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고 도서관 상공을 뒤덮은 경보 마법진이 붉은빛 파편을 토해내고 있었다. 산산조각 난 방어 결계의 파편들이 서리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후정의 깨진 대리석 광장은 두 사람의 마력이 맞부딪친 여파로 매캐한 석재 냄새에 휩싸여 있었다.
리아나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금빛 에테르 실은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실타래처럼 가늘었으나 강철보다 질기게 휘어지며, 카이젠의 쇄골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마력의 폭풍 속으로 파고들었다.
치익, 살갗이 타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렸다.
카이젠의 체내에서 요동치던 파괴적인 기운이 금빛 실과 맞물리며 거세게 요동쳤다. 부서진 황실 억제 장치의 틈바구니는 그의 마력을 제어하기는커녕 불길에 기름을 붓듯 통제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붉은빛이 리아나의 손가락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솟구쳤으나, 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는 대신 금색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며 손가락을 꺾었다.
"흐트러뜨리지 마."
리아나의 입술 사이로 단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실의 매듭을 교차시켜 카이젠의 어깨와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주요 마력 혈로를 단단히 죄었다. 에테르의 가닥들이 그의 굳은 근육과 신경계를 감싸 쥐며, 제멋대로 날뛰던 붉은 파동의 마디를 하나씩 억누르기 시작했다.
억제 장치가 파괴되며 폭주하던 카이젠의 거친 숨결이 일순 멎었다.
"큭……!"
카이젠의 목구멍에서 밭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억지로 틀어막힌 붉은 에테르가 체내로 역류하며 뼈마디를 짓눌렀으나, 리아나가 엮어낸 금빛 매듭은 그 충격을 정교하게 분산시키고 있었다. 그의 시야를 붉게 물들이던 거부 반응의 통증이 가라앉고, 대신 날카로운 냉기가 온몸의 핏줄을 타고 흘러들었다.
자신의 마력이, 제국의 그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던 힘이 완전히 타인의 손아귀에서 재단당하고 있었다.
카이젠은 바닥을 짚고 있던 주먹을 바득 갈며 고개를 들었다. 턱 끝으로 흘러내린 피가 대리석 바닥에 붉은 점을 찍었다. 전신을 옥죄는 금빛 사슬 너머로,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자신을 굽어보는 리아나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형언하기 힘든 낭패감과 함께 지독한 갈증이 타올랐다.
호흡을 되찾은 카이젠이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금빛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그의 쇄골을 날카롭게 압박했다.
"내 몸을 묶었으니,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에르메스?"
카이젠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피비린내 섞인 목소리였으나 그 속에는 상대를 시험하듯 던지는 서슬 퍼런 집착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굴복당한 상태에서도 끝내 물러서지 않는 오만함이었다.
리아나는 손가락에 감긴 실을 한 치도 늦추지 않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
"원로원의 개들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어요. 당신이든, 나든."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박살 난 후정 회랑 너머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챙, 채쟁!
은빛과 흑색이 섞인 흉갑을 입은 무장 집행관 열두 명이 석조 기둥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아카데미 순찰대가 아니었다. 원로원 직속 정예 집행관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죄수를 결박할 때 쓰는 억제 창이 쥐여 있었고, 가슴팍에는 벨모트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인장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상공의 결계가 깨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포위망이었다. 아드리안이 도서관 서고에서부터 짜놓은 덫이 작동하고 있었다.
집행관들의 선두에 선 집행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낭독했다.
"황태자 전하의 신변 위협 및 불법적인 금기 술식 발현을 확인했다. 벨모트 가문의 긴급 안건 발의에 따라 원로원의 승인이 떨어졌다. 전하의 체내에 침투한 미등록 위버 개체를 즉시 구속한다."
그들의 발밑에서 잿빛 마법진이 원형으로 펼쳐졌다. 단순한 포획 진이 아니었다. 고대 서고의 양피지에서나 볼 법한, 에테르의 파동을 강제로 응고시키는 결속 마법이었다. 아드리안이 빼돌렸던 그 도면의 술식이었다.
"벨모트 놈이 기어이 쥐새끼처럼 수를 썼군."
