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드릭의 서늘한 손짓 하나에 허공을 메운 거대한 마법진 열두 개가 일제히 붉은빛으로 타올랐다.
원로원 심판관 열두 명의 지팡이 끝에서 굵직한 번개 줄기가 번뜩였고, 곧이어 고열을 머금은 주홍색 화염 덩어리들이 벼락과 뒤엉켜 대결투장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 지표면의 공기가 순식간에 데워지며 숨이 턱 막히는 열풍이 불어 닥쳤다.
칼릭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파열된 근육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든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검을 결투장 바닥에 박아 넣었다.
“얼어붙어라.”
칼릭스의 입술 사이로 낮게 울린 한마디와 함께, 바닥에 균열이 생기며 두터운 빙벽 여섯 겹이 부채꼴 형태로 솟구쳐 올랐다. 가문의 비전 결빙 마법이었다. 지맥 괴수의 핵을 관통하느라 마력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음에도 얼음 장벽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냉기를 내뿜었다.
곧이어 귓청을 찢는 폭음이 경기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쾅, 콰아아앙!
원로원의 번개와 화염이 빙벽의 겉면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녹아내린 얼음 물줄기가 맹렬한 증기를 뿜어내며 허공을 뿌옇게 가렸다. 하지만 열두 명의 고위 마법사가 합을 맞춘 합동 포격은 단순한 충격파로 끝나지 않았다. 붉은 번개가 얼음 표면을 파고들며 빙벽의 근간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칼릭스의 턱 끝으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얼음을 유지하는 오른팔의 핏줄이 푸르스름하게 부풀어 올랐다.
“큭……!”
“칼릭스, 버텨요! 빙벽의 중심을 유지하면 뚫려요!”
엘리샤가 칼릭스의 등 뒤에서 외쳤다. 시야에 푸른 궤적들이 격자 모양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관찰자의 감각이 원로원이 쏟아내는 마력의 흐름을 낱낱이 분해해 망막 위에 띄워 올렸다.
일반적인 마법 폭격이 아니었다. 열두 개의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선들은 일직선으로 꽂히는 대신, 좌우 칠십오 도 각도로 뒤틀리며 나선형으로 굴절되고 있었다. 지표면에 닿는 순간 충격을 증폭시키는 황실 원로원 특유의 비선형 관통 술식이었다. 이대로 정면에서 얼음으로만 받아내다가는 바닥의 지지 기반이 먼저 무너져 내릴 판이었다.
“왼쪽 세 번째 쐐기를 서른 도 바깥으로 꺾어요! 바닥 지지선에 충격이 쏠리고 있어요!”
엘리샤의 목소리가 폭발음 사이를 꿰뚫었다.
“오른쪽은 마력이 얇아요! 접지점을 뒤로 반 보 물려요! 굴절 궤적을 바깥쪽으로 흘려보내야 방벽이 깨지지 않아요!”
칼릭스는 단 반 초의 망설임도 없이 검자루를 틀어쥐었다. 그의 발밑에서 서리가 회오리치며 엘리샤가 짚어낸 방향으로 얼음 기둥 두 개가 비스듬히 뻗어 나갔다.
콰직!
접지 각도가 틀어지는 순간, 빙벽 중심부를 맹렬하게 갉아먹던 번개 줄기들이 빗겨 난 얼음 표면을 타고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빗나간 화염과 전격이 결투장 외곽의 빈 관중석을 무너뜨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원로원의 1차 집중 포격이 칼릭스의 빙벽을 뚫지 못하고 허망하게 사그라들었다.
증기 사이로 드러난 칼릭스의 빙벽은 겉면이 까맣게 그을렸을 뿐,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로원 심판관들의 영창이 일순간 끊겼다. 마법사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황실 원로원의 합동 포격을, 그것도 지맥 괴수와 사투를 벌이고 올라와 기진맥진한 두 사람이 완벽하게 흘려내리라고는 계산에 없었던 탓이다.
“저것들이……!”
세드릭의 눈썹이 꿈틀했다. 여유롭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칼릭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검을 다시 세웠다. 엘리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엘리샤는 칼릭스의 등 뒤에서 걸어 나와,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손바닥 안에는 흑마법 촉매의 열기에 그을려 거뭇해진 석판 조각이 들려 있었다. 지하 제어반이 파괴될 때 세드릭의 손에서 튕겨 나갔던 통제 석판의 중심 파편이었다.
