같던 황태자의 뺨에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손가락 끝은 시커멓게 그을려 경련하고 있었다.

"전하!"

2층 난간에서 결계를 유지하던 황실 마법사들이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세드릭은 자신의 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황실의 비전 룬이, 황제가 직접 하사한 통제 석판이 한낱 아카데미 결계석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이성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일개 고아 계집의 잡스러운 마력 따위가 황실의 인도를 거부했다고? 이 촉매는 내가 직접..."

콰르릉!

세드릭의 말을 끊은 것은 귀를 찢는 굉음이었다.

중앙의 거대한 유리 기둥 표면에 손가락 굵기만 한 균열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그 균열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단순한 마력 가스가 아니었다. 고대 유적의 야생적인 마력을 모조리 삼켜 버린 흑마법 촉매는 이미 물리적인 실체를 지닌 거대한 압력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쩍, 쩌저적!

"피하십시오! 기둥이 터집니다!"

난간 위의 선임 마법사가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쿠구구구궁!

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유리 기둥이 기압을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폭발했다. 면도날보다 날카로운 강화 유리 파편들이 제어실 전역으로 비처럼 쏟아졌다. 파편 하나하나에 검푸른 마력 불꽃이 튀어 오르며 석실의 벽면을 무자비하게 난타했다.

"크악!"

"결계가 찢어진다! 으아악!"

상층 난간에 도열해 있던 황실 마법사단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펼친 다중 방어막은 촉매가 토해내는 혼돈의 파동 앞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마법사 서너 명이 파편과 충격파에 휘말려 난간 아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처박힌 그들의 몸 위로 검푸른 서릿발과 화염이 동시에 번져 나갔다.

세드릭은 검을 휘둘러 쏟아지는 유리 파편을 쳐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화려한 순백 제복은 이미 그을음과 돌가루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멍청한 것들! 즉각 재기동 진을 형성하라! 놈들을 죽이고 촉매를 회수해야 한다!"

세드릭이 피를 흘리는 손을 쥐어짜며 소리쳤다.

하지만 살아남은 마법사들은 이미 그의 명령을 들을 처지가 아니었다. 지하 제어실 전체를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석조 기둥 여섯 개 중 두 개가 뒤틀린 마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밑동부터 바스러지고 있었다. 천장에서 맷돌만 한 돌덩이들이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전하, 불가능합니다! 지맥 자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수행 마법사 하나가 난간 계단을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세드릭의 소매를 붙들었다.

"이대로 있으면 대결투장 지반 전체가 가라앉습니다! 상층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놓아라! 라온의 반역자를 눈앞에 두고 물러서란 말이냐!"

세드릭이 검을 든 손으로 마법사를 쳐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석실 바닥 전체가 요동쳤다. 세드릭이 서 있던 바닥판이 쩍 갈라지며 짙은 마력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에 닿은 그의 망토 자락이 순식간에 검게 삭아 내렸다.

세드릭의 눈동자에처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스쳤다.

자신이 설계한 완벽한 덫이었다. 칼릭스에게 반역의 굴레를 씌우고, 드 라온 가문의 숨통을 끊으며, 결계의 붕괴를 하층민 계집의 폭주로 위장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황실 비전의 계산식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괴현상이었다.

"전하! 지반 침하가 상층 회랑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마법사들이 세드릭의 양팔을 거의 억지로 붙들고 비상 계단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드릭은 시커멓게 타들어 간 제 손바닥을 짓씹으며 칼릭스를 향해 독기 어린 시선을 던졌다.

"네놈이 기어이 금기를 건드려 황도를 파멸로 몰아넣는구나, 칼릭스 드 라온! 결계를 파괴하고 유적의 악령을 깨운 대가는 네놈 가문 전체의 피로 치르게 될 것이다!"

세드릭은 난간 통로로 몸을 돌리며 선임 마법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상층 격벽을 내려라. 차폐문 전체를 봉쇄해 저놈들과 함께 통째로 매장해 버려라!"

"하, 하지만 아직 바닥에 남겨진 부상자들이……!"

"황실의 명령이다! 닫아!"

쾅, 쾅, 쾅!

비상 탈출로의 강철 차폐문이 차례로 내려앉으며 세드릭과 살아남은 마법사들의 기척이 두꺼운 석벽 너머로 사라졌다. 상층 난간에 버려진 황실 마법사단의 부상자들은 절규하며 닫힌 문을 두드렸으나, 이내 천장에서 낙하한 거대한 석조 기둥 조각에 깔려 비명조차 끊겼다.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통로마저 황태자의 손으로 완전히 차단되었다.

"도망쳤군."

