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모서리가 등허리를 파고들었다. 뒤통수에 닿은 가죽 장정 고서들의 서늘한 감촉과 달리, 눈앞을 가로막은 카이젠의 숨결은 화형대 곁에 선 것처럼 메마르고 뜨거웠다.
두 사람의 손가락 사이에서 꼬인 금빛 에테르 실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카이젠의 흉곽 안쪽에서 뻗어 나온 진홍빛 줄기들이 굶주린 덩굴처럼 금빛 실을 옥죄며 더욱 굵어졌다.
손가락 마디를 타고 전해지는 파동은 뼛속까지 시큰거리게 만들었다. 그의 깊은 내면에 갇혀 있던 날것의 감정이 실을 매개로 고스란히 밀려들었다. 억누르고 통제하려 발버둥 치는 자책, 그 밑바닥에서 치받치는 난폭한 갈증. 타인의 감정 파편이 리아나의 흉골을 날카로운 바늘처럼 찔렀다.
카이젠의 푸른 눈동자 가장자리에 핏발이 섰다. 그가 리아나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그러쥐며 한 발짝 더 바짝 짓쳐들었다.
"내 질문에 대답해. 내 신경계를 휘젓고 있는 이 불길이 대체 뭐지?"
카이젠의 낮은 목소리가 성대 안쪽에서 긁혀 나왔다.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던 그의 검푸른 제복 깃 사이로, 쇄골 정중앙에 이식된 황실제 감정 억제 장치가 번뜩였다. 푸른 보석 형상을 한 마도 합금 판형 장치였다. 감정의 진폭을 강제로 영점에 고정해야 할 그 장치가, 엉겨 붙은 실의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불길한 주홍빛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찌르르,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장치 외벽을 따라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황족의 이성을 지키는 제어구가 과부하로 녹아내리기 직전이었다. 리아나는 그의 가슴팍에서 피어오르는 탄내를 맡으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저 장치가 완전히 터져 나간다면, 카이젠의 감정 폭주뿐만 아니라 이 금빛 실의 정체까지 고스란히 까발려진다.
리아나는 카이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두려움에 질린 채 떨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놓으십시오, 전하. 황태자 전하의 오라가 뒤틀린 이유를 왜 아무 죄 없는 전학생의 목덜미에서 찾으려 하십니까."
"아무 죄가 없어?"
카이젠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장갑 낀 그의 손가락이 리아나의 턱 끝을 스쳐 지나가더니, 목덜미 아래로 비어져 나온 은색 펜던트 줄을 낚아채려 했다.
"손가락 끝에서 이런 해괴한 술수를 부리면서 죄가 없다고 지껄이나. 아카데미에 잠입한 반역도당의 첩자인가, 아니면 황족의 신경을 마비시키러 온 암살자인가."
"제가 무슨 암살자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 실을 당장 거둬. 네놈이 내 가슴에 쑤셔 박은 이 저주를 당장 풀어내란 말이다."
카이젠의 숨이 턱밑까지 거칠게 닿았다. 제어구가 붉은빛을 뿜어낼 때마다 그의 눈동자에서 이성의 푸른빛이 조금씩 지워져 갔다. 얼음장 같던 황태자의 껍질이 깨지며 튀어나오는 것은, 낯설 만큼 노골적인 집착과 분노였다.
그의 손톱이 은색 펜던트의 모서리를 건드리는 찰나, 리아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머니는 이 펜던트가 단순한 차폐 도구가 아니라, 위버의 본질을 담는 그릇이라 했다. 이 안에는 외부의 마력을 반사해 튕겨내는 최소한의 방어 기제가 새겨져 있었다. 리아나는 붙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을 들어 올려 카이젠의 손목이 닿기 직전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력을 집어넣는 대신, 펜던트 중심의 에테르 핵을 손가락 끝으로 강하게 짓눌렀다.
끼이익, 하는 귀를 찢는 마찰음이 서재의 밀폐된 공기를 갈랐다.
펜던트 표면에 각인된 은빛 문양이 카이젠의 흉부 억제 장치가 뿜어내는 불안정한 마력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극과 극의 성질을 가진 두 마도구가 맞물리며 거센 역류가 일어났다.
파앙!
응축되었던 반발력이 맹렬한 충격파로 터져 나왔다.
"큭……!"
카이젠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가슴에 박힌 감정 억제 장치가 거센 스파크를 허공에 뿌리며 일순간 멈춰 섰고, 그 충격으로 그가 리아나를 짓누르던 완력이 느슨해졌다.
