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컬러 위버 · 총 3화

제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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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에 닿는 교복 옷깃 속으로 은색 펜던트의 서늘한 금속 감촉이 파고들었다. 리아나는 펜던트를 쥐었던 손을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침 종소리가 멎은 에테르 아카데미의 복도는 수업을 마친 학생들로 붐비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목적지는 식당도, 점심시간에 맞춰 오라던 학생회실도 아니었다.

리아나는 본관과 학생회관이 이어지는 대로를 피해 중앙 정원의 외곽 회랑으로 걸음을 꺾었다. 천공 도시 아르카나의 차가운 상공 바람을 막아주는 유리 돔 너머로 인공 태양의 백색 광선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원에 심어진 발광 넝쿨들이 학생들의 활기찬 노란색, 주황색 오라에 반응해 가볍게 흔들렸다.

리아나는 자신의 전신을 잿빛의 옅은 오라로 단단히 감싸 쥐었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기 전 신신당부했던 방어의 장막이었다. 남들에게는 아무런 재능도, 두드러진 감정도 없는 열등생의 오라처럼 보이게 만드는 껍데기. 어제 카이젠의 오라를 무의식적으로 건드렸던 끔찍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 장막을 한 겹이라도 느슨하게 풀어서는 안 되었다.

외곽 회랑의 대리석 기둥들은 굵고 촘촘했다. 이 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본관을 완전히 벗어나 서관 기숙사로 곧장 돌아갈 수 있었다. 학생회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드리안 벨모트 따위는 모른 척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저 길을 잃었다거나 몸이 좋지 않았다고 둘러댈 핑계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 거대한 각형 기둥의 그림자 속에서 낮게 깔린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망치려는 발걸음치고는 너무 느린데, 전학생. 네 오라가 길목마다 흔적을 줄줄 흘리고 있거든."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인영이 툭 튀어나오며 리아나의 정면을 막아섰다. 붉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아드리안 벨모트였다. 그의 입가에는 어제와 다름없이 능글맞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리아나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뻗어 나온 오라는 장난기가 넘치는 샛노란 주황색과 날카로운 청록색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고, 그 밑바닥에는 가늠하기 힘든 검은빛이 짙게 깔려 있었다.

리아나는 즉각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벨모트 선배. 비켜 주세요. 다음 강의를 준비하러 가야 합니다."

"점심시간에 시작하는 강의가 에테르 아카데미에 있었나? 내가 학칙을 잘못 외우고 있었나 보네."

아드리안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성큼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교복 넥타이는 단정하지 못하게 느슨히 풀려 있었고, 가슴팍의 셔츠 단추도 두 개나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 나태한 태도와 달리 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정원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어제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점심에 학생회실로 오라고."

"전학생이라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리고 선배의 사적인 호출에 제가 반드시 응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리아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도록 턱에 힘을 주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이 남자가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임을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의무라. 그래, 원칙대로 따지면 그렇겠지."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길고 마디 굵은 손가락 사이에서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투명한 수정 구슬이 매끄럽게 굴러갔다. 감정 유도 마도구였다. 주변의 에테르를 흡수해 대상의 오라 결을 강제로 증폭시키는 물건이었다. 수업 시간에나 쓰이는 고가의 도구를 이런 한낮의 회랑에서 장난감처럼 다루는 그의 손놀림에 리아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데 리아나, 네가 그 답답한 회색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꼴을 보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단 말이지."

아드리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수정 구슬에서 날카로운 공명음과 함께 엷은 파동이 번져 나갔다. 파동이 리아나의 잿빛 장막에 닿는 순간, 억눌러 두었던 감정의 결이 찌르르하게 울리며 반응했다. 장막의 표면에 보랏빛과 푸른빛의 가느다란 결들이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이것 봐. 평범한 둔재 코스프레 치고는 속이 너무 알록달록하잖아?"

아드리안의 눈빛이 순식간에 매섭게 번뜩였다. 그는 한 걸음 더 좁혀 들어왔다. 그가 내딛는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건조하게 울렸다.

"어제 카이젠 전하의 오라가 왜 흔들렸는지 알아? 그 얼음 덩어리 같은 인간은 평생 푸른색과 금색 말고는 다른 색을 섞어본 적이 없는 작자야. 그런데 어제, 네 옆을 지나치고 나서 그 오라에 붉은 실이 엉켰어."

리아나는 등 뒤로 닿는 차가운 대리석 난간을 느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녀는 품속의 은색 펜던트를 쥔 손에 힘을 주입해 간신히 오라의 틈을 닫아걸었다. 튀어 오르던 보랏빛 결이 다시 잿빛 속으로 가라앉았다.

"선배의 착각입니다. 전 황태자 전하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전 그저 감정 에테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오라가 불안정한 것뿐입니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내가 확인해 보면 알겠지."