“원로원 심판관님들, 이 석판에 박힌 황실 비전 룬을 직접 보고도 저자의 모함을 믿으실 겁니까?”
엘리샤의 목소리가 흙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한 결투장 위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수석 심판관의 시선이 엘리샤의 손끝으로 쏠렸다.
석판의 깨진 단면 속에서 번쩍이는 것은 평범한 마법석이 아니었다. 황실 직속 마법사들만이 사용하는 특수한 백금 합금 회로, 그리고 그 중심에 뚜렷하게 음각된 아스타르 황가의 상징 문장이었다. 문양 주변으로는 흑마법 촉매를 억지로 통제하기 위해 새겨 넣은 이중 나선형 룬이 여전히 검붉은 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저 문양은…… 황태자 전하의 직속 인장?”
대열 맨 앞자리에 서 있던 노마법사의 입술 사이로 당황 섞인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심판관들 사이에 술렁임이 번져 나갔다. 그들은 세드릭의 명령에 따라 칼릭스를 반역자로 처단하러 왔으나, 정작 반역의 증거라며 들이밀어진 물건에는 황태자의 룬이 깊게 박혀 있었다.
“지하 결계석을 조작해 폭발을 유도하고, 고대 지맥의 봉인을 뜯어내 흑마법 괴수를 불러낸 건 칼릭스가 아닙니다!”
엘리샤는 석판을 높이 든 채 심판관들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 석판으로 흑마법 촉매를 기동시킨 장본인은 세드릭 폰 아스타르 전하입니다! 지맥 괴수가 통제를 벗어나자마자 상층 격벽을 닫아걸고 혼자 도망친 비겁자가, 이제 와서 자신을 구하고 올라온 이들을 입막음하려 포격을 퍼붓고 있는 겁니다!”
말끝마다 힘이 실려 있었다.
원로원 심판관들의 지팡이 끝에서 일렁이던 살상용 룬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몇몇 마법사는 지팡이를 슬그머니 내리며 세드릭의 얼굴을 살폈다. 황태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나, 흑마법을 사용해 고대 유적의 지맥을 건드렸다는 물증 앞에서는 원로원이라 해도 맹목적으로 칼을 휘두를 수 없었다.
세드릭의 얼굴에서 침착한 가면이 완전히 벗겨졌다.
그의 입술이 비틀리며 가늘게 떨려 나왔다.
“추잡한 요설을 지껄이는군. 드 라온 가문의 끄나풀 주제에, 어디서 주워 온 파편 따위로 황실을 능멸하려 드느냐.”
세드릭은 노골적인 멸시를 쏟아내며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녹색 눈동자 속에는 당혹감이 아닌, 비정상적으로 차가운 살의가 차올라 있었다.
“그 파편을 끝까지 쥐고 있을 줄은 몰랐다만…… 멍청한 것.”
세드릭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탁.
작은 마찰음이 울린 순간, 엘리샤가 쥐고 있던 석판 파편 내부에서 기괴한 고음의 파동이 솟구쳐 올랐다.
손바닥을 뚫고 들어온 열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치익, 살갗이 익는 소리와 함께 쥐고 있던 석판 파편에서 핏빛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표면에 새겨진 황실 문양 안쪽에서 또 다른 은닉 마법진이 껍질을 벗듯 드러나고 있었다.
칼릭스가 즉각 반응했다. 검을 비껴 쥐며 엘리샤의 손목을 쳐내려 했다.
“버려라, 엘리샤!”
“안 돼요!”
엘리샤는 칼릭스의 검날이 닿기 직전, 몸을 비틀어 석판을 품 쪽으로 끌어당겼다.
손바닥 피부가 석판 표면에 녹아붙는 감각이 생생했다. 지하 제어반을 억지로 틀어쥐었을 때 입었던 화상 위로 다시금 불길이 쏟아져 내리는 꼴이었다. 하지만 손을 놓는 순간 세드릭이 원하던 그림이 완성된다. 허공으로 던져진 석판이 공중에서 폭발해 산산조각 나면, 황실의 개입을 증명할 유일한 물리적 실체는 영원히 잿더미로 사라진다.
세드릭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심판관들을 향해 손을 뻗어 외쳤다.
“보았는가! 드 라온 가문의 하수인이 증거를 인멸하고 원로원 심판관들까지 한꺼번에 말려 죽이려고 자폭 마법을 기동했다!”
“전하, 저것은……!”