카이젠이 싸늘하게 뇌까리며 허리춤의 검자루를 쥐려 했다. 살기가 번득이는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솟구쳤다. 그러나 아직 체내 마력이 온전히 안정되지 않은 탓에, 검을 뽑으려는 순간 쇄골의 균열에서 다시금 붉은 불꽃이 튀며 그의 몸이 기우뚱 흔들렸다.
"움직이지 마세요."
리아나가 카이젠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녀는 카이젠을 자신의 등 뒤로 밀쳐내지 않았고, 그에게 의탁하지도 않았다. 오직 두 사람 사이에 연결된 실을 가볍게 튕겼을 뿐이다.
팽!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카이젠의 체내에 묶여 있던 붉은 오라 일부가 리아나의 금빛 에테르를 타고 허공으로 끌어 올려졌다. 두 개의 이질적인 파동이 리아나의 손바닥 안에서 뒤엉키며 구체의 형태로 압축되었다.
"전하의 뒤에 숨는다고 무사할 줄 아느냐!"
집행관들이 억제 창을 일제히 겨누며 돌진해 왔다.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족쇄들이 뱀처럼 바닥을 기어오르며 리아나의 발목을 노렸다.
리아나는 망설임 없이 손안의 응축된 마력을 바닥을 향해 내리꽂았다.
"내가 숨을 곳은 내가 정해요."
콰아아앙!
카이젠의 거친 폭열과 리아나의 정밀한 위빙이 충돌하며 발생한 폭압이 광장 전체를 강타했다. 대리석 바닥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 솟구치며 짙은 암석 분진과 에테르 연막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집행관들이 전개하던 잿빛 결속진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크악!"
"전방 방벽 전개! 놓치지 마라!"
집행관들의 당혹스러운 고함이 자욱한 먼지 속으로 흩어졌다. 시야가 완벽히 차단된 찰나, 리아나는 카이젠의 손목을 단단히 낚아챘다. 그의 손은 피와 식은 에테르로 차가웠으나, 실로 연결된 맥박만은 거칠게 뛰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리아나는 도서관 후정 구석, 주목나무 그늘에 가려져 있던 철제 관리용 덧문을 발로 차 열었다. 아카데미 심층 지하와 연결된 폐쇄 회랑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그녀는 카이젠을 끌어당기며 망설임 없이 어두운 지하 계단 속으로 몸을 던졌다.
지상에서는 집행관들의 호각 소리와 무너진 석재가 굴러떨어지는 굉음이 길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눅눅한 먼지와 삭은 양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중앙 도서관 지하 2층, 수십 년간 인적이 끊긴 폐쇄 고문서 보관소 회랑은 한낮의 빛조차 닿지 않는 영구적인 암흑에 잠겨 있었다. 육중한 철제 문을 등 뒤로 닫아걸자마자, 머리 위 지상에서 울리던 집행관들의 호각 소리와 석재 부서지는 소음이 두꺼운 돌벽 너머로 둔탁하게 잦아들었다.
리아나는 어둠 속에서 벽면의 차가운 화강암을 짚으며 숨을 내쉬었다. 바로 곁에서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턱밑까지 닿았다.
카이젠의 장신이 휘청거리며 리아나의 어깨를 짓누르듯 기댔다. 억제 장치가 부서진 그의 쇄골 틈에서는 여전히 검붉은 불씨 같은 마력이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금빛 실로 엮어 억눌러 놓은 신경계가 마력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탓이었다.
"물러서요."
리아나는 어깨를 거칠게 비틀며 카이젠을 밀어냈다. 그러나 카이젠은 물러나는 대신, 피와 그을음으로 엉망이 된 오른손을 뻗어 리아나의 목덜미 바로 옆 벽면을 쾅 내리찍었다. 어둠 속에서도 핏빛으로 번뜩이는 두 눈이 리아나의 얼굴을 집요하게 옭아맸다.
"나를 끌고 내려온 건 너다, 리아나 에르메스."