아드리안이 손바닥 위의 수정 구슬을 가볍게 위로 던졌다가 다시 낚아챘다.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리아나의 얼굴을 집요하게 겨누었다.

"지금 네 오라의 장막, 꽤 정교하게 짜여 있긴 한데 말이야. 이 마도구에 에테르를 딱 반만 더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 저기 정원을 거니는 귀족 녀석들이 전부 돌아볼 만큼 화려하게 터져 나가겠지. 네가 그 잿빛 속에 뭘 숨기고 있는지, 전교생 앞에서 한 꺼풀씩 벗겨서 전시해 볼까?"

"벨모트 선배."

리아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금색 눈동자에 서늘한 방어선이 그어졌다.

"그런 짓을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오, 드디어 눈에 힘이 좀 들어가네."

아드리안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하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선택권을 줄게, 전학생. 지금 얌전히 나랑 학생회실로 갈래, 아니면 여기서 그 껍데기를 확 걷어내서 지나가는 애들 구경거리로 만들어 줄까? 난 둘 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랑 저편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학생 서너 명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회랑 구석에 바짝 붙어 선 두 사람에게 닿았다. 아카데미의 문제아이자 천재인 아드리안 벨모트가 신입 전학생을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광경은 누구라도 눈길을 줄 만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 학생들의 이목을 끌게 되면, 감정을 엮는 그녀의 특이성이 감정 학과의 교수들이나 학생회 전체의 감시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머니가 경고했던 최악의 파국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리아나는 어깨를 꼿꼿이 폈다. 회색 장막 밑에서 차오르는 울분을 억누르며, 그녀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선배가 원하는 대로 하죠. 학생회실로 가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야."

아드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마도구를 주머니에 털어 넣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긴 다리로 회랑을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리아나는 주머니 속에서 하얗게 질린 손가락을 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심정으로 그의 뒤를 쫓아 학생회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생회관 본관 3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은 햇빛을 굴절시키는 에테르 유리로 마감되어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청명한 종소리가 작게 울렸다. 앞서 걷는 아드리안의 붉은 머리칼이 계단 창문으로 쏟아지는 정오의 빛을 받아 불꽃처럼 번쩍였다.

"너무 굳어 있잖아, 에르메스. 누가 보면 널 고문실로 끌고 가는 줄 알겠어."

아드리안이 계단참에서 슬쩍 고개를 돌리며 빈정거렸다. 리아나는 대꾸하지 않고 교복 치맛자락을 쥔 채 묵묵히 보폭을 맞췄다. 그의 등 뒤로 일렁이는 주황빛 오라에 장난기 어린 녹색 기운이 팽팽하게 섞여 있었다. 겉으로는 가벼운 척 굴어도, 그 속에는 언제든 사냥감을 낚아채려는 맹수 같은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본관 복도 끝, 금빛 문양이 새겨진 육중한 흑단목 문 앞에 다다르자 아드리안이 거침없이 문손잡이를 돌렸다.

"들어와. 아무도 안 잡아먹으니까."

문이 열리며 묵직한 에테르 향이 공기를 채웠다. 리아나는 숨을 고르며 문턱을 넘었다. 안쪽은 높은 천장까지 닿은 고서적 책장들과 커다란 격자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창가 쪽 거대한 집무 책상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카이젠 루베르트였다.

리아나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굳어 붙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황태자의 옆얼굴은 조각처럼 서늘했다. 그는 만년필을 쥔 채 학생회 결재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각이 잡힌 검푸른 제복 옷깃에는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금빛 벼슬 문장이 정갈하게 박혀 있었다.

단둘이 보는 자리라고 여겼던 계산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리아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등 뒤에서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아드리안이 문을 등지고 서서 킬킬 웃고 있었다.

"어라, 전하께서 아직 집무실에 계실 줄은 몰랐는데."

아드리안의 말투에는 놀람이라곤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다분히 의도된 배치였다.

카이젠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겼다. 사각거리는 종이 마찰음만이 고요한 방 안을 갈랐다.

"점심시간은 학생회장 집무 시간이다, 벨모트. 규정을 잊은 건 너겠지."

카이젠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리아나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카이젠을 감싸고 있는 차분한 짙푸른 빛과 위압적인 금빛 오라. 그 단단한 결 사이로 어제는 없어야 마땅했던 불순물이 얽혀 있었다. 핏빛처럼 선명한 붉은 실 한 줄기가 그의 푸른 오라 중심부를 파고들어 맥박 치듯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 강당에서 리아나의 무의식적인 컬러 위빙이 건드려 놓은 감정의 흔적이었다. 황태자의 이성적인 방어벽 한가운데에, 혼란과 갈증을 뜻하는 붉은 기운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붉은 실을 확인하는 순간 리아나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저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카이젠 본인도 분명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규정이야 알지. 하지만 귀한 손님을 모셔왔는데 그렇게 냉정하게 굴 것까지야."

