쩌적, 건조한 파열음이 아침의 정적을 갈랐다.
자갈밭 위를 구르던 푸른 공간 마도석이 군화 뒷굽 아래 짓눌려 산산조각 났다. 짓이겨진 결정 파편에서 터져 나온 왜곡 마력이 비산하며 서늘한 회랑 바닥을 긁었다. 카이젠은 발밑의 부스러기 따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한 걸음 내딛었다.
제복 단추가 풀려 젖혀진 그의 목덜미와 쇄골 사이, 부서진 황실 억제 장치의 틈바구니로 검붉은 마력이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그 균열을 단단히 옭아맨 금빛 에테르 실이 맥동할 때마다 카이젠의 턱선이 굳어졌다. 붉게 물든 그의 눈동자가 아드리안의 얼굴에 못 박혔다.
"방금 내 연구실 문짝을 박살 내고 가신 분치고는 발걸음이 참 빠르십니다, 전하."
아드리안은 깨진 마도석을 힐끗 보더니 느릿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 얼굴 위로 특유의 오만한 조소가 피어올랐다.
"순찰대의 눈을 피해 쥐새끼처럼 숨어 다닐 줄 알았더니, 여기까지 기어 나와 남의 물건을 짓밟는 취미가 있으실 줄은 몰랐군요."
"남의 물건?"
카이젠의 목소리는 긁히는 쇳소리처럼 낮고 거칠었다. 그가 리아나와 아드리안 사이의 거리를 완전히 갈라놓듯 비스듬히 앞을 가로막아 섰다. 등 뒤로 리아나의 숨결이 닿자 카이젠의 어깨에 실린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기숙사 창문 너머로 도망친 전학생을 뒤쫓아온 것까진 참아주려 했다만, 벨모트. 네놈이 손에 쥔 게 고작 도주용 마도석 따위였나?"
"도주라니 섭섭한 말씀입니다."
아드리안이 코트 깃을 가볍게 털어내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지적 호기심과 냉혹한 계산이 한데 엉켜 있었다.
"난 에르메스 양에게 가장 합리적인 제안을 건넸을 뿐입니다. 도서관 고문헌실의 뜯긴 페이지가 왜 하필 위버의 결속과 해제에 관한 것이었는지, 전하는 짐작도 못 하셨겠지요. 그 기록의 진짜 가치는 고작 실타래를 끊어내는 따위에 있지 않거든."
카이젠의 눈썹이 사납게 치솟았다.
아드리안은 가슴 안주머니를 툭툭 치며 리아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은빛 머리칼 아래로 굳어 있는 리아나의 표정을 살피는 그의 시선은 탐색하는 관찰자에 가까웠다.
"아카데미 심층 지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잊으셨습니까? 천년 전 대붕괴 당시 봉인된 고대 마도 병기. 그 거대한 동력핵의 잠금을 해제하려면 단순한 고출력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지. 감정의 결을 비틀고 에테르의 색을 직접 매만질 수 있는, 오직 순수한 위버 혈통의 파동만이 그 멈춰버린 심장을 깨울 수 있어."
아드리안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폭로는 차갑고 노골적이었다. 고문헌실의 결속 기록을 뜯어내 숨긴 것은 단순한 은폐가 아니었다. 위버의 존재를 완전히 독점하고, 그 힘을 사슬 삼아 지하의 거대 병기를 제 손안에 쥐려는 명백한 야욕이었다.
"고작 그딴 마도 병기의 열쇠로 쓰겠다고 기록을 찢어 발겼나, 벨모트."
카이젠의 입에서 살을 에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쇄골 부근의 검붉은 마력이 더욱 거칠게 소용돌이치며 주변 대리석 기둥 표면에 미세한 금을 긋기 시작했다.
"감히 내 제국 안에서 그따위 흉계를 꾸미고도 네놈 목이 무사할 줄 알았나?"