낮게 긁히는 음성이 좁은 석조 통로를 울렸다. 고열에 들뜬 입술 사이로 서늘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내 마력을 제멋대로 쥐어짜 폭발을 일으키고, 황실의 집행관들 면전에 흙먼지를 뿌려댄 배짱은 어디로 가고 이제 와서 물러서라는 거지? 내 명줄을 네 손가락 끝에 묶어놓은 건 네 녀석이다."
카이젠의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릴 때마다, 그의 몸속 깊숙이 파고든 금빛 에테르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실을 쥔 리아나의 손가락 끝마디마저 찌릿한 고통이 전해져 왔다. 카이젠의 오라는 여전히 날 선 칼날처럼 거칠었고, 억제 장치의 족쇄가 풀린 황태자의 본능은 자신을 결속한 상대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들고 있었다.
리아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공에 늘어진 금빛 에테르 실타래를 손가락에 두 바퀴 감아 쥐고는, 단호하게 손목을 꺾었다.
츠츠츳!
카이젠의 쇄골에 박힌 금빛 매듭이 단번에 죄어들었다.
"큭……!"
카이젠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쇄골의 파열흔을 타고 흐르던 붉은 불꽃이 실의 압박에 짓눌려 강제로 사그라들었다. 벽을 짚고 있던 그의 팔에 핏줄이 곤두서며 팔꿈치가 떨려 내려앉았다. 그의 체내 마력 순환이 리아나의 손짓 한 번에 일순간 멎었다가 다시 억지로 흐르기 시작했다.
리아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경고했을 텐데요. 당신의 소유물 따위는 되지 않는다고."
카이젠의 턱을 꿰뚫을 듯 쏘아보는 리아나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내가 당신의 오라를 장악한 건 살기 위해서였지, 당신의 맹목적인 집착에 어울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실을 쥐고 있는 건 나예요, 전하.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이 매듭을 죄어 당신의 마력 핵을 터뜨려버릴 수도 있다는 걸 잊은 건가요?"
서슬 퍼런 살기였다. 목숨을 구걸하거나 타협을 바라는 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언제든 상대를 파멸로 끌고 들어갈 준비가 된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결연함이었다.
카이젠은 턱을 바짝 치켜든 채 자신을 노려보는 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쇄골을 파고드는 격통 속에서도,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분노 대신 기이한 희열과 전율이 번져 나갔다. 명령과 복종에만 익숙했던 제국의 황태자에게, 자신의 숨통을 틀어쥔 채 짓밟으려 드는 존재는 난생처음이었다.
카이젠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피비린내 나는 미소였다.
"소유가 아니라면 공범이다. 이미 내 심장에 네 실을 처박은 순간부터."
카이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짓눌렸던 무릎이 펴지며 본래의 위압적인 체구가 리아나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더는 이전처럼 무작정 팔을 뻗어 결박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리아나의 손가락에 감긴 금빛 실을 한 번 응시한 뒤, 젖혀진 옷깃을 대수롭지 않게 여몄다.
"네 말이 맞다. 이 실을 끊지 못하는 한, 내 목숨줄은 네 손에 있지. 하지만 반대로 네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한, 너 역시 이 저주에서 혼자 벗어날 수는 없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끝내줄 수 있어요."
"해보던가."
카이젠이 턱짓으로 자신의 쇄골을 가리켰다.
"하지만 네가 그럴 위인이었다면, 도서관 후정에서 날 미끼로 던져두고 혼자 달아났겠지. 굳이 내 마력을 조율해가며 이 쥐구멍까지 함께 기어들어 올 이유가 없었어."
리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오만함은 혐오스러웠으나, 폐부를 찌르는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카이젠의 거대한 붉은 오라와 체내 마력은 이미 리아나의 에테르와 복잡한 매듭으로 얽혀 있었다. 그를 즉사시킬 만큼의 충격을 가한다면, 그 반작용은 실을 타고 고스란히 리아나의 영혼으로 역류할 터였다.
리아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털어 실의 긴장을 늦추었다. 카이젠의 호흡이 한결 가라앉았다.
"당신과 말싸움으로 낭비할 시간은 없어요. 집행관들이 곧 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 테니까."
"아니, 들어오지 못해."
카이젠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언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회랑 저편, 어둠 속으로 길게 뻗은 통로를 향했다.
