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 붉게 내려앉은 에테르 아카데미 서편 정원의 회랑은 인적이 끊겨 서늘한 공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돌바닥을 디디는 리아나의 구둣발 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렸다. 학생회실 문을 박차고 나온 뒤로 단 한 번도 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옷자락 아래 숨겨진 은색 펜던트가 여전히 미열을 뿜어내며 쇄골 부근을 찌르고 있었다. 카이젠의 억제 장치와 격돌했던 금빛 에테르의 잔향이 아직 손가락 끝마디에 아릿하게 남아 있는 탓이었다.
지금 리아나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기숙사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이 위험천만한 도시에 제 존재가 발각되지 않도록 잿빛 장막을 다시금 두껍게 덧씌우는 것.
그러나 본관의 웅장한 그림자가 걷히고 서편 기숙사로 이어지는 붉은 장미 덤불 모퉁이에 도달했을 때, 길게 늘어진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발끝을 가로막았다.
"걸음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전학생?"
장미 덤불의 굵은 줄기 뒤편에서 익숙한 주황색 불꽃이 피어오르듯 인영이 걸어 나왔다. 불그스름한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아드리안 벨모트였다.
그는 양손을 느슨하게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회랑 기둥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었다. 여유롭게 휘어진 입꼬리와는 달리, 그늘 속에 박힌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조금 전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보다 훨씬 집요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리아나는 발을 멈추고 반 보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이 무의식중에 코트 주머니 속 펜던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비켜주세요, 선배."
"섭섭하게 왜 이래. 네가 방금 전 학생회장의 심장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왔는지 뻔히 아는 사람치고는 꽤나 친절하게 말을 걸어준 편인데."
아드리안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몸 주위로 피어오르는 오라는 언뜻 장난기 가득하고 경쾌한 주황빛이었으나, 그 가장자리는 서슬 퍼런 녹색 마력이 칼날처럼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안쪽, 깊은 심부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끈적한 흑색 그림자가 똬리를 틀고 일렁였다.
사람의 감정을 색으로 보는 리아나의 눈에는 그 위선적인 배색이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전 회장실에서 학생회장실 서류를 정리하라는 지시를 거절하고 나왔을 뿐이에요."
"거짓말을 할 거면 목소리 떨림부터 고치는 게 어때? 아, 물론 그 굳은 표정은 제법 그럴싸해. 하지만 카이젠 쇄골에 박힌 마도석이 반파되면서 뿜어낸 충격파는 본관 3층 전체를 뒤흔들었거든."
아드리안이 턱을 까딱이며 덤불 너머의 본관 상층부를 가리켰다. 여전히 붉은 노을 속에서 미약한 마력 스파크가 유리창 너머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 녀석의 억제 장치는 황실 원로원이 직접 설계한 최고 등급의 마도구야. 황태자가 제 성질을 못 이겨 폭주하지 못하도록, 감정의 싹을 뿌리째 짓누르는 족쇄지. 그런데 그게 통째로 깨져 나갔어. 그것도 아주 볼품없이, 금빛 실에 감겨서."
아드리안의 시선이 리아나의 오른손 끝으로 내려앉았다. 리아나는 재빨리 손을 옷자락 안으로 숨겼다.
"카이젠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 억제 장치가 박살 난 황태자의 이성이 얼마나 오래 버틸 것 같아? 붉은 에테르가 혈관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누구를 찾을까? 뻔하지. 제 목줄을 망가뜨린 원인을 찾아내 뼈째로 씹어 삼키려 들 거다."
낮게 내려앉은 아드리안의 음성은 묘하게 나긋나긋했다. 공포를 조장하면서도, 동시에 유일한 구원자인 척 손을 내미는 자의 전형적인 어조였다.
"황실 근위대가 개입하는 순간 네 그 가련한 평민 신분증 따위는 휴짓조각도 안 돼. 아카데미 안에서 널 황실의 감시망으로부터 완벽하게 숨겨줄 수 있는 장소는 딱 한 군데뿐이지."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서 은밀한 공간 좌표가 새겨진 작은 마도석 펜던트가 달랑거렸다.
"내 개인 연구실. 벨모트 공작가의 결계가 걸려 있어서 황태자라도 영장 없이는 절대 문을 부수지 못해. 어때, 꽤 매력적인 제안이지?"
리아나는 그가 내민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겉으로는 흥미 위주의 선의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의 오라 속 검은 그림자는 굶주린 짐승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카이젠이 통제 불능의 붉은 불길로 옥죄어오는 위협이라면, 눈앞의 아드리안은 발목부터 서서히 삼켜 드는 늪지대였다. 한 발이라도 디디는 순간 그의 연구 대상이자 소장품으로 박제될 것이 뻔했다.