수석 심판관이 핏빛으로 팽창하는 석판의 빛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망설일 틈이 없다! 지하에서 괴수를 불러낸 흑마법 촉매를 저 계집의 몸속에 심어둔 것이다. 저 마력이 결투장 지맥과 다시 이어지면 이번에야말로 아카데미 전체가 가라앉는다! 전원, 2차 집중 포격! 저 역적 무리를 형체도 남기지 말고 소각하라!”
세드릭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당당했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엘리샤를 똑바로 꿰뚫었다. 입술만 달싹이며 전해오는 조롱이 시야에 박혔다.
그 하찮은 파편을 끝까지 쥐고 지상으로 올라와 줄 줄 알았다, 멍청한 계집.
석판 내부에 새겨진 것은 단순한 통제 장치가 아니었다. 세드릭은 지하 제어실이 함락되거나 파편이 회수될 최악의 상황까지 계산해, 처음부터 원격 자폭 기폭식을 이중으로 숨겨두었던 것이다.
우웅, 하는 굉음과 함께 열두 명의 심판관들이 지팡이를 일제히 치켜들었다.
동요하던 노마법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들어찼다. 지맥 폭주라는 단어 하나에 이성을 잃은 자들은 엘리샤의 품에서 번져가는 붉은빛을 흑마법의 기폭 신호로 확신했다. 열두 개의 지팡이 끝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진홍색 마법진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원로원의 최종 섬멸 주문인 염옥의 번개였다.
칼릭스가 엘리샤의 앞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오른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검 자루를 타고 흘러 바닥을 적셨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는 한 점 흐림 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엘리샤, 당장 던져라. 네 목숨보다 중요한 물증 따위는 없다.”
“이걸 놓치면 끝이에요.”
엘리샤는 이를 악물었다. 관찰자의 감각이 뇌수를 찌르듯 번쩍이며 석판 내부의 회로를 낱낱이 분해해 보여주고 있었다.
붉은빛의 핵은 엘리샤의 체내 마력선과 강제로 얽혀 있었다. 지하에서 룬 핵을 맨손으로 쥐어뜯었을 때 묻었던 그녀의 혈흔과 마력 찌꺼기가 자폭 장치의 매개체로 작동하고 있었다. 지금 손을 떼더라도 마력선이 끊어지는 충격으로 석판은 즉시 기폭하고, 엘리샤의 흉곽 역시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갈 터였다.
버릴 수도 없고, 쥐고 있을 수도 없는 외통수였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폭식의 기폭선은 세 갈래다. 세드릭의 황실 원격 신호가 들어오는 입력단, 내 체내 마력을 빨아들이는 흡수단, 그리고 흑마법 잔류 찌꺼기가 모이는 팽창단.’
엘리샤는 관찰자의 시야로 핏빛 광선의 박동 간격을 쟀다.
1.2초마다 한 번씩 마력이 팽창했다가 수축한다. 세드릭이 원격으로 보낸 신호가 석판 중심부를 때릴 때마다 회로의 과부하가 30퍼센트씩 치솟고 있었다. 세 번째 박동이 끝나면 폭발이다.
남은 시간은 2초 남짓.
“칼릭스, 날 보지 말고 위를 막아요!”
엘리샤는 왼손을 뻗어 석판의 가장 날카로운 파편 모서리를 자신의 오른손 손목 안쪽에 찔러 넣었다.
푸욱 하는 둔탁한 감각과 함께 피가 솟구쳤다. 극심한 통증이 팔 전체를 마비시켰지만, 엘리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의 방향을 강제로 비틀었다.
피를 흘려 마력의 압력을 인위적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다. 체내 마력이 석판으로 빨려 들어가는 유속이 급격히 줄어들자, 폭발 직전까지 부풀어 오르던 핏빛 구체가 일순간 일렁이며 팽창을 멈췄다.
“저 계집이 결계를 교란하고 있다! 쏴라!”
세드릭의 날카로운 호통이 결투장을 찢었다.
쿠구구궁!
원로원 심판관들의 지팡이에서 마침내 2차 집중 포격이 쏟아져 내렸다. 대기를 녹여버릴 듯한 열기를 품은 번개 줄기들이 결투장 상공을 붉게 물들이며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엘리샤의 손안에 든 석판이 한계에 도달해 백색에 가까운 섬광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외부에서는 열두 갈래의 절멸 마법이, 내부에서는 뼛속까지 태워버릴 자폭의 마력이 동시에 덮쳐오는 순간이었다.
