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컬러 위버 · 총 6화 · AI 작가 윤슬

제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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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를 짓누르는 서슬 퍼런 압박감 너머로 카이젠의 거친 숨결이 닿았다. 쇄골 바로 위에 맞닿은 리아나의 손바닥으로 금속 파편의 날카로운 단면과 펄펄 끓는 열기가 가감 없이 파고들었다.

억제 장치가 박살 난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에테르와 금빛 실이 엉키며 살갗을 지져댔다. 실을 타고 전해지는 파동은 단순한 마력의 충돌이 아니었다. 감정을 억누르던 족쇄가 깨지며 통제를 잃은 남자의 들끓는 고통과 맥박이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 고스란히 밀려들고 있었다.

카이젠은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억제 장치를 벗어던진 그의 붉은 오라는 방 안을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흉흉하게 일렁였다. 책장 위에 얹혀 있던 종이 뭉치가 마력풍에 휘말려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고, 깨진 창문 틈으로 들이치는 찬 바람마저 그 살인적인 열기에 닿아 바싹 메말라갔다.

"침묵으로 답을 대신할 생각이라면 오산이다, 리아나."

카이젠이 턱을 쥔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제복 안쪽의 단추는 모조리 뜯겨 나가 있었고, 흑발 사이로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 속 붉은 불씨는 이성을 완전히 밀어낸 맹수의 형형함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리아나는 시선을 내리깔지 않았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듯 조여오는 손목의 통증에도, 쇄골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협적인 기세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슬이라고 부르든 족쇄라고 부르든 마음대로 하세요."

리아나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차분하고 서늘한 음성이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

"하지만 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란 착각은 버려요, 카이젠."

황태자의 이름을 직함도 경칭도 없이 날것 그대로 내뱉은 순간, 카이젠의 눈썹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완벽한 수석이자 학생회장으로 군림해 온 그에게 이토록 적나라한 거역을 드러낸 이는 없었다.

"뭐라고?"

카이젠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찰나, 리아나는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을 굽혀 그의 부서진 억제 장치 한가운데를 강하게 찔러 눌렀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방어 본능으로 솟구치던 금빛 에테르를 강제로 역류시켰다. 카이젠의 신경계와 얽혀 있던 실의 고리를 그녀 스스로 거칠게 잡아당긴 것이다.

실이 팽팽하게 팽창하며 금빛 불꽃을 튀겼다. 카이젠의 쇄골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마력이 급작스러운 역류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거세게 요동쳤다.

"큭……!"

카이젠의 입에서 짓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과부하가 걸린 마력이 체내를 거꾸로 훑으며 폐부를 찌르는 충격에, 리아나의 턱과 팔목을 결박하고 있던 그의 손아귀에 실린 힘이 순식간에 풀렸다.

리아나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비틀어진 손목을 거칠게 빼내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던 은색 펜던트를 향해 손을 뻗으며 금빛 마력을 쏟아부었다.

카이젠의 붉은 에테르 잔향과 리아나의 금빛 실이 뒤엉켜 있던 펜던트가 즉각 반응했다.

어머니의 유품에 새겨진 방어 각인이 마력 역류의 충격을 기폭제 삼아 사납게 깨어났다.

쨍그랑!

유리잔이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솟구친 은빛 장막이 방 안 전체로 둥글게 터져 나갔다.

순수한 방어 에테르의 충격파가 카이젠의 붉은 오라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좁은 기숙사 방 한가운데에서 두 힘이 맞부딪치며 가구들을 사방으로 밀어냈다.

"……크윽!"

카이젠이 거센 반발력에 밀려 뒤로 두어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의 제복 부츠 밑창에 짓밟힌 유리 파편들이 서걱거리며 으깨졌다.

그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마력을 끌어올려 은빛 장막을 부숴버리려 팔을 뻗은 바로 그 순간, 기숙사 건물 외벽 너머에서 날카로운 금속 호각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삐이익-!

"서편 기숙사 4층 구역, 비정상적 고위험 마력 충돌 감지!"

"순찰대 전원, 외벽 차단막을 전개하라! 즉시 발원지로 진입한다!"

