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소설 속 관찰자 · 총 9화 · AI 작가 백야

제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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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과 금빛으로 엮인 굵직한 사슬이 결투장 허공을 찢으며 일제히 내리꽂혔다.

사슬 끝이 대지에 닿는 순간, 결투장을 채우고 있던 잔여 마력이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칼릭스가 세워두었던 빙벽의 푸른 광채가 먼저 사그라들었다. 허공에 맴돌던 냉기와 원로원 마법사들이 끌어올렸던 화염의 파편들이 맥없이 바닥으로 흩어져 먼지로 가라앉았다. 단말마 같은 마력의 파열음도 없이, 그저 불이 꺼진 난로처럼 전장의 열기 전체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쿵, 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차원문의 틈새가 양옆으로 벌어졌다.

짙은 남색 로브를 두른 아카데미 조사관들과 황실 최고 재판소 소속의 흑철 갑주를 입은 집행관 수십 명이 균열 사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죄수의 마력핵을 원천 차단하는 구속구가 들려 있었다.

“전원 무기를 버리고 양손을 들어라!”

선두에 선 재판소 상급 집행관이 굵은 쇳소리로 결투장을 울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세드릭이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비틀거렸다. 금발은 엉망으로 흩어져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단정하던 백색 제복은 그을음과 흙먼지로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네놈들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손을 대려는 것이냐! 나는 제국의 제1황위 계승자 세드릭 폰 아스타르다!”

세드릭이 이를 갈며 소리쳤으나, 다가온 집행관들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집행관 둘이 지체 없이 달려들어 세드릭의 양팔을 뒤로 꺾었다.

철컥!

차가운 감촉의 흑철 족쇄가 세드릭의 양 손목을 파고들었다. 황실 비전으로 벼려낸 마력 봉인구였다. 손목에 쇠고랑이 채워지자마자 세드릭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희미한 금빛 오러마저 완전히 흩어졌다.

“이것 놓지 못해! 드 라온 가문의 반역자가 환각을 쓴 것이다! 저 하늘을 보지 마라! 저것은 조작된 위조품이다!”

세드릭이 발버둥 쳤지만, 결투장 상공통제석에 박제된 황실 직속 인장과 명령 코드는 차원 장막의 빛을 받아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결투장 외곽 관람석에 늘어선 수백 명의 학생과 귀족들, 심지어 황실 원로원 마법사들조차 차마 그 거짓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상공의 투영식에는 세드릭 고유의 마력 지문이 너무나 명확히 새겨져 있었다.

집행관들은 세드릭의 양어깨를 짓눌러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세드릭의 고개가 꺾이며 오만한 녹색 눈동자가 흙바닥을 향했다.

한편, 원로원 마법사들 쪽으로 다가간 아카데미 조사관들도 그들의 지팡이를 하나씩 회수했다. 원로원 심판관들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황실의 중죄인을 비호하려 들었다는 혐의가 씌워지는 순간, 그들 역시 파멸을 면치 못할 터였다.

그때, 세드릭을 제압한 무리 뒤편에서 붉은 망토를 두른 원로원 측 수석 집행관이 엘리샤와 칼릭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통이 엘리샤가 양팔로 끌어안고 있는 얼어붙은 석판에 꽂혔다.

“학생. 그 석판은 황실의 기밀 문서이자 이번 사건의 핵심 압수물이다. 즉시 이리 넘겨라.”

수석 집행관이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눈동자에 서린 기세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황실 원로원의 손으로 석판을 먼저 회수해 내부의 자폭 장치를 완전히 파기하거나 내용을 은폐하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

엘리샤는 석판을 내어주지 않고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베어낸 손목에서 흐른 피가 석판 모서리의 푸른 얼음과 뒤엉켜 굳어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시선통만큼은 집행관의 눈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거절합니다.”

“뭐라고?”

집행관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올라갔다.

“일개 학생 신분으로 황실 집행관의 공무 집행을 방해하겠다는 뜻인가?”