칼릭스의 검날이 짙푸른 서리를 뿜으며 허공을 갈랐다. 엘리샤를 덮치려던 내부의 폭발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번개를 향해,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심장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드 라온 가문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칼릭스의 몸에서 터져 나온 냉기는 결투장의 공기 자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단순한 결빙이 아니었다. 드 라온 가문에서 대대로 계승을 금기시하며 깊숙이 봉인해 두었던 마력 쐐기, 생명력과 영혼의 열기까지 통째로 깎아내려 물질의 움직임을 강제로 정지시키는 극저온의 파동이었다.
투두둑, 굵은 핏방울이 칼릭스의 찢겨나간 오른쪽 소매를 타고 쏟아져 내렸다. 오른팔 안쪽의 마력선 세 줄기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한꺼번에 파열된 탓이었다. 살점이 터져 나간 자리에서 흘러내린 피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파랗게 굳어 서리 조각으로 바스러졌다.
엘리샤는 칼릭스가 딛고 선 발치에서 번져 나가는 냉기의 농도를 보며 계산을 끝냈다.
‘심장 마력의 절반을 그대로 태웠어.’
가문 비전의 결함을 알고 있던 엘리샤의 머릿속에 냉혹한 손익 계산서가 펼쳐졌다. 저 마법은 한 번 펼칠 때마다 시전자의 수명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외부의 절멸 번개와 내부의 자폭 공명을 한꺼번에 끊어낼 방법은 오직 저것 하나뿐이었다.
칼릭스가 검을 거꾸로 쥐고 엘리샤의 발치에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결투장 바닥의 석판들이 솟구치며 칼릭스와 엘리샤의 머리 위로 두께 삼 척이 넘는 푸른 빙벽이 겹겹이 솟아올랐다. 원로원 심판관 열두 명이 토해낸 붉은 벼락들이 빙벽의 상단을 직격했다. 하늘이 갈라지는 굉음과 함께 붉은 화염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마력선이 뒤틀려 굳어버린 빙벽은 단 한 치도 뚫리지 않았다. 쏟아져 내리던 번갯불마저 차가운 서리에 짓눌려 허공에서 고체처럼 굳어버린 채 파열음을 냈다.
동시에 칼릭스의 왼손이 엘리샤의 피투성이 손목을 낚아챘다.
“네 피 한 방울도 헛되이 터지게 두지 않는다.”
낮게 깔린 칼릭스의 음성에는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쥐고 있어라.”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시퍼런 한기가 엘리샤가 쥐고 있던 통제 석판의 틈새로 사납게 파고들었다. 엘리샤의 손목을 타고 들어가던 마력 화상이 일순간 멈췄다.
파지직, 쩡!
석판 중심부에서 백색 섬광을 내뿜으며 터져 나가려던 핏빛 구체가 얼음 송곳에 꿰뚫린 듯 멈칫했다. 칼릭스의 냉기가 자폭식의 세 갈래 기폭선을 가차 없이 짓눌렀다. 팽창하던 흑마법 찌꺼기가 꽁꽁 얼어붙고, 엘리샤의 혈액을 빨아들이던 흡수단 회로가 유리처럼 바스러졌다.
원격 신호를 보내 폭발을 유도하던 세드릭의 마력 입력단만이 유일하게 얼어붙은 회로를 타고 거꾸로 튕겨 나갔다.
급속 동결된 마력의 강제 역류였다.
“크윽!”
결투장 저편, 결계 밖에서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던 세드릭이 별안간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황태자 전용 지휘봉의 보석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더니, 귓가에서 타닥거리며 불꽃이 튀었다. 원격 제어 회선이 절대 영도의 냉기에 직격당해 시전자에게 반동을 뿜어낸 것이다.
“전하!”
원로원 심판관들이 경악하며 세드릭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세드릭을 엄호할 틈도 없이, 동결된 석판의 역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갈 곳을 잃고 솟구친 방대한 양의 황실 암호 마력이 칼릭스의 빙벽을 뚫고 결투장 상공으로 분수처럼 치솟았다. 엘리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냉기와 세드릭의 붉은 통제 신호가 허공에서 뒤엉키며 거대한 마력의 막을 형성했다.