"흉계라니요, 전하. 황실이 이 힘을 손에 넣었다면 진작 군사적 도구로 소모했을 텐데요."
아드리안이 카이젠의 쇄골에 드러난 균열을 가리키며 비릿하게 웃었다.
"거울이나 먼저 보시지요. 억제 장치가 박살 난 뒤로 전하의 그 잘난 이성이 얼마나 버티고 있습니까? 통제되지 않는 황실의 피가 위버의 실에 얽혀서 온몸을 태워 먹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전하는 에르메스 양을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일 뿐입니다."
"닥쳐라."
"그녀는 전하의 폭주를 받아내다 함께 타 죽을 연료가 아닙니다. 내 연구실의 통제된 결속진 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유용하게 다뤄져야 할 귀중한 존재지."
‘유용하게 다뤄질 존재.’
그 단어가 공기를 가르는 순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리아나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두 남자는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 끝에 선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한쪽은 통제 불능의 소유욕으로 목줄을 쥐려 하고, 다른 한쪽은 연구와 병기 기동의 도구로 부속품 취급을 하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회피하려던 생각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렸다. 기숙사 창문을 깨고 들어왔던 카이젠의 난폭함도, 달콤한 도피처를 들이밀던 아드리안의 기만도 모두 자신을 주체로 보지 않기에 가능한 폭력이었다.
리아나는 카이젠의 등 뒤에서 벗어나 대리석 바닥을 딛었다.
또각, 하는 구둣발 소리가 살벌하게 맞부딪치던 두 남자의 마력 파동 사이를 파고들었다. 카이젠의 시선이 리아나를 향해 홱 돌아갔고, 아드리안 역시 눈썹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 다 착각이 지나치군요."
리아나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아침 공기를 똑바로 가르며 울렸다. 그녀는 카이젠과 아드리안의 정중앙에 정확히 멈춰 섰다.
"병기의 열쇠 노릇을 할 생각도 없고, 누군가의 폭주를 감당해 줄 사슬이 될 생각도 없습니다. 고문헌실의 기록을 뜯어내든, 황실의 금서고를 뒤엎든 그것은 당신들의 권력 싸움일 뿐이에요."
리아나의 은빛 머리칼 끝에서 희미한 금빛 에테르가 솟아올랐다. 어머니의 은색 펜던트가 옷자락 안쪽에서 단단한 무게감으로 닿아왔다.
"난 누구의 소유물도 되지 않겠다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카이젠의 붉은 눈동자가 짓눌린 분노로 일렁였고, 아드리안의 손끝에서는 푸른 마력의 결이 위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 사이의 팽팽한 균형이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섰다.
리아나의 선언이 공기를 가르자마자, 아드리안의 손끝에서 푸른빛 공간 마법진이 거칠게 회전했다.
"소유물이 되기 싫다면 더욱 내 손을 잡았어야지, 에르메스."
아드리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도서관 후정의 공기가 일그러지며 쐐기 형태의 공간 절단 파동이 카이젠의 턱밑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카이젠은 피하지 않았다. 쇄골의 부서진 금속 틈새에서 솟구친 검붉은 에테르가 그의 손안에서 거대한 검의 형상으로 응축되었다. 붉은 칼날이 사선으로 허공을 베어 넘기자, 날아들던 공간 파동이 두 동강 나며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채앵, 하는 금속성의 파열음이 후정을 뒤흔들었다.
충격파가 정원 중심부로 번지며 백 년 묵은 대리석 분수대의 수조가 세로로 쩍 갈라졌다. 뿜어져 나오던 물줄기가 얼어붙듯 멈췄다가 바닥으로 사납게 쏟아져 내렸다. 회랑의 석조 난간 기둥들이 차례로 부러져 나가며 자갈 바닥 위로 거친 파편을 토해냈다.
"네놈의 세치 혀부터 잘라놓겠다, 아드리안."