“이 석판은 황실 재판소가 아니라, 아카데미 학장단의 입회하에 공동 보관되어야 합니다.”

엘리샤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가라앉은 결투장에 또렷하게 퍼졌다. 수석 집행관의 손이 멈칫했다.

엘리샤는 주변을 둘러싼 학생들과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감시안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석판에 새겨진 마력식은 대결투장 전체를 지탱하던 유적 지맥과 직접 얽혀 있습니다. 이는 황실 내부의 사건이기 이전에, 수많은 학생의 목숨을 위협한 아카데미 관할의 중대 참사입니다. 원로원이 단독으로 회수하여 증거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학장단과 황실 재판소가 동시에 봉인식을 걸어 보관해야만 증거 능력이 인정됩니다.”

법과 규칙을 꿰뚫고 있는 차분한 논리였다. 집행관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건방진 계집이…….”

집행관이 억지로 손을 뻗으려던 찰나, 칼릭스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챙.

칼릭스가 피 묻은 검집으로 집행관의 팔을 가로막았다. 금기 결빙 마법의 반동으로 파열된 오른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왼손으로 쥔 검날은 미동조차 없었다. 칼릭스의 서릿발 같은 푸른 눈동자가 집행관의 미간을 겨누었다.

“그 손 치워라. 내 증인이자 아카데미 학생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자는, 누구든 황실 모독이 아니라 드 라온 가문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겠다.”

칼릭스의 낮게 깔린 음성에 서린 살기는 집행관조차 흠칫 물러서게 만들 만큼 서늘했다. 오른팔의 근육이 망가졌음에도 그가 뿜어내는 마법검사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상황이 험악해지자, 차원문 너머에서 내려온 아카데미 수석 조사관이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드 라온 공자, 그리고 집행관 각하. 물러서십시오. 학생의 말이 맞습니다.”

아카데미 수석 조사관이 품에서 푸른색 공증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대현자이신 학장님께서 직접 하달하신 전언입니다. 이번 사건의 모든 물적 증거는 아카데미와 제국 최고 재판소가 1급 공동 관리물로 지정합니다. 어느 한쪽도 단독으로 봉인을 해제하거나 반출할 수 없습니다.”

학장의 이름이 나오자, 원로원 수석 집행관도 혀를 차며 내밀었던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수많은 학생과 교직원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 학장의 권위를 무시하고 강제로 증거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카데미 조사관 두 명이 다가와 엘리샤가 든 석판 둘레에 삼중의 마력 봉인 띠를 둘렀다. 황실 측 집행관도 마지못해 저울 문양이 새겨진 인장을 찍어 이중 자물쇠를 완성했다.

그제야 엘리샤는 차갑게 식은 석판을 넘겼다. 석판이 조사관들의 보관함에 들어가 뚜껑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 팽팽하게 쥐어짜던 긴장이 일순간 풀리며 다리에 힘이 빠졌다.

“괜찮나.”

칼릭스가 부축하듯 엘리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턱을 굳게 다문 채 엘리샤의 피범벅이 된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버텼으니까요.”

엘리샤는 짧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양쪽에서 집행관들에게 팔을 붙들린 채 끌려가던 세드릭이 두 사람의 앞을 지나쳤다.

쇠사슬을 질질 끌며 걸음을 옮기던 세드릭이 문득 멈추어 섰다.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드러난 녹색 눈동자가 오롯이 엘리샤를 향했다. 그 눈에는 바닥에 짓밟힌 자의 수치심이나 공포 대신, 섬뜩할 만큼 차가운 살의와 뒤틀린 확신이 번뜩이고 있었다.

세드릭이 피 묻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낮게 웃었다.

“기어이 여기까지 끌고 왔군, 쥐새끼 같은 것이.”

집행관들이 세드릭의 어깨를 억세게 잡아당겼으나, 그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엘리샤를 응시했다.