리아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제 흉곽을 옥죄던 금빛 에테르 실의 연결부를 스스로의 의지로 난폭하게 뜯어냈다. 제 살점을 찢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이 명치를 관통했으나 소리를 삼켰다. 실이 끊어지며 튕겨 나간 반동이 카이젠의 가죽 장갑을 사납게 털어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카이젠의 품에서 마침내 벗어난 리아나는 바닥에 떨어진 양장본 책들을 밟지 않도록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카이젠은 벽면에 한 손을 짚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억제 장치가 박힌 제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고 있었다. 셔츠 단추 몇 개가 충격파에 뜯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흑단 같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그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감히…… 어디를 가려는 거지, 리아나 에르메스."
카이젠이 짓씹듯 제 이름을 불렀으나 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옷깃을 여며 은색 펜던트를 교복 안쪽 깊숙이 밀어 넣은 그녀의 눈빛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저는 그저 규정대로 전학 절차를 밟았을 뿐입니다, 전하. 황태자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송구하지만, 제게는 전하의 억측을 받아줄 의무가 없습니다."
카이젠의 푸른 눈동자가 리아나의 굳은 태도에 매섭게 일렁였다. 쇄골 부근의 제어구에서 피어오르던 붉은 연기가 점차 가라앉았으나, 억제 장치 표면에는 이미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황실의 기술로도 완벽하게 제어하던 그의 감정선이 외부의 충격으로 뒤틀려 버린 증거였다.
카이젠은 흐트러진 셔츠 깃을 한 손으로 여미며, 책장 모서리를 짚고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여전했으나,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입술 끝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내 질문에 똑바로 답하지 않고 도망치려는 건가. 네가 방금 끊어낸 그 빛줄기, 단순한 방어 마법이 아니었어."
"전하께서 제 펜던트를 억지로 빼앗으려 하시니 반사적으로 마력이 튄 것뿐입니다. 황태자 전하라 하실지라도, 학생회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평민 전학생의 소지품을 강탈할 권리는 없습니다."
리아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등 뒤로 숨기며 또박또박 말을 맺었다. 겁에 질린 기색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지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햇살 같은 금색 눈동자에 맺혀 있었다.
어머니의 유품이자 목숨줄인 펜던트를 지켜냈다는 안도감 뒤로, 카이젠의 오라를 무의식중에 건드렸다는 서늘한 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카이젠의 흉곽 안쪽에서 여전히 불완전하게 요동치는 진홍빛 잔향은, 리아나 자신의 에테르가 남긴 상흔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젠이 천천히 보폭을 넓히며 리아나에게 다가왔다.
"평민의 소지품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내 몸에 새겨진 마도 장치가 왜 네 손끝 하나에 과부하를 일으켰는지, 그 실체를 묻는 거다."
"저는 모릅니다. 황실의 비전 마도구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모른다고?"
카이젠이 조소를 머금은 채 리아나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리아나의 단정한 교복 옷깃을 낱낱이 파헤치듯 내리꽂혔다.
"어제 회랑에서 네가 스쳐 지나간 뒤부터 내 오라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리고 방금, 억제 장치가 완전히 타격을 입었지. 네 존재 자체가 제국 황실에 대한 위협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징계 위원회에 회부하십시오."
리아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살피는 그녀였지만, 여기서 꼬리를 내리고 순순히 취조를 당한다면 천년 전의 금기인 컬러 위버라는 사실이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학생회 차원에서 정식으로 소환하신다면 응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밀실에서 폭력을 동반한 심문에 응할 생각은 없습니다."
"폭력이라니."
"어깨를 짓누르고 퇴로를 막아선 채, 상대의 마도구를 강제로 빼앗으려 한 행위를 폭력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부릅니까?"
리아나의 침착하면서도 조리 있는 반박에 카이젠의 눈썹 한쪽이 꿈틀거렸다. 항상 황태자의 권위 앞에 고개를 숙이고 떨던 귀족 자제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겉모습은 평범하고 소심해 보이는 전학생이, 궁지에 몰리자 숨겨둔 발톱을 드러내듯 단단한 심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카이젠은 억제 장치 쪽을 한 번 더 짚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파동은 여전히 불규칙했다. 리아나의 금빛 실은 끊어졌지만, 그 실이 남기고 간 붉은 기운은 이미 그의 심장 언저리에 뿌리를 내린 듯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장갑을 벗어 바닥에 떨어진 뜯겨 나간 단추 옆으로 던져 버렸다. 맨손의 창백한 피부 위로 푸른 힘줄이 팽팽하게 솟아 있었다.
"공식 소환이라. 좋다. 그 잘난 절차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밟아주지. 하지만 리아나 에르메스, 네가 숨기고 있는 그 회색 장막 뒤의 찌꺼기까지 전부 털어내기 전에는 결코 아카데미를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전 도망칠 이유가 없습니다, 전하."