카이젠의 목소리는 긁히는 쇳소리에 가까웠다. 붉은 칼날을 쥔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상당 부분 잃은 채 오직 눈앞의 적을 도륙하겠다는 살의로 번뜩였다. 그가 바닥을 박차자 대리석 보도블록이 거미줄처럼 깨져나갔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물러서지 않고 발밑에 이중 왜곡 진을 펼쳐 카이젠의 동선을 빗겨 냈다. 붉은 참격이 허공을 가르며 뒤편의 거대한 주목나무 세 그루를 단숨에 베어 넘겼다.
육중한 통나무가 쓰러지는 굉음 속에서, 아드리안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비릿한 비웃음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아직도 모르는 겁니까, 전하? 그 무식한 칼질을 휘두를수록 제 목을 조르는 게 누구인지?"
아드리안이 카이젠의 쇄골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 사이, 번뜩이는 금빛 매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머릿속을 헤집는 그 광증이 위버의 실에 신경계를 먹혀가는 증상인 줄도 모르고 날뛰는 꼴이라니."
리아나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뭐라고?"
카이젠의 움직임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드리안이 거리를 벌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황실의 억제 장치는 감정을 억누르는 금속 덩어리가 아니라, 숙주의 중추 신경계에 직접 박아 넣는 마력 핵입니다. 그런데 새벽에 에르메스 양이 살겠다고 그 핵에 위버의 에테르를 역류시켰지. 깨진 억제 장치의 파편을 타고 금빛 실이 전하의 뇌와 심장 깊숙이 파고든 겁니다."
아드리안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리아나를 향했다가 다시 카이젠에게로 박혔다.
"지금 전하가 느끼는 그 끔찍한 갈증, 이성을 갉아먹는 충동, 에르메스 양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집착.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닙니다. 위버의 실이 전하의 마력을 양분 삼아 신경계를 완전히 잠식해 들어가는 신체적 거부 반응일 뿐이지. 전하는 지금 산 채로 먹히고 있는 겁니다."
리아나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새벽녘 기숙사 방에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카이젠을 밀어내기 위해 억제 장치 속으로 쑤셔 넣었던 금빛 에테르.
그것이 단순한 충격파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체내에 남아 카이젠의 신경계를 잠식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상대를 무력화하려던 방어 기제가 카이젠의 생명을 서서히 옥죄는 독이 되어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을 비틀며 피 묻은 웃음을 흘렸다.
"먹혀 들어간다라."
카이젠이 쇄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이성을 완전히 잃고 괴물이 될 텐데요."
"상관없다. 이 실이 내 숨통을 끊어놓든, 내 영혼을 갈아 마시든."
카이젠의 시선이 리아나에게 닿았다. 그 붉은 눈 속에는 두려움 따위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타오르는 집념만이 존재했다.
"그 대가로 이 계집이 영원히 내게 묶인다면, 기꺼이 마셔주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카이젠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검붉은 마력이 치솟았다. 아카데미 본관 상공을 보호하고 있던 도서관의 외곽 방어 결계가 그의 마압을 견디지 못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투명한 유리창에 금이 가듯 날카로운 균열음이 울려 퍼졌다.
"미쳤군. 완전히 돌았어."
아드리안의 안색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품속에서 공간 마도석 파편을 꺼내 들며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오라가 정면으로 부딪치면 도서관 후정 일대는 물론 고문헌실 전체가 날아가고, 중앙 감시탑의 원로원 마법사들이 즉각 강림할 터였다.
카이젠의 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낙하했고, 아드리안의 왜곡 진이 푸른빛을 토해내며 팽창했다.
그 파괴적인 충돌의 한복판으로 은빛 인영이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그만둬요!"
리아나가 두 사람 사이의 정점에 서며 양손을 펼쳤다. 어머니의 은색 펜던트가 옷 속에서 맹렬한 열기를 뿜어냈고,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수만 가닥의 금빛 에테르 실이 부채꼴로 터져 나왔다.