“그 눈…… 아주 잘 간수해야 할 거다. 내가 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했다면, 네년은 제국의 바닥조차 모르는 천치에 불과하니까.”

스스로의 패배를 눈앞에 두고도 세드릭의 태도에는 기이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마치 결투장의 참패 따위는 준비된 거대한 판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듯한 오만함이었다.

“입을 다물어라, 죄인!”

집행관의 거친 재촉과 함께 세드릭은 차원문 너머 황실 재판소의 압송 행렬 속으로 거칠게 끌려 들어갔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그가 남긴 기괴한 미소는 결투장의 차가운 공기 속에 무겁게 맴돌았다.

“손가락 펴 보세요. 저릿한 느낌이 손끝까지 이어집니까?”

본관 1층 임시 구호 격리실의 의료 마법사가 지혈용 은 침을 엘리샤의 손목 부근에 꽂으며 물었다.

“아뇨. 감각이 둔하긴 한데 찌릿하지는 않아요.”

엘리샤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고개를 저었다. 살갗을 직접 갈랐던 손목의 상처 위로 옅은 녹색 치유 마력이 번져 나갔다. 불길하게 타올랐던 석판의 화상 자국과 엉겨 붙은 피는 닦여 나갔지만, 살이 아물면서 느껴지는 뻐근함은 뼛속까지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맞은편 침상에 앉은 칼릭스는 더 심각한 꼴이었다. 그의 오른팔은 짙은 남색 붕대로 어깨부터 손목까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가문의 금기 마법을 억지로 끌어다 쓰면서 혈관과 마력 통로가 한꺼번에 터져 나간 탓이었다. 붕대 겉면으로도 차가운 서리가 희뿌옇게 배어 나왔다.

치료를 마친 마법사가 도구를 정리하며 혀를 찼다.

“두 사람 다 미쳤습니다. 한 명은 마력 회로가 찢겨서 평생 지팡이나 검을 쥐지 못할 뻔했고, 다른 한 명은 피를 쏟아 마력 압력을 강제로 꺾어 놨으니. 조금만 늦었어도 둘 중 하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의료 마법사는 굳은 표정으로 약병 두 개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문을 열고 나갔다. 문밖 복도에는 황실 재판소의 감시병들이 서성이는 쇠붙이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격리실 안에 남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무거운 숨소리만 오갔다.

칼릭스가 먼저 성한 왼손으로 탁자 위의 물잔을 집어 엘리샤 쪽으로 밀어놓았다.

“마셔 둬. 체내 마력이 바닥나면 탈수부터 올 테니까.”

“라온 경이야말로 진통제부터 드셔야 할 것 같은데요. 오른팔 전체에서 냉기가 새어 나오고 있어요.”

“익숙한 통증이다. 가문의 비전을 다룰 때마다 겪는 대가일 뿐이지.”

칼릭스는 엘리샤의 붕대 감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푸른 눈동자 안에 억눌린 감정이 스쳤다.

“자신의 목숨을 깎아 증거를 지키는 짓은 이번 한 번으로 족합니다, 엘리샤.”

무미건조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손목을 베지 않았다면 석판이 먼저 터졌을 겁니다. 그러면 라온 경도, 저도 세드릭이 파놓은 덫에 걸려 산산조각 났겠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래도 방법이 틀렸어. 내게 시간을 더 벌어달라고 요구했어야지. 네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면, 결투장 상공에 띄운 투영식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 거다.”

칼릭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 결백을 밝히겠다고 네 목숨까지 빚질 생각은 없다.”

“빚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난 살기 위해 내 몫의 패를 던진 것뿐이니까.”

엘리샤는 잔을 들어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물기 덕에 바싹 말랐던 숨통이 조금 트였다. 칼릭스의 단호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가 단순한 원작의 주인공이라는 활자에서 벗어나 온전한 동맹으로 서 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 엘리샤는 물잔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라온 경, 아까 결투장 상공에 세드릭의 범행 기록이 투영될 때…… 이상한 점을 보지 못했습니까?”