리아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햇살 같은 금색 눈동자가 아드리안의 에메랄드빛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선배의 그 번지르르한 가면 속에 숨겨진 뒤틀린 색깔이 다 보여요. 장난감 취급받을 생각 따위 없으니 비키세요."
아드리안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내밀었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색깔이 보인다고?"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능글맞은 미소가 한순간 굳어졌다. 통찰력이 번뜩이는 눈빛 속에서 지독한 갈증 같은 탐욕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천년 전 사라진 전설, 감정 그 자체를 색으로 인지하고 제어한다는 컬러 위버의 편린을 그녀가 제 입으로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네. 내 오라의 결을 꿰뚫어 본 녀석은 마법학부 교수들 중에도 없었는데."
아드리안은 손을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반 보 더 다가서며 몸을 숙였다. 리아나의 귓가로 서늘한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게 날카롭게 굴면 더 손에 쥐고 싶어지잖아, 리아나 에르메스. 카이젠 같은 원리원칙주의자한테 덜미를 잡히느니, 차라리 내 연구실에서 안전하게 거래하는 게 너한테도 훨씬 이득일 텐데?"
"제가 누구와 거래하든, 혹은 누구에게 잡히든 그건 제가 감당할 일이에요. 비키지 않으면 소리를 질러서 기숙사 사감실 경비들을 부르겠어요."
리아나는 펜던트 모서리를 손끝으로 세게 누르며, 겉으로 둘러치고 있던 회색 오라의 파동을 날카롭게 벼렸다. 당장이라도 튕겨 나갈 듯 팽팽한 적의에 아드리안은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불쾌함이나 모욕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거절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신경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듯했다. 입술을 핥는 그의 눈에 걷잡을 수 없는 사적 열기가 차올랐다.
"사감실이라니, 생각보다 아주 고전적인 방법을 쓰네. 겁먹은 토끼처럼 굴면서도 절대 순순히 목을 내주진 않는다 이거지."
아드리안이 마침내 비스듬히 몸을 틀며 길을 터주었다.
"좋아, 이번엔 그냥 보내주지. 하지만 리아나, 네가 엮어놓은 그 금빛 실이 카이젠의 숨통을 어디까지 틀어쥘지 스스로도 모를 텐데. 그 오만한 황태자가 네 생각보다 훨씬 무자비하게 널 찾아낼 테니까."
리아나는 대답 대신 교복 치맛자락을 거칠게 움켜쥐고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깨가 스칠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아드리안의 서늘한 시선이 그녀의 뒤통수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붉은 장미 꽃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숙사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리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드리안은 손바닥에 쥐고 있던 공간 마도석을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입가에는 다시금 짙은 호기심과 소유욕이 뒤섞인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황실 금서고라."
그는 카이젠과 약속했던 비밀 회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이젠에게 위버의 기록을 전부 넘겨줄 필요는 없지. 저 기막힌 재주는, 오직 나만이 온전히 해체하고 다뤄야 하니까."
아드리안은 황혼이 삼켜버린 회랑의 어둠 속으로 거침없이 발을 디뎠다.
자정이 지난 시각, 아르카나 제국 황실 금서고 지하 심층부는 싸늘하게 식은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하 수십 미터 아래에 감춰진 비밀 회랑은 외부의 공기가 전혀 통하지 않아, 벽면을 타고 흐르는 에테르 램프의 청백색 불빛만이 먼지 쌓인 흑철 책장들을 비추고 있었다. 벨모트 가문만이 알고 있는 고대 우회 통로를 통해 결계를 우회한 두 남자의 발소리가 메마른 석판 바닥에 길게 울렸다.
카이젠 루베르트는 제복 셔츠 깃을 한 손으로 짓이기듯 잡고 벽을 짚었다. 단단한 흑단목 지지대에 닿은 손가락 끝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검푸른 제복 가슴팍, 쇄골 정중앙에 이식된 황실 감정 억제 장치는 세로로 길게 금이 간 채 불규칙한 마력 불꽃을 튀겼다. 그 균열 틈새를 비집고 나온 눈부신 금빛 에테르 실이 심장 혈관을 휘감듯 깊숙이 파고들어, 그의 본래 오라인 서늘한 푸른빛과 붉은 기운을 사정없이 쥐어짜고 있었다.