깨진 창문 너머로 서릿발처럼 차가운 푸른빛 탐색 마법 줄기들이 빗줄기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에테르 아카데미 중앙 순찰대가 마력의 파동을 포착하고 건물 외벽을 타고 쇄도하고 있었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푸른 탐색 빛이 방 안의 벽면과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을 어지럽게 훑었다.

카이젠의 안색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제아무리 제국의 황태자이자 학생회장이라 한들, 한밤중에 여학생의 기숙사 창문을 깨고 들어와 마도구를 파괴한 채 대치하고 있는 꼴을 순찰대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이 현장이 황실 원로원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감정 억제 장치의 파손 사실과 함께 그가 쥐고 있던 통제권 전체가 뿌리째 흔들릴 터였다.

카이젠은 어금니를 짓씹었다. 쇄골 부근에서 불덩이처럼 치솟는 통증을 억누르며, 그는 가슴팍으로 넘쳐흐르던 붉은 마력을 강제로 내리눌렀다. 제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 핏줄이 굵게 곤두서며 격렬한 억압의 과정을 드러냈다.

리아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차가운 공기를 들이켰다. 가슴 한가운데가 찢겨 나가는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바닥에서 펜던트를 낚아채 품에 쥐는 손끝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카이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창밖에서 교차하는 탐색 빛줄기가 그의 흑발과 번뜩이는 눈동자를 차갑게 가르고 지나갔다.

그의 입매가 비틀리며 메마른 냉소가 번졌다. 순찰대의 개입으로 발이 묶인 것에 대한 분노보다, 기어이 자신을 밀어내고 상황을 비틀어버린 상대를 향한 지독한 집착이 서려 있었다.

"영리하게 굴었군, 리아나 에르메스."

카이젠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지만, 여전히 끊어지지 않은 금빛 실의 울림을 타고 리아나의 고막을 단단히 꿰뚫었다.

"하지만 명심해라. 이 실이 내 심장에 걸려 있는 한, 네가 어디로 도망치든 나는 기어이 찾아낼 거다."

말을 마친 카이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깨진 창틀 위로 발을 디뎠다.

검은 망토가 허공을 가르며 퍼덕였다. 붉은 마력의 잔향을 남긴 그의 형체는 새벽안개 속으로 녹아들듯 옥상 난간 너머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돌풍이 잦아들자 방 안에는 매캐한 금속 타는 냄새와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들이닥치는 살얼음 같은 새벽 공기만이 남았다.

리아나는 펜던트를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쇄골에 닿았던 손바닥의 감각이 여전히 불에 덴 것처럼 얼얼했다.

그리고 복도 너머에서, 기숙사 문을 부술 듯 다가오는 순찰대의 거친 군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서편 첨탑 최상층에 자리한 벨모트 개인 연구실 안쪽은 짙은 청록빛 차단 결계로 굳게 잠겨 있었다.

아드리안 벨모트는 작업대 모서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손가락 사이로 은색 세공 펜을 빙글 돌렸다. 작업대 깊숙한 비밀 수납장 안에는 지난밤 황실 심층 금서고의 어둠 속에서 카이젠 몰래 빼돌린 고대 결속진 도면이 안전하게 숨겨져 있었다. 위버의 손발을 묶고 그 힘을 영구히 종속시키는 고대의 마법진. 그 양피지를 손에 넣은 순간부터 아드리안의 머릿속은 온통 은발에 금빛 눈동자를 지닌 전학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철컥.

무거운 방어 결계가 찢겨 나가듯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연구실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예고도 없는 난입이었다. 문턱을 넘어선 사내는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카이젠 루베르트였다. 평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단정한 제복은 목깃이 비뚤어져 있었고, 단추 두 개가 뜯겨 나간 셔츠 틈으로 불타듯 짓무른 쇄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살갗에 박혀 있던 은백색 억제 장치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져 검붉은 피와 잿더미로 뒤엉켜 있었다. 그 상처 위로 금빛과 붉은빛이 맹렬하게 꼬인 마력의 실오라기들이 신경줄처럼 파닥거렸다.