칼릭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뜻이지?”

“투영된 푸른 글귀 아래로 흘렀던 마력의 파동 말입니다. 결투장 바닥의 지맥이 붕괴하면서 발생한 반동이었는데, 그 힘의 흐름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샤는 관찰자의 시야로 훑었던 결투장 상공의 잔흔을 머릿속에 다시 그렸다.

세드릭이 남긴 통제 석판의 회로를 억지로 뒤흔들어 투영식을 쏘아 올렸을 때, 지맥의 에너지는 결투장 하나에만 묶여 있지 않았다. 찢겨 나간 지맥의 잔여 줄기 하나가 결투장 지하를 벗어나 도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파동의 끝이 어디로 향했는지 압니까?”

“도성 북쪽…… 황궁인가?”

“맞아요. 황궁 지하 가장 깊은 곳, 황실 중앙 제단 쪽이었습니다.”

칼릭스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세드릭이 결투장 지맥을 건드린 목적이 단순히 나를 반역자로 모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네. 결투장 지맥을 터뜨려 고대 괴수를 소환한 건 일종의 도화선이었어요. 그 폭발력을 이용해 황궁 지하에 숨겨진 2차 제단 쪽 지맥까지 흔들어 깨우려 했던 겁니다. 만약 결투장 지하에서 우리가 괴수를 베어 넘기지 못했다면, 두 제단이 동시에 폭발해 제도 전체의 결계가 무너졌을 거예요.”

엘리샤는 문밖을 힐끔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세드릭이 끌려가면서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그 눈을 잘 간수하라고, 자기가 이대로 끝날 것 같냐고 웃더군요. 놈은 아직 모든 패를 잃은 게 아닙니다.”

칼릭스는 왼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원로원의 즉결 처형을 막아내고 학장과 최고 재판관의 개입을 끌어냈지만, 세드릭의 배후에는 황실 강경파가 버티고 있어. 황궁 지하에 또 다른 제단이 있다면…… 놈은 심문을 받으러 가는 이송 과정이나 재판정 자체를 뒤흔들 수단을 이미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군.”

“맞아요. 세드릭은 자신이 직접 증거를 조작한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우리가 재판소로 끌려가는 상황 자체를 기다렸다는 듯 굴었습니다.”

엘리샤의 손끝이 침대 시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우리가 황실 재판소로 이동하는 길목. 그곳이 세드릭이 노리는 진짜 무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 눈을 노리겠다고 한 것도 우발적인 협박이 아니에요. 현장을 직접 읽어내고 석판의 조작을 밝혀낸 제 관찰 능력을 재판정에 세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칼릭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러진 오른팔의 무게 때문에 동작이 무거웠지만, 눈빛만큼은 결투장에서 빙벽을 세우던 때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황실 재판소 중앙 심문실로 향하는 경로는 외곽의 지하 차폐 회랑을 거치게 되어 있다. 고대 결계로 둘러싸인 통제 구역이지.”

“지하 회랑…….”

“외부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곳이다. 황궁 지하의 지맥과도 가장 가까운 통로지. 그곳이라면 황실 마법단을 움직이지 않고 사설 암살대를 투입해도 학장단의 눈을 피할 수 있어.”

칼릭스는 엘리샤의 앞으로 걸어와 성한 왼손을 내밀었다.

“손목의 상처가 덧나지 않게 조심해. 회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법도, 학장의 권위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얌전하게 증언석에 앉혀줄 작자들이 아니니까요.”

엘리샤는 칼릭스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에 아직 둔탁한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걸음을 옮기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때 격리실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황실 재판소의 문장이 새겨진 흑철 갑옷을 입은 집행관 넷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는 죄수용 마력 억제 사슬이 들려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다. 엘리샤 학생, 그리고 칼릭스 드 라온. 황실 최고 재판소로 이송한다. 외곽 통제 구역을 통과해야 하니 지금 즉시 호송 마차에 탑승하라.”