금빛 실들은 허공에서 촘촘한 직조 벽을 이루며 카이젠의 붉은 검날과 아드리안의 공간 파동을 동시에 휘감았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금빛 장벽이 휘청였으나 깨어지지 않았다. 리아나는 두 남자가 뿜어내는 상반된 마력의 궤도를 양옆으로 비틀어 허공으로 튕겨 올렸다.
빗겨 나간 마력 덩어리들이 하늘로 치솟으며 도서관 상공의 방어 결계를 산산조각 냈다. 쨍그랑하는 파열음이 청명한 아침 하늘을 가득 메웠고, 결계 파괴를 알리는 붉은 경보 마법진이 아카데미 전역의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서관 후정의 상공을 뒤덮은 붉은 경보 마법진이 거대한 동심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둔중한 타종 소리가 중앙 감시탑의 꼭대기에서부터 메아리치며 아카데미 서편 숲 전체를 울렸다. 석조 바닥에 박혀 있던 파편들이 그 진동에 맞춰잘게 떨려 나갔다.
감시탑의 경비 병력과 황실 원로원 소속 마법사들이 현장에 들이닥치기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몇 분 남짓이었다.
깨진 결계의 잔해 사이로 아드리안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상공에서 번쩍이는 붉은 경보진과, 바닥에 흩어진 왜곡 마도석의 푸른 조각들을 빠르게 훑었다. 손목 안쪽의 혈관이 과부하로 검푸르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결계를 통째로 날려 버릴 줄은 몰랐는데."
아드리안이 옷자락에 묻은 돌가루를 털어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원로원 늙은이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올 테지. 지금 여기서 황태자 전하와 나란히 묶여 취조를 당하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그는 뒤틀려 부서진 바닥에서 아직 마력이 잔존하는 공간 마도석 파편 두 개를 재빠르게 주워 담았다. 붉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눈매가 리아나를 집요하게 꿰뚫었다.
"기억해 둬, 에르메스. 저 작자는 널 지키려는 게 아니야. 제 목줄을 쥔 주인을 자기 발밑에 가두려는 폭군일 뿐이지. 결국 네가 기댈 곳은 내 연구실밖에 없을 거다."
아드리안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림자 회랑의 석주 뒤편에서 일렁이던 왜곡 진이 그의 신체를 집어삼키며 순식간에 흔적을 지웠다. 공기 중에 지독한 마나의 잔향만을 남긴 채였다.
후정의 서늘한 바람 속에 남겨진 것은 이제 단 둘뿐이었다.
"큭……!"
낮게 짓눌린 신음과 함께 카이젠의 몸이 크게 기울었다.
리아나가 튕겨낸 에테르의 충격과 억제 장치가 부서진 자리를 타고 번진 마력의 역류가 한꺼번에 황태자의 혈도를 덮친 탓이었다. 카이젠의 입술 틈새로 검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가 들고 있던 칼날 형태의 붉은 에테르가 형체를 잃고 산산이 흩어졌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카이젠의 한쪽 무릎이 차가운 석판 바닥에 닿았다.
그의 옷깃은 쇄골 부근에서 배어 나온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부서진 금속 파편이 박힌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열기는 살을 태울 듯 뜨거웠고, 그 주위를 리아나의 금빛 실이 독초의 덩굴처럼 지독하게 휘감고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바들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젠의 고개는 꺾이지 않았다. 핏발이 선 붉은 눈동자가 오직 리아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리아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던 찰나였다.
탁!
바닥을 짚고 있던 카이젠의 거친 손이 허공을 갈라 리아나의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뼈가 삐걱거릴 정도로 억센 악력이었다.
"놓으세요."
리아나가 손목을 비틀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나 카이젠은 피 묻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놓으라고?"
카이젠이 턱 끝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을 개의치 않은 채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목소리는 억제 장치의 족쇄를 완전히 벗어던진 탓에 날것의 마찰음을 내며 긁혀 나왔다.