리아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등허리에 닿았던 차가운 책장의 냉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그럼, 허락도 없이 남을 가두는 취미는 이쯤에서 끝내주시길 바랍니다. 수업 종이 울리기 직전입니다."
카이젠은 더 이상 그녀의 길을 막아서지 않았다. 억제 장치가 망가진 상태에서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가는 제어 불능의 폭주로 이어질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리아나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옆으로 반 걸음 물러났다.
리아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흩어진 책들을 조심스럽게 피해 서재의 육중한 문가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지만, 뒤에서 꽂히는 카이젠의 서슬 퍼런 시선을 의식하며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달칵.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서재의 밀폐된 공기가 바깥 복도의 서늘한 바람과 뒤섞였다.
리아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서재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집무실 문을 완전히 빠져나가기도 전, 문기둥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던 익숙한 인영이 그녀의 앞길을 그림자처럼 가로막았다.
붉은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채 입꼬리를 능글맞게 끌어올린 아드리안 벨모트였다.
아드리안은 문기둥에서 천천히 등을 뗐다. 그의 길고 마른 손가락 사이에서 은빛 추가 달린 원통형 감정 유도 마도구가 짤랑거리며 차가운 금속음을 냈다.
복도 바닥을 비추는 정오의 햇살 아래,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리아나의 얼굴과 손끝을 집요하게 훑어 내렸다. 리아나는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교복 주머니 속에 깊이 찔러 넣었다. 하지만 미처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금빛 에테르의 미세한 잔류 입자가 손톱 끝에서 작은 불씨처럼 파르르 떨리며 흩어지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아드리안의 시선이 그 금빛 잔해에 닿았다가, 반쯤 열린 집무실 문틈 너머로 향했다. 문 안쪽 깊은 곳, 책장 모서리를 짚은 채 거칠게 숨을 고르는 카이젠의 헝클어진 검푸른 제복과, 뜯겨 나간 셔츠 깃 너머로 붉게 일렁이는 심장 부근의 난류가 복도에까지 희미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턱을 슬쩍 치켜들며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아카데미 수석의 얼음장 같은 심장을 저렇게 새빨갛게 녹여놓고 그냥 가려고? 에르메스 양, 그 회색 장막 뒤에 숨긴 게 대체 뭐야?"
"길을 막지 마세요, 벨모트 공자님."
리아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옆으로 비껴서려 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긴 다리를 성큼 뻗어 회랑 벽과 난간 사이의 좁은 틈을 완전히 차단했다. 붉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그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과 잔혹할 만큼 예리한 탐색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 펜던트, 감정 차폐석 치고는 너무 반응이 거칠던데. 황실의 기술로 만든 억제 장치가 저 지경으로 과부하를 일으키려면 단순한 마력 역류로는 어림도 없거든. 전하의 오라는 원래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서리 낀 푸른색이야. 그런데 방금 저 안에서 터져나온 건 뭐였지? 핏빛보다 짙은 붉은색 파편이었어. 꼭 네 손끝에서 타오르던 그 금빛이랑 억지로 묶여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더란 말이지."
아드리안이 손에 쥔 감정 유도 마도구를 허공으로 던졌다가 가볍게 받아냈다. 차가운 금속 추가 손바닥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상체를 비스듬히 숙였다.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는 나긋나긋한 어조였지만, 에메랄드색 눈동자 속에 담긴 호기심은 집요하게 리아나의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공자님이 무엇을 보셨든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갑작스러운 마력 불안정을 겪으신 것뿐이에요. 전학생인 제가 황태자 전하의 오라에 손을 댈 리가 없잖습니까."
리아나는 턱을 단단히 치켜들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교복 주머니 속에서 펜던트를 쥔 손가락 끝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흔들림 없이 평온을 가장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리아나의 굳은 태도가 못 견디게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거짓말도 참 야무지게 하네, 에르메스. 평범한 전학생이 황실 수석의 오라를 그 모양으로 들쑤셔 놓고 옷깃 하나 다치지 않고 걸어 나온다고? 저 안에서 카이젠의 억제 장치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렸어. 그건 감정이 통제를 벗어났다는 뜻이야. 평생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는 그 냉혈한이 말이야."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리아나의 뺨 옆을 스치듯 난간을 짚었다. 리아나는 즉시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벨모트 도서관 깊숙한 서고에 먼지만 쌓인 채 잊힌 기록이 하나 있어. 천년 전, 감정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기 시작하던 태초의 시절에 존재했다는 이들의 이야기지. 사람의 오라를 단순히 읽거나 증폭하는 수준이 아니라, 실처럼 자아내고 엮어서 남의 감정 그 자체를 뒤바꿔버리는 괴물들."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만큼 낮아졌다. 능글맞던 웃음기가 한 꺼풀 걷히고, 진실을 꿰뚫어 보려는 마법사 특유의 날카로운 집중력이 그의 주황빛 오라 속에서 짙은 녹색으로 번득였다.