아드리안은 펜을 멈추고 턱을 괸 채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노크 정도는 배우고 올 줄 알았는데,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새벽부터 남의 연구실 문짝을 박살 내러 오셨군."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핏발이 선 눈으로 아드리안을 쏘아보며 연구실 중앙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의 양탄자 위로 검붉은 마력의 잔향이 짓눌린 자국을 남겼다. 감정을 차갑게 걸러내던 억제 장치가 박살 난 탓에, 살의와 격앙된 분노가 여과 없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기숙사 서편 구역이 한바탕 뒤집어졌더군. 순찰대가 들이닥쳐 창문이 깨진 방을 수색하고, 학생들은 웅성거리고 말이야."

아드리안이 작업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교활한 비웃음이 어렸다.

"기숙사 창문까지 깨부수고 들어갔다면서? 자제력을 잃고 여학생의 방에 쳐들어간 황태자라니,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이름이 참 아깝게 됐어."

"입 닥쳐라, 아드리안."

카이젠의 목소리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긁혀 나오는 쇳소리 같았다. 가슴팍의 상처가 욱신거릴 때마다 그의 턱선이 딱딱하게 굳었다.

"금서고에서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를 줄 아나. 고대 위버에 관한 기록 서랍이 열려 있었어."

"수작이라니 섭섭하네. 난 그저 호기심 많은 마법사로서 진실을 확인했을 뿐이야."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거리를 좁혀왔다. 그는 카이젠의 쇄골에 달라붙은 붉고 금빛인 매듭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확신했지. 리아나 에르메스는 천년 전 기록에나 박제되어 있던 진짜 컬러 위버야. 네 그 흉측하게 타버린 가슴팍이 산증인이지 않나?"

카이젠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물러서지 않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전하의 그 흉측하게 타버린 가슴팍을 원로원이 보게 된다면 어떨까? 전설의 컬러 위버를 독점하려다 제어 장치를 부쉈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는 즉시 제국의 해부대에 오르게 될 텐데."

그 순간,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카이젠의 신형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콰앙!

아드리안의 등허리가 연구실 벽면에 거칠게 처박혔다. 벽에 걸려 있던 유리 시험관들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산산조각 났다. 카이젠의 거친 손아귀가 아드리안의 멱살을 틀어쥐고 허공으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뼘 하나에 불과했다. 카이젠의 붉은 마력이 아드리안의 목덜미를 타격하듯 옥죄었고, 그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아드리안의 뺨을 데울 듯 뜨겁게 번졌다.

"감히 나를 협박하나, 벨모트?"

카이젠이 이를 악물었다. 억제기를 잃은 그의 눈동자는 붉은 불꽃이 일렁이는 심연 같았다.

"네 혓바닥을 지금 당장 뽑아버려도 원로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네 아비조차 내 발아래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게 만들 수 있다."

멱살을 잡힌 채 숨이 막혀오는데도 아드리안의 입꼬리는 비틀려 올라갔다. 고통 속에서도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뱀처럼 번뜩였다.

"쿨럭, 죽이려면…… 죽여 봐, 전하.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내 서재와 가문에 숨겨둔 기록 장치가 즉시 황실 원로원과 학술원으로 전송되도록 마법을 걸어뒀거든."

아드리안이 짓눌린 목구멍을 억지로 열어 속삭였다.

"원로원 늙은이들이 들이닥치면 리아나 에르메스는 살아남지 못해. 영혼의 껍질까지 벗겨져 마력 배터리로 쓰이다 폐기처분 되겠지. 네가 그 계집을 제국에 빼앗기지 않고 살리고 싶다면, 나한테 넘겨."

"뭐라고?"

"그녀를 내 연구실로 보내. 벨모트 가문의 결계 안이라면 원로원의 눈을 피해 숨길 수 있어. 그녀의 실을 통제하고 연구하는 건 내가 맡을 테니, 넌 상처나 봉합하고 얌전히 황태자 노릇이나 계속해."

카이젠의 손아귀에 실린 악력이 더욱 거세졌다. 아드리안의 옷깃이 찢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넘기라고? 네 더러운 손에 리아나를 쥐여주라는 건가?"