"그 꼴을 황궁 경비대가 봐야 하는데. 제국의 완벽한 태양이라 불리는 수석 학생회장이 감정 장치 하나 통제 못 해서 숨을 헐떡이는 꼴이라니."
아드리안 벨모트가 붉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비스듬히 돌아섰다. 그의 손끝에는 복잡한 기하학 문양의 녹색 결계 해제식이 맴돌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육중한 흑철 서고 문에 새겨진 황실 인장을 장난감 다루듯 툭툭 건드리며 잠금술을 풀어나갔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열어라, 아드리안."
카이젠의 음성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낮고 거칠었다. 턱선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말을 내뱉을 때마다 흉곽 안쪽에서 무언가가 거세게 잡아당겨지는 통증이 일었다.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늑골 아래에 똬리를 튼 금빛 실은,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거친 호흡과 박자에 맞춰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철컥,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육중한 흑철 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천년의 세월 동안 갇혀 있던 메마른 종이 냄새와 부식된 마나의 잔향이 훅 끼쳐왔다.
아드리안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먼저 서고 안으로 들어섰다.
"제국 역사상 세 번밖에 열리지 않았던 심층 금서고에 벨모트의 배신자 딱지를 달고 들어오다니. 카이젠, 네가 나한테 빚진 게 뭔지는 똑똑히 기억해 둬야 할 거다."
"장부를 따지는 건 네 목숨이 붙어 있을 때나 해라."
카이젠은 벽에서 손을 떼고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제복 안쪽의 금빛 실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다. 억제 장치가 차갑게 냉각해 주던 피가 끓어오르고, 그 자리마다 낯선 감정의 격랑이 들이닥쳤다. 리아나 에르메스의 굳게 닫힌 입술, 반발하며 치솟던 은빛 오라, 도망치듯 물러서던 그 작은 발소리가 머릿속을 난폭하게 긁어대고 있었다.
금서고 한가운데에는 잿빛 석판들과 오래된 양피지들이 유리관 없이 허공에 부유하고 있었다. 천년 전 대붕괴 당시 황실의 마법사들이 봉인해 둔 고대 술식의 기록들이었다.
아드리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녹색 마력이 공중을 가르며 허공에 떠 있던 거대한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낚아챘다. 양피지 표면에는 제국 초기 문자로 쓰인 붉은 인장이 박혀 있었다.
"여기 있네. 대붕괴 이전, 제국을 뒤흔들었던 에테르 조작자들에 관한 기록."
아드리안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양피지에 적힌 문장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가벼운 농담을 던지던 그의 입꼬리가 점차 굳어졌다. 늘 여유를 가장하던 얼굴에 서늘한 탐욕과 놀라움이 동시에 번져갔다.
"이것 봐, 카이젠."
아드리안이 양피지를 펼쳐 보이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타인의 오라를 직접 직조하여 본질을 개변시키는 자들. 천년 전 그들은 이들을 영혼의 재단사, 혹은 컬러 위버라 불렀어. 오라의 결을 읽고 비틀어, 상대의 감정과 마력 회로를 종속시키는 금기의 마법사."
"치료법이나 해제식은."
카이젠이 흑단목 서가에 손을 얹으며 다그쳤다. 그의 푸른 눈동자 주변으로 붉은 혈관이 돋아나 있었다. 억제 장치가 기능을 잃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날것의 감정이 통제를 벗어나 폭주 직전까지 치닫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양피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책장의 그림자 속에 몸을 반쯤 숨겼다. 카이젠의 시선이 양피지 중앙에 머무는 순간, 아드리안의 긴 손가락이 고대 양피지 하단에 덧대어져 있던 작은 양피지 편린 하나를 정교하게 뜯어냈다. 위버의 에테르 파장을 역이용해 신경계를 봉쇄하고 구속하는 고대 결속진의 도면이었다.
아드리안은 카이젠이 흉통으로 고개를 떨구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얇은 가죽 조각을 자신의 제복 소매 안쪽 비밀 주머니로 미끄러뜨렸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완벽한 손놀림이었다.
아드리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낯으로 양피지를 카이젠의 가슴팍 쪽으로 들이밀었다.
"이 고대 양피지에는 결속을 끊는 법 따윈 적혀 있지 않아. 오히려 위버의 감정이 얽힌 자는 평생 그 영혼에 속박된다고 적혀 있지. 감당할 수 있겠나, 전하?"
카이젠의 시선이 기록의 마지막 문장에 가닿았다.
‘컬러 위버의 매듭은 강제로 끊을 수 없으며, 시전자의 심장에 감응한다. 실을 억지로 파괴하려 드는 자는 오라의 영구적인 붕괴를 맞이할 것이며, 매듭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시전자가 제 의지로 실을 거두어들이는 것뿐이다.’