집행관들의 서늘한 목소리가 격리실 안을 짓눌렀다. 엘리샤와 칼릭스는 서로의 시선을 짧게 마주친 뒤, 망설임 없이 문을 향해 걸음을 뗐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마차에 탄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집행관 중 우두머리가 둘 사이를 막아섰다.

엘리샤가 굳은 얼굴로 반문했다.

“공동 증언자로 지정되었을 텐데요.”

“증언 오염 방지가 우선이다. 최고 재판소 특별 규정 제4조에 의거한다. 드 라온 공자의 마력선 파열 상태도 감안하여 응급 구속 마차를 따로 배정했다.”

칼릭스는 붕대를 감은 오른팔을 가볍게 내린 채 집행관의 눈을 쏘아보았다.

“공동 심문이 원칙이다. 마차를 나눌 이유가 없어.”

“원칙은 우리가 정합니다, 공자.”

집행관들은 빈틈을 주지 않고 칼릭스를 앞선 마차로 몰아넣었다. 두 대의 호송 마차는 통짜 흑철을 두들겨 만든 육중한 이동식 감옥이었다. 차체 외벽에는 마력 파동을 흡수하는 차폐 룬이 빼곡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칼릭스가 탄 1호차가 철문을 닫고 덜컹거리며 먼저 지하 통로로 진입했다.

엘리샤 역시 떠밀리듯 뒤편 2호차 안으로 올라탔다.

철컥, 쿵.

두꺼운 쇠빗장이 세 겹으로 걸리며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좁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붉은 저녁노을빛마저 마차가 지하 차폐 회랑으로 내려서자마자 뚝 끊겼다.

벽면에 박힌 마석 램프가 청록색 불빛을 내뿜으며 뒤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엘리샤는 흔들리는 벤치에 등을 붙이고 손목의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상처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신경은 온통 귓가와 손끝으로 쏠려 있었다.

아카데미와 황궁을 잇는 이 지하 회랑은 본래 전시 요강에 따라 축조된 방호 통로였다. 수백 년 된 석조 외벽은 두껍고 견고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마차가 회랑 깊숙한 곳으로 들어설수록 바닥에서 올라오는 진동의 결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단순한 바퀴의 덜컹거림이 아니었다. 거대한 심장이 맥동하듯지반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었다.

엘리샤는 흔들리는 차체 안에서 본능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자의 시각을 끌어올렸다. 눈꺼풀 안쪽으로 흐릿하게 펼쳐지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마차의 두꺼운 흑철 벽면 너머 회랑에 새겨진 방호 룬의 흐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본래 은은한 백색과 푸른빛을 유지해야 할 고대 결계식들이 바닥에서부터 검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회랑 벽면의 미세한 균열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파장은 조금 전 대결투장 지하에서 겪었던 흑마법 촉매의 냄새와 완벽히 일치했다.

황궁 지하의 2차 제단이었다.

세드릭은 대결투장의 붕괴 공작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해, 이미 황궁 깊은 곳에 또 다른 지맥 기폭 장치를 심어두었다. 그리고 그 장치가 지금 누군가의 손에 의해 예정보다 일찍 가동되고 있었다. 지맥의 굵은 줄기가 차폐 회랑 아래를 지나며 마력의 맥동을 억지로 쥐어짜내는 형국이었다.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회랑 천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무슨 일인가! 대열을 정비하라!”

마차 밖에서 호송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고함은 곧이어 들려온 끔찍한 파열음에 파묻혔다.

뼈가 갈라지고 살점이 찢기는 불길한 소리가 철제 마차의 외벽을 타고 울렸다.

“커억……! 네, 네놈들, 무슨 짓을……!”

“호송대장님이 당했다! 근위병 놈들 중 일부가…… 컥!”

엘리샤는 좁은 격자창에 시선을 바짝 밀착시켰다.