카이젠의 입에서 조소 섞인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착각하지 마라. 그 아이는 내 심장에 실을 박아 넣은 존재다. 내 허락 없이 그 누구도, 심지어 황제라 할지라도 손댈 수 없어. 특히 너 따위의 학구적 탐욕을 채우기 위한 제물로는 더더욱."

카이젠은 아드리안을 바닥으로 패대기치듯 내던졌다.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아드리안이 깨진 유리 파편 위로 굴러떨어졌다. 손바닥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금 카이젠을 올려다보았다.

카이젠은 찢겨 나간 제복 깃을 거칠게 여미며 뒤로 물러섰다. 부서진 억제 장치 틈에서 새어 나온 금빛 실이 마치 살아 숨 쉬듯 허공을 향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실의 다른 쪽 끝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카이젠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리아나 에르메스의 주변을 맴돌거나 허튼수작을 부려봐라."

카이젠이 문고리를 잡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마력이 그의 발밑에서 서늘한 냉기로 굳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네 목숨뿐만 아니라 벨모트 공작가의 성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쾅!

문이 부서질 듯 닫히고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단호한 군화 소리가 울렸다.

연구실 안에 홀로 남겨진 아드리안은 턱 끝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지나, 비밀 수납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카이젠은 폭주 직전이었다. 금빛 실의 고통에 뇌가 타들어 가면서도 리아나를 집착적으로 틀어쥐려는 광기. 그것은 오히려 상황을 더 빠르게 파국으로 몰고 갈 뿐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단단히 미치셨군."

아드리안의 입가에 서늘한 조소가 걸렸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푸른빛을 머금은 정육면체의 공간 마도석을 꺼내 손안에서 굴렸다. 이 마도석을 리아나의 손에 쥐여주기만 하면, 그녀는 제 발로 이 벨모트의 새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될 터였다.

카이젠이 먼저 그녀를 망가뜨리기 전에, 자신이 직접 손을 써야 했다. 아드리안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곧장 연구실을 나섰다. 학생들의 발길이 닿기 시작하는 아침의 중앙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중앙 도서관 고문헌실 뒤편으로 이어진 후정은 이른 아침의 서늘한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키 높은 주목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선 석조 회랑에는 학생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

리아나는 차가운 돌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숨을 골랐다. 몇 시간 동안 먼지 쌓인 양피지들을 뒤졌지만, 컬러 위빙이나 감정의 실을 인위적으로 끊어내는 방법에 대한 기록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관련 페이지마다 누군가 고의로 뜯어낸 자국만 선명했을 뿐이었다.

옷감 너머 쇄골 부근이 욱신거렸다. 새벽녘 기숙사 창문을 깨고 들어와 제 손을 억제 장치 위로 짓누르던 카이젠의 서늘한 눈빛과, 그 살갗을 타고 흘러들던 붉은 마력의 잔향이 여전히 뼈마디에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기숙사 건물 외벽 너머로 날카롭게 울려 퍼졌던 순찰대의 금속 호각 소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푸른 탐색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순찰대가 쇄도하자, 카이젠은 차가운 경고를 남긴 채 창밖 어둠 속으로 물러났었다. 복도를 부술 듯 다가오는 순찰대의 거친 군화 소리와 그 혼란을 틈타 간신히 방을 빠져나온 리아나는 새벽의 냉기를 맞으며 이곳 도서관으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카이젠의 목줄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영혼을 갉아먹는 이 금빛 실을 끊어낼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서 있으면 잡아먹히기 딱 좋은데, 에르메스."

회랑 기둥 뒤편의 짙은 그늘을 가르며 익숙하게 비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리아나는 즉시 몸을 돌려 난간을 등지고 섰다.

느긋한 보폭으로 다가오는 아드리안 벨모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단정해야 할 교복 상의 깃은 단추가 풀려 있었고, 턱선 부근에는 옅은 핏자국을 급하게 닦아낸 붉은 쓸림이 남아 있었다.

"……벨모트 공자."

리아나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경계 어린 태도를 즐기기라도 하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 세 걸음 남짓한 거리가 남았다.

"서편 정원에서 내 호의를 매몰차게 걷어차더니, 기껏 찾아온 곳이 고문헌실이었나? 헛수고만 잔뜩 한 표정인데."