"컬러 위버. 제국 어디에서도 흔적조차 지워진 그 이름이, 방금 저 방 안에서 반짝인 금빛 실타래 위로 겹쳐 보이던데. 내가 헛것을 본 걸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어머니가 임종 직전까지 신신당부했던 그 단어가, 아카데미에 발을 들인지 불과 이틀 만에 다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회색 장막으로 덮어둔 오라 밑바닥에서 금빛 기운이 요동치려 하자, 리아나는 펜던트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손바닥에 파고들 만큼 강하게 쥐어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 조금이라도 동요를 드러내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
"터무니없는 동화 속 이야기로 절 떠보지 마세요. 전 하급 감정 차폐석 하나조차 다루기 벅찬 평민 장학생일 뿐입니다. 공자님의 그 거창한 망상에 어울려드릴 시간도, 이유도 없습니다."
리아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아드리안의 팔 밑으로 몸을 숙여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재빠르게 몸을 돌려 다시 그녀의 정면을 막아섰다. 이번에는 손을 뻗어 위협하는 대신, 감정 유도 마도구를 주머니에 털어 넣고 두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겠다는 듯 유연한 태도였지만, 눈빛만은 조금 전보다 훨씬 깊어져 있었다.
"망상이라 치부하기엔 증거가 너무 생생하잖아. 좋아, 당장 인정하라고 윽박지르진 않을게. 하지만 에르메스 양, 이거 하나만은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텐데."
아드리안이 반쯤 열린 학생회실 문 쪽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저 안의 얼음 인형은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 억제 장치가 고장 난 카이젠 루베르트가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넌 지금 황실의 목줄을 건드린 거야. 숨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올걸."
그는 리아나에게서 반 걸음 물러나며 비스듬히 길을 터주었다. 입가에는 다시금 특유의 가볍고 능청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날 찾아와.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내가 요구할 건, 그저 아주 사소한 관찰 기회뿐이니까."
"그럴 일은 영원히 없을 겁니다."
리아나는 단호하게 말을 자르고, 아드리안이 내준 틈새를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아드리안의 머리칼 끝에서 묻어나는 장난기 섞인 주황빛 잔향이 코끝을 스쳤으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회랑의 흑단목 바닥을 밟아나갔다. 뒤에서 따라붙는 발소리는 없었지만, 등에 꽂히는 두 개의 날카로운 시선이 짓누르듯 무거웠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중앙 계단으로 향하는 순간, 리아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주머니 속 은색 펜던트를 더욱 깊이 움켜쥐었다.
한편, 회랑에 홀로 남겨진 아드리안은 리아나가 사라진 빈 복도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활짝 열린 학생회실 문가로 다가갔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냉기와 뒤엉킨 진홍빛 열기가 불온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흑단목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른 것은 타는 듯한 마도석 냄새였다. 집무실 안쪽의 공기는 싸늘한 냉기와 끈적한 열기가 정면으로 충돌해 성에와 수증기를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육중한 문이 등 뒤에서 덜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아드리안은 바닥에 흩어진 양피지 서류들을 가볍게 즈려밟으며 집무실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런. 늘 빈틈없던 아카데미 수석께서 꼴이 제법 흉하네."
아드리안의 시선이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모퉁이를 짚고 선 사내에게 가닿았다.
카이젠 루베르트는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모양새였다. 금빛 벼슬 문장이 정교하게 새겨진 검푸른 제복 상의는 이미 단추 두 개가 뜯겨 나가 있었고, 그 벌어진 틈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에서는 비정상적인 붉은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심장 부근의 피부 아래 이식된 은빛 판, 황실 직속 연금술사들이 오직 황태자 한 사람만을 위해 주조한 감정 억제 장치였다. 차가운 푸른빛으로 맥동해야 할 냉각 마도석의 중심핵에 손톱만 한 금이 가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온 리아나 에르메스의 금빛 에테르 실이 카이젠 본래의 붉은 파동을 똬리처럼 휘감은 채, 냉각 회로를 통째로 태워버리고 있었다.
카이젠이 흉부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장갑 가죽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벨모트."