서고 안의 공기가 얼어붙듯 가라앉았다.
카이젠은 쇄골 위에 얹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억제 장치가 부서진 자리에서 맥동하는 금빛 실은 환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도 에테르 아카데미 서편 기숙사 어딘가에 있을 리아나의 맥박을 실시간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그녀가 불안해할 때마다 실이 조여들었고, 그녀의 감정이 날을 세울 때마다 흉곽 안쪽이 찢길 듯 아파왔다.
자신의 영혼이 그 나약해 보이던 전학생의 손아귀에 쥐여 있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거두게 해야 한다, 이건가."
카이젠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낮고 침착했다. 억제 장치가 깨져버린 탓에, 오히려 차가운 분노와 뒤틀린 갈망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럼 내가 그 애의 목을 쥐고 빌게 만들면 되겠군."
아드리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리아나 에르메스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 같아? 방금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 보니까, 그 애는 네 억제 장치가 터지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던데. 오히려 널 끔찍하게 경계하고 있어."
카이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이를 알 수 없던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붉은 마력의 잔향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아드리안이 리아나를 사적으로 마주쳤다는 사실조차, 지금의 카이젠에게는 거슬리는 파편 하나에 불과했다.
"경계하든 두려워하든 상관없다."
카이젠은 제복 코트를 거칠게 고쳐 입었다. 깨진 억제 장치 위로 금빛 실이 다시 한번 날카롭게 진동하며 심장을 찔렀지만, 그는 더 이상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실의 파동이 이끄는 방향이 명확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서편 기숙사, 가장 높은 층의 구석진 방.
"그 아이가 풀어주지 않겠다면, 내 곁에서 영원히 실을 쥐고 있게 만들면 그만이다."
카이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서고의 서늘한 어둠을 가르며 출구로 걸어 나갔다.
홀로 남겨진 아드리안은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조금 전 빼돌린 고대 구속진의 양피지를 매만졌다. 거친 양피지의 질감이 손가락 끝에 닿자, 그의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도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
"영원히 쥐고 있게 만든다라."
아드리안은 카이젠이 사라진 어두운 복도를 응시하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카이젠, 그 애의 손을 차지하는 건 네가 아닐 거야."
새벽 두 시, 서편 기숙사 최상층 구석방의 공기는 살얼음판처럼 차가웠다.
리아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얇은 잠옷 차림의 손가락 끝은 목걸이에 걸린 은색 펜던트의 모서리를 파고들 듯 움켜쥐고 있었다. 낮에 집무실에서 억지로 뜯어낸 카이젠의 붉은 에테르 파편들이 펜던트 표면에서 씻겨 나가지 않은 채 끈질기게 맴돌았다.
정제하려 손가락을 댈 때마다 가슴 한가운데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억제 장치가 깨져버린 남자의 호흡, 살갗을 태울 듯 번지던 거친 마력의 진동이 펜던트 너머로 여과 없이 전해졌다.
그건 단순한 잔향이 아니었다.
실을 강제로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끊어진 것은 겉으로 드러난 가닥뿐이었다. 흉곽 안쪽에 남은 뿌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여전히 상대방의 위치를 향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발코니 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바람이 불어 덧창이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굳게 걸어 잠갔던 청동 걸쇠가 내부의 마력 잠금장치째 뒤틀리며 우그러지는 파열음이었다.
리아나는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이 옷장 모서리를 짚는 순간, 양쪽으로 닫혀 있던 유리창이 에테르 돌풍을 맞고 활짝 젖혀졌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짙은 감청색 제복을 입은 형체가 난간을 딛고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카이젠 루베르트였다.
언제나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던 단정한 옷차림은 온데간데없었다. 제복의 은색 단추 서너 개가 거칠게 뜯겨 나가 있었고, 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어야 할 깃은 젖혀져 있었다. 쇄골 정중앙에 박혀 있던 은백색 마도 핵판은 십자 형태로 균열이 간 채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 깨진 틈새를 비집고 나온 진홍빛 마력이 리아나가 남긴 금빛 실타래와 뒤엉켜, 그의 쇄골을 따라 핏줄처럼 흉흉하게 불거져 있었다.
카이젠의 걸음은 무거웠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카펫 위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방 안의 온도가 곤두박질쳤다.
"어떻게…… 여기까지."
리아나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지만,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평소 아카데미 수석이자 제국의 후계자로서 유지하던 서늘한 품격은 억제 장치가 부서진 자리에 차오른 원초적인 갈증에 완전히 집어삼켜져 있었다.