아드리안이 성큼 다가오더니, 주저할 틈도 없이 리아나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손바닥을 통해 묵직한 마력이 짓누르듯 닿아왔다.

"어제 전하께서도 눈여겨보셨던 전학생이잖아. 리아나 에르메스. 마침 정원에서 길을 헤매고 있길래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줬지."

아드리안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카이젠을 향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카이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리아나를 방패막이이자 미끼로 던진 것이었다.

그 순간, 책상 위에서 사각거리던 펜촉 소리가 딱 멎었다.

카이젠이 쥐고 있던 만년필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푸른 눈동자가 리아나의 어깨에 얹힌 아드리안의 손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방 안의 온도가 곤두박질쳤다.

"사적인 흥미로 학생회실에 외부인을 끌어들이지 마라, 벨모트."

카이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압감에 공기가 짓눌렸다. 그가 긴 다리로 책상을 돌아 나오며 한 자 한 자 얼음송곳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손 당장 치워라."

"이거 섭섭한데."

아드리안은 비아냥거리면서도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리아나의 어깨를 더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의 주황색 오라가 카이젠의 기세에 맞서 날을 세우며 녹색 스파크를 튀겼다.

"학생회 규정 어디에도 신입생 상담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없어. 게다가 이 친구, 오라가 아주 독특하거든. 전하께서도 어제 느끼셨잖아? 그 기이한 떨림을."

카이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음 순간,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카이젠의 푸른 에테르가 채찍처럼 바닥을 쳤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사이로 카이젠의 손이 뻗어 나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아드리안의 팔목을 쳐냈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에테르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권능을 사적인 불장난에 쓰지 마라."

아드리안의 팔이 튕겨 나가며 리아나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아드리안은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혀를 찼다.

"성미 급하시긴."

두 남자의 오라가 집무실 한가운데서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푸른빛의 냉혹한 파동과 주황빛의 사나운 열기가 엉키며 방 안의 에테르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짙어졌다. 가구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창틀이 덜컹거렸다.

그 압도적인 마력의 소용돌이 정중앙에 선 리아나는 숨조차 제대로 들이쉴 수 없었다. 감정 에너지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피부를 긁어대는 것만 같았다.

카이젠이 아드리안의 시선을 온몸으로 차단하듯 한 걸음 더 전진했다. 그의 등 뒤로 일렁이는 금빛 오라가 아드리안을 문 쪽으로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학생회장의 직권이자 황족의 위압이었다.

"경고는 한 번뿐이다. 나가라, 아드리안 벨모트."

카이젠의 낮은 음성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아드리안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비틀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카이젠의 등 뒤에 가려진 리아나를 집요하게 훑었다.

"그래, 회장님 뜻대로 물러나 주지. 하지만 전하, 가슴속이 타는 듯한 그 기분은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아드리안이 짧은 실소를 터뜨리며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의 붉은 머리칼이 복도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철컥, 하고 잠금장치가 저절로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완벽한 밀실이 완성되었다.

리아나가 뒷걸음질을 치려는 찰나, 차가운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카이젠의 커다란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와 리아나의 얇은 손목을 낚아챘다.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손아귀 힘은 매서웠다. 맞닿은 살갗을 통해 카이젠의 푸른 오라 속에서 미쳐 날뛰는 붉은 기운이 리아나의 손가락 끝으로 찌릿하게 타고 올라왔다.

카이젠이 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감정을 삼킨 푸른 눈동자 속에서, 통제되지 않는 열망의 불씨가 일렁이고 있었다.

리아나는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잡힌 손목은 쇳덩이에 결착된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카이젠의 거친 보폭이 그녀를 서재 안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뒤꿈치가 높은 원목 책장 하단에 닿았을 때야 걸음이 멎었다. 양옆으로 빽빽하게 꽂힌 가죽 장정의 마도서들이 퇴로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손 놓으십시오, 전하."

리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손목뼈가 바스러질 듯한 악력 속에서도 시선만은 피하지 않았다. 그 꼿꼿한 태도에 카이젠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전학 첫날, 중앙 회랑 분수대 앞."

카이젠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는 무거웠으나 그 이면에 도사린 기세는 당장이라도 바닥을 부술 듯 위태로웠다.

"어제 네가 지나친 순간부터 내 오라의 균형이 무너졌다. 네가 내게 무슨 짓을 엮어 넣은 거지?"