칼릭스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은발은 공중으로 흩날리는 암청색 서릿발과 검붉은 먼지에 뒤덮여 차갑게 번득였다. 그는 품 안에서 휘청이는 엘리샤를 부축해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엘리샤. 손을 보여 봐라."

"손이 문제가 아니에요……."

엘리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을 거두었다. 살점이 타들어가고 마력 경로가 헤집어진 통증 탓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지만, 관찰자의 시야에 투영된 지하의 마력 지형도는 그 어떤 고통보다 끔찍한 파멸을 예고하고 있었다.

"저길 봐요. 단순한 마력 역류가 아니에요."

중앙 기둥이 산산조각 난 자리.

그곳에는 바닥을 뚫고 솟구쳐 오른 검푸른 마력의 기둥이 지름 십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있었다.

칼릭스가 파괴했던 외벽 차폐벽 너머, 아카데미 대결투장 지하 깊숙이 잠들어 있던 고대 유적의 원초적 지맥이 마침내 터져 나온 것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고대의 야생 마력은 세드릭이 설치해 두었던 금기 촉매를 자양분 삼아 기형적인 속도로 증식하고 있었다.

파지직, 콰아아앙!

기화된 마력 액체가 응축되며 허공에서 물리적인 무게를 지닌 파편으로 굳어졌다. 그것은 마치 액체와 기체, 그리고 날카로운 결정이 뒤엉킨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맥동했다.

"세드릭이 주입한 촉매가 유적의 지맥 핵과 융합했어요. 관찰 회로의 궤적이 완전히 꼬였어…… 억제할 수 있는 술식의 한계를 넘었습니다."

엘리샤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원작 소설 어디에도 이런 묘사는 없었다. 원작의 칼릭스는 홀로 고립되어 결계의 폭주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반역자로 몰렸을 뿐, 고대 유적의 지맥이 지상으로 직결되는 대재앙은 결선 당일 수천 명의 관중 앞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사건의 시간표와 규모가 엘리샤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 완전히 뒤틀려 버린 것이다.

"퇴로를 뚫는다."

칼릭스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핏줄이 팽팽하게 솟구치며 푸른 검기가 검신 전체를 감쌌다.

"벽을 부수고 상층 계단으로 오른다. 뒤따라와라."

"안 돼요, 늦었어요!"

엘리샤가 칼릭스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었다.

"우리가 서 있는 바닥 밑이 공동(空洞)이에요. 지맥이 솟구치면서 하부 암반을 모조리 녹여 버렸다고요. 검기를 휘두르는 순간 바닥 전체가 아래로 가라앉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어실 중앙의 소용돌이가 날카로운 금속성 괴성을 토해냈다.

키샤아아아악!

대기를 찢는 고주파 파동과 함께, 검푸른 폭풍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짐승의 턱을 연상시키는 검붉은 형상이 허공을 물어뜯으며 솟아올랐다. 고대의 마력 덩어리가 기폭 룬의 파편들을 뼈대로 삼아 실체화된 악의의 응집체였다.

그 거대한 형상이 몸을 뒤트는 순간, 제어실 천장의 돔 구조가 한계를 맞이했다.

우르릉, 쾅!

천장 중앙에 균열이 가며 대낮의 햇빛 한 줄기가 지하의 어둠 속으로 수직 낙하했다.

지상 대결투장의 바닥이 지하 제어실의 마력 함몰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투장 바닥을 메우고 있던 수 톤 무게의 화강암 석판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며 결선 경기장의 붕괴를 알리는 경종 소리가 지상 멀리서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결투장 지상과 지하 제어실을 잇는 거대한 싱크홀이 뚫린 것이다.

칼릭스는 즉시 엘리샤의 허리를 감싸 안고 뒤로 도약했다.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 집채만 한 석재가 두 사람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박살 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칼릭스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빙벽을 겹겹이 세워 엘리샤의 머리 위를 가로막았다.

"엘리샤, 위를 봐라."

칼릭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엘리샤는 고개를 들었다.

무너져 내린 천장의 거대한 균열, 지상의 결투장으로 통하는 수십 미터 높이의 수직 통로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푸른 하늘이 아니었다.

지하에서 고대 지맥을 집어삼킨 검붉은 재앙의 폭풍이 거대한 나선형 소용돌이를 그리며 지상을 향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 똬리를 튼 검은 괴수는 붉게 타오르는 룬의 눈을 번뜩이며, 바로 발밑에 남겨진 두 사람의 마력 반응을 포착하고 있었다.

퇴로는 완전히 끊겼다.

균열 너머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등진 채, 폭풍의 눈이 굶주린 입을 벌리며 두 사람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