"네가 내 혈관에 이 빌어먹을 실을 처박아 넣었다. 내 마력을 뒤흔들고, 내 이성을 갈가리 찢어놓았어."
카이젠의 눈동자에 위험한 광열이 번득였다.
"내 숨통을 네 멋대로 쥐어짰다면, 끝까지 감당해야지. 안 그런가, 에르메스?"
"그건 당신이 펜던트를 빼앗으려 억지로 결속을 부쉈기 때문이에요. 자초한 결과입니다."
"자초했든 저주를 받았든 상관없다."
카이젠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비릿한 혈향이 섞인 숨결이 리아나의 손등을 스쳤다.
"내 신경계를 잠식하고 내 심장을 옥죈 게 너라면, 넌 평생 내 곁에서 떨어질 수 없다. 얌전히 내 손안에서 숨 쉬어라. 내 숨줄을 쥐고 흔든 대가를 네 존재 전체로 치러."
그것은 구걸이 아니었다. 구원을 바라는 자의 태도도 아니었다. 자신의 숨통을 쥐어짜는 상대마저 소유물로 옭아매려는, 제국 황태자 특유의 오만하고 폭력적인 억압이었다.
경보 마법진의 붉은빛이 후정의 석조 난간을 피처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회랑 저편에서 갑주를 갖춰 입은 순찰대와 원로원 집행관들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져 왔다. 리아나의 은색 펜던트가 가슴팍에서 규칙적으로 박동하며, 카이젠의 체내에 파고든 금빛 실의 파동을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었다.
그의 굳은 턱 밑으로 굵은 핏줄이 곤두서 있었고, 억제 장치가 깨진 상처를 통해 리아나의 에테르를 흡수하려는 맹목적인 갈증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남자는 무너지지 않는다.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하는 순간에도 상대를 굴복시키려 든다.
그러나 리아나는 더 이상 어제의 위축된 전학생이 아니었다. 남의 눈치를 살피며 잿빛 장막 뒤로 숨어들던 도망자가 아니었다.
리아나는 손목을 비틀어 빼내는 것을 멈췄다. 대신 그녀는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금빛 에테르가 날카로운 실바늘의 형태로 응집되었다.
"명령하지 마세요, 카이젠."
기숙사에서 그러했듯, 단 한 톨의 경칭도 담기지 않은 서늘한 이름이 리아나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카이젠의 눈동자가 그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황실의 권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신을 꿰뚫어 보는 그녀의 단단한 시선에 억눌린 갈증과 전율이 스쳤다.
리아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손목을 옥죄고 있던 카이젠의 손가락 마디를 자신의 손으로 거칠게 내리쳐 쳐냈다.
짝, 하는 마찰음과 함께 억센 구속이 풀려났다.
"당신의 소유물이 되는 건 거절하겠어요."
리아나의 금색 눈동자가 태양빛을 반사하며 투명하게 타올랐다. 그녀는 카이젠이 다시 손을 뻗을 틈을 주지 않고,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좁혀졌다.
"당신이 날 통제하는 게 아니에요."
상처를 짓눌러 억지로 통증을 가하던 기숙사에서의 방어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리아나는 쇄골의 상처 대신, 허공에서 사납게 일렁이는 카이젠의 붉은 마력 오라를 향해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수천 가닥의 에테르 실이 폭주하는 마력의 결 사이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은색 펜던트가 격렬하게 공명하며 타인의 감정과 파동을 지배하는 위버의 권능을 터뜨렸다. 제멋대로 날뛰던 붉은 열기가 정교하게 짜인 금빛 매듭에 얽혀들며 카이젠의 체내 마력 흐름을 완벽히 장악해 나갔다.
"내가 당신을 묶는 겁니다."
리아나의 단호한 선언과 함께, 폭발적인 금빛 파동이 무릎 꿇은 카이젠의 전신을 집어삼키며 후정의 대리석 바닥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