그가 상체를 숙이며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제복 깃에 새겨진 황실의 금빛 문양이 리아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카이젠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푸른 에테르는 본래라면 단단한 빙벽 같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가슴 한가운데에는 붉은 실 한 줄기가 기괴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맥박이 뛸 때마다 푸른 냉기를 태우며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아르카나의 어떤 고위 마법사도 내 동의 없이 오라의 결을 건드릴 수는 없다. 천재라 불리는 아드리안 벨모트조차 흉내 내지 못하는 짓이지."

카이젠의 푸른 눈동자가 리아나의 낯빛을 낱낱이 파헤치듯 훑었다.

"그런데 마력 측정치조차 바닥인 전학생 하나가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 이 꼴이 됐다. 에테르 순환로마다 불길이 번지고 통제권이 흔들려. 이걸 우연이라고 주장할 셈인가?"

핵심을 찌르는 추궁에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여기서 겁먹은 기색을 내보이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난다. 감정을 엮는 능력, 천년 전의 금기인 컬러 위버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황실의 지하 연구소에 영원히 갇히게 될 터였다.

리아나는 턱을 바짝 치켜들었다.

"황태자 전하의 심신이 미약해진 책임을 왜 아무 상관 없는 전학생에게 돌리십니까?"

"뭐라고?"

"저는 어제 배정받은 기숙사로 가던 중이었을 뿐입니다.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분이 고작 스쳐 지나간 평민의 기운에 휘둘리셨다면, 그건 본인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지 제 탓이 아닙니다.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도발에 가까운 반박에 카이젠의 턱선이 굳어졌다. 푸른 눈동자 속에서 위험한 불꽃이 튀었다.

"입을 제법 잘 놀리는군."

카이젠이 비틀린 조소를 흘렸다. 그는 잡고 있던 리아나의 손목을 조금 더 높이 꺾어 올리더니, 비어 있는 다른 한 손을 뻗어 리아나의 목덜미 부근으로 가져갔다. 단정한 교복 깃 사이로 숨겨져 있던 은색 펜던트가 그의 장갑 낀 손가락 끝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몸 주위에 두르고 있는 그 조잡한 회색 장막. 감정을 억지로 덮어 감추는 용도로 꽤 치밀하게 짰더군. 그 뒤에 무엇을 숨기고 있지? 이 펜던트인가, 아니면 네 본모습인가."

차가운 가죽 장갑이 쇄골 언저리를 스치려 했다. 그 순간 리아나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어머니가 목숨처럼 지키라며 남겨준 유품에 황족의 손이 닿는 것만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리아나는 온 체중을 실어 잡힌 손목을 바깥쪽으로 거칠게 비틀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카이젠의 단단한 가슴팍을 거세게 밀쳐냈다.

그 저항의 순간, 그녀의 내면에서 억누르고 있던 방어 본능이 기어코 빗장을 풀었다.

단순히 상대를 밀어내려 했던 물리적인 힘에 감정이 실렸다. 회색 장막의 틈새를 뚫고, 리아나의 손가락 끝에서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금빛 에테르 실가닥들이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밀어내야 한다. 이 위험한 사내를 내 영역 밖으로 밀어내야만 한다.

그 강렬한 거부감이 형태를 갖추어 카이젠의 흉부를 정면으로 가격했다.

카이젠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물러서기는커녕, 카이젠의 흉곽 한가운데 엉켜 있던 불온한 붉은빛이 리아나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실을 마주하자마자 맹렬하게 반응했다.

파직!

마른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카이젠의 오라 속 붉은 실이 살아 있는 뱀처럼 머리를 쳐들었다. 그것은 밀어내려는 리아나의 금빛 가닥을 거칠게 옭아매며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거부하려 뻗어 낸 실이 카이젠의 혼란과 뒤엉켜 버린 것이다.

"이게……."

리아나의 입술 사이로 당혹스러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끊어내려 손을 거두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두 사람의 감정선이 하나로 묶이며 강한 파동이 서재 안을 뒤흔들었다. 책장에 꽂힌 양장본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카이젠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가 뿜어내던 서늘한 푸른 기운은 금세 자취를 감추고, 리아나와 엉킨 붉은 실이 심장 부근에서 폭발하듯 선명한 진홍빛으로 타올랐다. 통제 불능의 열기가 얼음 같던 그의 안색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이 힘은 대체 뭐지?"

카이젠이 억누른 신음을 뱉어내며 리아나의 다른 쪽 어깨마저 거칠게 붙잡았다.

떨쳐내려 했던 반발이 오히려 불씨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카이젠은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리아나의 양팔을 결박하듯 책장 벽면에 완전히 내리눌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좁혀졌다. 주체할 수 없는 열기로 붉게 물든 카이젠의 푸른 눈동자가 리아나의 흔들리는 금빛 눈동자를 집어삼킬 듯 응시했다.

카이젠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서재 안을 서늘하게 메웠다.

"말해라. 네가 지금 내 안에 무엇을 묶어 놓은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