카이젠의 목소리는 바닥까지 가라앉아 쇳소리를 냈다. 깊은 푸른색이어야 할 그의 동공 안쪽에 타오르는 진홍빛 잔불이 일렁였다. 얼음처럼 벼려진 이성으로 유지되던 얼굴에 난생처음 보는 균열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드리안은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천천히 뺐다. 언제나 입가에 띄우고 다니던 능글맞은 장난기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는 카이젠의 세 보 앞까지 다가가, 억제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틀린 에테르의 파장을 똑똑히 응시했다.
"그 둔감한 평민 아가씨가 네 결계를 직접 찢었다는 건가?"
"결계를 찢은 게 아니다."
카이젠이 턱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호흡이 한 번 끊어질 때마다 제복 안쪽에서 치직거리는 스파크가 튀었다. 억제 장치가 과열을 견디지 못하고 불규칙한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그 계집이 손을 댄 순간, 내 오라와 그자의 기운이 하나로 묶였다. 거부 반응조차 일어나지 않았어. 억제 장치의 마도석이 침입을 감지하기도 전에 녹아내렸다."
아드리안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는 조금 전 복도에서 리아나의 펜던트 틈새로 언뜻 엿보았던 은은한 금빛 잔향을 떠올렸다. 단순한 에테르의 밀도 문제가 아니었다. 타인의 감정 그 자체를 재료 삼아 결을 바꾸고, 완전히 다른 색채로 짜깁기하는 힘.
"내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얌전히 빠져나가기에 그냥 순진한 전학생인 줄 알았더니, 정말로 물건이었군."
아드리안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상대의 오라에 간섭해서 색을 엮어 바꾸는 건 현대 마법학의 공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짓이야. 천년 전 대붕괴 이전에 기록이 말살된 존재들 외에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족속이 없지."
"컬러 위버."
카이젠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제국 건국사 어디에도 정식으로 등재되지 않은, 오직 황실 직속 사서들만이 열람할 수 있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그래. 천년 전, 감정 에너지를 마음대로 직조해 도시 하나를 통째로 광기에 빠뜨렸다는 재앙의 불씨."
아드리안이 집무실 창가로 다가가 두꺼운 암막 커튼을 거칠게 걷어쳤다. 붉게 물들어가는 황혼의 빛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카이젠의 흐트러진 흉곽을 비췄다. 금빛과 진홍빛이 뒤엉킨 실타래는 식기는커녕 카이젠의 호흡에 맞춰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그 계집이 정말 위버의 혈통이라면, 넌 지금 네 목숨줄을 쥔 칼날을 품에 안고 있는 셈이야, 카이젠. 저 실을 끊어내지 못하면 네 감정 제어는 오늘부로 끝장이다. 황태자가 통제력을 잃고 폭주하는 순간, 황실 원로원이 널 폐위시키려 들 텐데?"
"끊어낼 수 없다."
카이젠이 잘라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자조와 함께 날카로운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내가 밀어내려 할수록 저 금빛 실은 내 신경계를 파고들며 더 강하게 결속된다. 억제 장치 따위로는 이미 막을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어."
카이젠은 책상 모퉁이를 짚고 있던 손을 뗐다. 비틀거리던 걸음은 단번에 곧게 펴졌고, 서늘한 군주의 기상이 다시금 그의 전신을 감쌌다. 비록 가슴팍의 붉은 열기는 여전히 꺼지지 않았으나, 그 눈빛만은 극도로 냉혹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벨모트. 황실 금서고의 천년 전 기록을 당장 열어봐야겠다. 네 가문의 비밀 회랑을 빌리지."
"벨모트 공작가가 황실 금서고 침입에 가담했다는 게 들통나면 반역이야, 전하."
"네가 그딴 시시한 명분에 얽매이는 놈이었나?"
카이젠이 싸늘하게 쏘아붙이자, 아드리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에메랄드색 눈동자 속에 도사린 검은 그림자가 짙어졌다.
"거절할 리가 없잖아. 전설 속 재앙의 실체를 직접 만져볼 기회인데."
아드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문가로 돌아섰다. 그의 등 뒤에서 카이젠이 셔츠 깃을 한 번 더 거칠게 뜯어냈다. 단추가 바닥으로 떨어져 구르며 맑은 마찰음을 냈다.
드러난 쇄골 아래로, 결코 지워지지 않을 흉터처럼 얽혀버린 금빛과 붉은빛의 매듭이 맥동하고 있었다. 카이젠은 그 타오르는 고통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리아나 에르메스."
그 이름을 짓씹는 카이젠의 푸른 눈동자 속에 지독하게 가라앉은 집착이 번져나갔다.
"감히 내 목줄을 쥐었으니, 그 대가는 네 전부로 치러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