마차 밖의 통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해 있었다. 호송 행렬을 호위하던 황실 근위병 중 넷이 입과 코에서 짙은 검은 안개를 뿜어내며 제 동료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흑마법 촉매에 잠식당한 자들이었다. 세드릭의 수족들이 황실 호송대 내부까지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호송병들의 비명 사이로, 회랑 천장의 통풍용 석조 환기구가 요란하게 박살 났다. 그 부서진 틈새를 뚫고 검은 복면을 쓴 그림자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소리 없는 착지와 군더더기 없는 도살의 동작. 그들은 황실의 정규 마법사나 군병이 아니었다. 세드릭이 뒤편에서 사적으로 육성해 온 전문 암살 집단이었다.

쾅!

앞서 달리던 1호차가 거대한 굉음을 내며 멈춰 섰다. 천장에서 낙하한 육중한 화강암 격벽이 1호차와 2호차 사이의 좁은 통로를 수직으로 내리찍어 두 마차를 완벽하게 분단시켰다.

“칼릭스!”

엘리샤가 창살을 쥐며 짧게 외쳤다.

차단벽 너머에서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튀는 파열음과 함께 칼릭스의 서늘한 기합이 울려 퍼졌다. 칼릭스가 오른팔의 파열된 마력선에도 불구하고 결빙 마력을 끌어올려 차단벽을 부수려 시도하는 모양이었지만, 벽면에 새겨진 황실 차폐식이 푸른 냉기를 필사적으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완전히 고립된 형태였다.

그리고 칼릭스의 1호차가 가로막힌 바로 그 순간, 엘리샤가 탄 마차의 지붕 위로 육중한 질량이 내리꽂혔다.

쿵!

철판 천장이 안쪽으로 움푹 파여 들어가며 날카로운 쇳가루가 비처럼 쏟아졌다.

마차가 한쪽으로 거칠게 쏠리더니, 궤도를 이탈한 네 바퀴가 석조 바닥을 사납게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통제력을 잃은 마차는 그대로 회랑 외벽을 들이받았다.

콰과과광!

차체가 완전히 옆으로 전복되며 거대한 마찰열과 비명이 뒤엉켰다. 엘리샤는 충돌의 여파로 좁은 좌석에서 튕겨 나가 반대편 철벽에 어깨를 강하게 부딪쳤다. 붕대를 감아둔 손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치밀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번졌지만,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끼기기긱!

전복된 마차의 철제 문짝이 끔찍한 파쇄음과 함께 바깥으로 거칠게 뜯겨 나갔다. 검은 마력의 톱날이 경첩과 세 겹의 빗장을 단숨에 녹여버린 탓이었다.

뜯겨 나간 문틈 사이로 지하 회랑의 메마른 먼지와 짙은 피비린내가 쏟아져 들어왔다.

기울어진 마차 입구에는 검은 가죽 갑주를 두르고 하관을 검은 천으로 가린 자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세모꼴 단검에는 마력 회로를 강제로 태워버리는 특수 독이 검푸르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맨 앞에 선 사내가 차가운 눈빛으로 넘어진 엘리샤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의 명이다. 다른 놈은 몰라도, 그 계집의 두 눈만은 반드시 도려내어 가져간다.”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세드릭은 엘리샤의 입을 막는 것을 넘어, 사태의 조작 흔적을 읽어내는 그녀의 시각 능력 자체를 영구히 파괴해 증거 능력을 지워버리려는 것이었다.

엘리샤는 바닥에 떨어진 날카로운 흑철 파편을 손바닥 안에 단단히 움켜쥐며 턱을 치켜들었다. 관찰자의 시각이 극도로 팽창하며 마차 안으로 진입하는 암살자의 무게중심과 근육의 수축 궤적이 붉은 선으로 펼쳐졌다.

피할 공간은 없었다. 차체 내부는 좁았고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우두머리 암살자가 바닥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서 번뜩인 서늘한 칼날이 망설임 없이 엘리샤의 미간을 향해 무자비하게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