아드리안이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가늘게 좁히며 비릿하게 웃었다.

"네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감정의 실을 끊어내는 법, 그리고 위버의 결속에 관한 고대 기록. 왜 하필 그 부분만 뜯겨 나가 있었을까?"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푸른빛을 머금은 정육면체의 공간 마도석을 허공으로 띄웠다. 결정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좌표 마법진 너머로, 황실 금서고에서 빼돌린 고대 결속진의 은밀한 파동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이젠은 방금 내 연구실까지 쳐들어와 발악하고 갔다. 억제 장치가 박살 난 황태자의 숨통이 끊어지든, 그 전에 네가 원로원 해부대에 오르든 시간문제야. 그 기록을 온전히 손에 넣고 명줄을 부지할 방법은 이것뿐이다, 리아나."

"……협박의 방식을 바꾼 것뿐이군요."

리아나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협박이 아니라 현실적인 거래지. 이 공간 마도석에 손을 얹고 맹약을 맺어. 내 연구실로 이동하는 순간 너를 결속하고 은폐할 모든 준비가 끝나 있다. 뜯겨 나간 기록의 뒷장도 기꺼이 넘겨주지."

이미 서편 정원에서 꿰뚫어 보았던 탐욕이 이제는 감언이설 대신 구체적인 올가미로 좁혀져 오고 있었다. 리아나의 금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도석 표면을 흐르는 푸른빛 이면으로, 벨모트가 숨겨둔 고대 결속진의 끈적거리고 탁한 마력 선들이 얽혀 있는 것이 위버의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안전한 피신처 따위가 아니라, 영혼째 종속시키기 위해 파놓은 덫이었다.

"고문헌실의 기록을 훼손한 범인이 누구인지 이제 확실해졌네요."

리아나는 물러서지 않고 서늘하게 쏘아보았다.

"서편 정원에서도 말했을 텐데요. 난 당신들의 전유물이 될 생각이 없다고. 기록을 미끼로 내 영혼에 결속의 족쇄를 채우려는 그 뻔한 술책에 넘어갈 것 같나요?"

아드리안이 짓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결정을 쥔 손을 그녀의 가슴팍 가까이 들이밀었다.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 텐데. 받아, 리아나. 네가 살 수 있는 길은 내 연구실뿐이야."

탁!

날카로운 마찰음이 정적을 찢었다. 리아나가 거칠게 손을 쳐내며 그의 손목을 밀어냈다. 허공으로 튕겨 나간 공간 마도석이 바닥의 자갈 위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드리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입가에 걸려 있던 여유로운 미소가 일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르메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살얼음 같은 경고가 배어 나왔다.

"기껏 살길을 쥐여줘도 제 발로 파멸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건가? 황태자가 완전히 이성을 놓고 널 찢어발기려 들 때도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지 보지."

"그 파멸이 당신이 파놓은 덫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두 번 다시 내 앞에 그 비열한 올가미를 들이밀지 마세요."

리아나가 차갑게 말을 맺으며 아드리안을 지나쳐 회랑 쪽으로 발을 디디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후정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침 햇살이 부서져 내리던 회랑의 대리석 기둥 뒤, 짙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번져 나왔다.

리아나의 옷자락 아래, 펜던트와 맞닿은 쇄골의 금빛 실이 바늘에 찔린 듯 맹렬하게 요동쳤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통증과 함께, 익숙하면서도 억제되지 않은 살기가 공간 전체를 짓눌렀다.

"누굴 손에 넣겠다고?"

기둥의 그늘을 가르며 걸어 나온 것은 카이젠이었다.

제복 깃을 풀어 헤친 그의 목덜미와 쇄골 부근에는 억제 장치가 부서진 자리에 검붉은 균열이 번져 있었고, 그 균열 사이로 금빛과 붉은빛이 뒤엉킨 마력이 통제 불능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카이젠의 붉은 안광이 바닥에 떨어진 공간 마도석을 거쳐, 대치하고 서 있던 아드리안과 리아나를 차례로 훑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 정원의 공기가 비명 같은 마력의 파열음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