치이익 하는 파열음과 함께, 결투장 하늘 전체에 거대한 빛의 글귀와 회로도가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그것은 석판에 기록되어 있던 세드릭 폰 아스타르의 황실 인장, 그리고 지하 지맥 결계석을 조작해 마력 괴수를 유도했던 상세한 제어 로그였다. 시간대별로 기록된 지맥 방출 명령과 흑마법 촉매 투입의 승인 코드, 황태자 직속 인장의 서명까지 티끌 하나 없이 결투장 상공에 박제되어 흩뿌려졌다.
결투장 주변을 메우고 있던 수백 명의 학생들과 기사단, 그리고 마법을 쏘아대던 열두 명의 원로원 심판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쏠렸다.
“저, 저 문양은…….”
“황태자 전하의 사설 암호식이다! 저건 외부에서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원로원 마법사들의 지팡이 끝에서 맴돌던 마력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드 라온 가문의 칼릭스가 괴수를 소환해 경기장을 파괴했다는 세드릭의 주장은 순식간에 거짓이 되었다. 저 공중에 떠오른 로그는 경기 시작 사흘 전부터 대결투장 지하에 흑마법 촉매를 심어 넣고 지맥을 강제로 파열시킨 주동자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가리키고 있었다.
세드릭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던 금발이 식은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오만하게 치켜올려졌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거짓이다! 저건 드 라온의 마법검사가 꾸며낸 환각이다! 쏴라! 즉시 저 반역자들을 가루로 만들어라!”
세드릭이 목을 긁는 비명을 질렀지만, 원로원 심판관들은 누구 하나 지팡이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황실 직속 법령에 따라 각인된 절대 증거가 온 세상에 펼쳐진 이상, 더 이상의 공격은 대역죄의 공범이 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망설이지 말고 결계를 쳐부수어라!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세드릭이 피를 토하듯 고함을 지르며 손에 쥔 부러진 지휘봉을 내던졌다. 하지만 심판관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주저함만이 가득했다. 황실 원로원은 황제의 안위를 지키는 방패이자 법의 감시자였다. 황족의 명이라 해도 대륙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고대 지맥 훼손의 현장 기록 앞에서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엘리샤는 얼어붙은 석판을 가슴에 바짝 끌어안았다. 손목을 타고 번지던 극심한 화상과 칼릭스의 혹한이 뒤섞여 살갗은 이미 무감각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맑고 서늘한 눈동자는 세드릭의 일그러진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더 이상 발뺌할 길은 없습니다, 전하. 이 기록석은 당신의 인장 마력과 지하 지맥의 시간선이 그대로 맞물려 있어요. 드 라온 가문이 아니라, 당신이 아카데미 학생 수천 명의 목숨을 담보로 괴수를 불러낸 범인입니다.”
엘리샤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침묵에 잠긴 결투장 전체에 뚜렷하게 메아리쳤다.
칼릭스는 검을 땅에서 뽑아 들지 않았다. 오른팔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빙벽 하단을 붉게 적셨지만, 서릿발 같은 그의 푸른 눈동자는 세드릭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황태자. 네가 벌인 추악한 연극은 여기서 끝이다.”
“입 닥쳐라! 천한 반역자의 핏줄 주제에 감히……!”
세드릭이 품에서 호신용 단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짓쳐 나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웅—
하늘 한가운데에서 나직하지만 결투장 전체의 공기를 짓누르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지를 흔들던 폭풍도, 원로원 마법사들의 술렁임도 일순간 정지했다. 결투장 상공에 쳐져 있던 삼중 차단 결계의 상단부가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갈라지며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차원의 장막이 찢겨 나가는 자리에서 은색과 금색의 마력 사슬이 쏟아져 내렸다.
어떤 마법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득한 위압감. 지상에 흩어져 있던 돌가루들이 중력을 잃고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찢어진 하늘 너머로 두 개의 거대한 시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아카데미 에테르나의 최고 권위자이자 대현자로 불리는 학장의 지혜로운 마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실 최고 재판관의 상징인 저울 문양을 품은 심판의 감시안이었다.
“황실의 인장과 고대 금기 지맥의 훼손.”
하늘에서 쏟아지는 목소리는 결투장 바닥의 흙먼지까지 짓눌렀다.
“모든 영창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라. 에테르나의 규율과 제국의 법에 따라, 이 자리에 선 모든 자의 마력을 봉인한다.”
거대한 사슬이 결투장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세드릭과 심판관들, 그리고 빙벽을 두른 칼릭스와 엘리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드릭의 낯빛이 잿빛으로 변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