리아나가 옆으로 몸을 틀어 문 쪽으로 달리려던 찰나, 차가운 가죽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
단단한 악력이 뼈를 부술 듯 조여왔다. 리아나는 벽 쪽으로 밀려났다. 등 뒤로 서늘한 벽지가 닿는 것과 동시에, 카이젠의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숨어도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가를 긁어내렸다. 그의 숨결에서는 차가운 금속 냄새와 함께 타버린 마도구의 매캐한 잔향이 풍겼다.
"너는 내 흉곽을 찢어놓고, 여기서 태연하게 문을 잠그고 잠이라도 자려던 건가?"
카이젠의 시선이 리아나의 손에 쥐여 있던 은색 펜던트로 향했다. 그가 잡은 손목을 비틀어 벽에 내리누르자, 펜던트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짤랑거리는 맑은 쇳소리를 냈다.
리아나는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바둥거렸지만, 억제 장치의 족쇄를 벗어던진 황태자의 완력은 평범한 힘으로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통을 삼키며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들어 올렸다. 햇살 같은 금색 눈동자가 차가운 분노로 번쩍였다.
"학생회장 전하, 제 방에서 당장 나가세요. 선을 넘으셨습니다."
평민 전학생이 황태자에게 내뱉을 수 있는 수위를 아득히 넘어선 거절이었다.
하지만 그 단호한 음성을 들은 카이젠의 턱선이 메마르게 굳어졌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기괴할 정도로 건조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선을 넘었다?"
카이젠은 잡고 있던 리아나의 손을 들어 올려, 단추가 뜯겨 나간 자신의 쇄골 위로 거칠게 내리눌렀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온도는 정상이 아니었다. 억제 장치가 박살 난 자리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그 안에서 고동치는 리아나의 금빛 실은 카이젠의 심장 박동과 완벽하게 맞물려 뛰고 있었다. 리아나의 손바닥이 그의 살갗에 닿자마자, 두 사람의 가슴골 사이에서 금빛과 붉은빛의 마력 파편이 사납게 튀어 올랐다.
뼛속까지 울리는 공명감에 리아나의 숨이 턱 막혔다. 카이젠이 겪고 있는 마력 과부하의 통증이 실을 타고 고스란히 손바닥으로 밀려들었다.
"내 가슴에 이 지독한 불을 질러놓고, 전하라며 선을 긋겠다고? 리아나 에르메스, 넌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카이젠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만큼 바짝 다가왔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푸른 눈동자 한가운데에 붉은 불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 매듭을 쥐고 있는 게 너라면, 나를 불태우고 있는 것도 너다."
카이젠이 다른 한 손을 들어 리아나의 턱을 움켜쥐었다.
언제나 공사 구분이 명확하던 학생회장의 태도는 완전히 증발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제 영혼의 고삐를 쥐고 흔든 상대를 향한 집요하고 위험한 소유욕만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말해 봐. 이 끔찍한 실을 네가 거둘 수 있나?"
카이젠의 손가락이 리아나의 턱선을 타고 목덜미로 내려앉았다. 그의 손끝이 지나간 자리에 오한이 번졌지만, 리아나는 턱을 빳빳이 든 채 그를 노려보았다.
"거둘 수 있다고 해도, 거두지 않을 겁니다."
리아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 장치가 깨져서 고통스러운 건 당신의 오만함 때문이에요. 내 능력을 멋대로 판단하고 억누르려 든 대가라고요. 그러니 그 고통을 안고 당장 내 방에서 꺼져요."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황실의 그 누구도, 심지어 아카데미의 교장조차 카이젠 루베르트에게 이토록 적나라하게 독설을 퍼부은 적은 없었다.
카이젠의 눈동자 속 붉은 불씨가 일순 정지했다. 그리고 이내, 억눌려 있던 마력이 폭발하듯 솟구치며 그의 목소리를 짓눌렀다.
"거두지 않겠다?"
카이젠은 턱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리아나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리아나의 금빛 눈동자를 집어삼킬 듯 깊게 파고들었다.
"상관없어. 풀지 마라."
카이젠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영원한 족쇄를 확인하는 선고였다.
"내가 네 목을 쥐고 있는 한, 이 실은 너와 나를 묶는 유일한 사슬이 될 테니까."
카이젠의 손끝이 바닥에 떨어진 펜던트 바로 위, 리아나의 가슴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멈춰 섰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신분과 예의의 껍데기가 완전히 박살 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