"방금 지상에서 전개된 건 단순한 추격 마법이 아니었다. 원로원 특무대가 사용하는 고대 구속진이었지. 벨모트 가문의 문장이 찍힌 긴급 지령서가 없었다면 집행관들이 감히 황태자인 내게 그따위 결속진을 펼칠 수는 없어."
"아드리안이 움직였다는 뜻이군요."
"그놈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카이젠이 바닥에 떨어진 낡은 양피지 뭉치를 군화로 툭 걷어찼다. 건조한 마찰음이 복도에 울렸다.
리아나는 회랑 벽면을 따라 흐르는 마력의 결을 살폈다. 위버의 시야 속에서, 석벽 안쪽에 매설된 에테르 배관들이 기이한 색채로 요동치고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비상 계단과 도서관 본관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 쪽 격벽에는 짙은 자줏빛의 원로원 봉쇄 결계가 이중, 삼중으로 덧칠해져 있었다. 뚫고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두터운 차단막이었다.
반면, 단 한 곳.
지하 3층을 넘어 아카데미 심층 지하로 이어지는 거대한 나선형 하강 통로 쪽에는 그 어떤 차단 결계도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길을 안내하듯, 바닥의 유도 마법석들만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며 하강로를 비추고 있었다.
"보이나?"
카이젠이 서늘한 어조로 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 역시 통로 끝의 푸른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서관 지상의 모든 퇴로는 막혔다. 오직 심층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만 훤히 열려 있지. 쥐새끼를 덫으로 몰아넣는 몰이 사냥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리아나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아드리안이 고문헌실의 기록을 뜯어내며 남겼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카데미 심층 지하에 잠든 고대 마도 병기의 동력핵. 그리고 그것을 깨우기 위해 필요한 순수한 위버 혈통의 파동.
아드리안은 도서관 결계를 깨뜨려 소란을 일으킨 순간부터, 원로원 집행관들을 도구로 써서 리아나를 이 회랑으로 몰아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젠과의 충돌조차 그에게는 리아나를 지하로 떨어뜨리기 위한 완벽한 명분에 불과했다.
"저 아래에 아드리안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리아나가 중얼거렸다.
"그놈이 파놓은 함정의 주둥이다. 발을 들이는 순간 철창이 닫히겠지."
카이젠이 허리춤의 검자루를 매만졌다. 검집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내는 그의 손길은 거칠었으나, 흐트러졌던 중심은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어쩔 셈이지? 여기서 버티다가 원로원의 포위망에 갇혀 해부대 위에 오를 텐가, 아니면 저 쥐새끼의 면상을 직접 보러 내려갈 텐가."
리아나는 자신을 시험하듯 바라보는 황태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깔아놓은 판 위에서 꼭두각시처럼 춤출 생각 역시 추호도 없었다.
"함정인 걸 알면서 들어가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리아나가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군화가 푸른 유도등이 켜진 나선형 계단의 첫 단을 단단히 디뎠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은발이 서늘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함정을 통째로 부숴버릴 생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져요."
리아나는 손가락 끝의 금빛 실을 가볍게 당겨 카이젠의 마력 흐름을 일정한 보폭으로 맞추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지하 깊은 곳을 향해 규칙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저 아래, 마도 병기가 잠든 거대한 격리 격벽의 냉기가 발목을 휘감아 올라오고 있었다.
나선형 석조 계단이 끝나는 지점은 아카데미 심층 지하 3층, 천년 전 대붕괴의 잔해가 가라앉은 최하층 격리 구역이었다.
통로 벽면에 박힌 푸른 유도등이 꺼지자, 거대한 지하 공동의 묵직한 냉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눈앞을 가로막은 것은 아카데미 설립 이전부터 자리를 지켰다는 흑철 재질의 거대 아치 관문이었다. 관문 표면에는 잠든 마도 병기의 기동을 봉인한 고대 술식이 핏줄처럼 얽혀 있었으나, 그 문양들은 마력이 차단된 채 메마른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치 관문 한가운데, 은회색 중갑을 갖춰 입은 사내가 버티고 서 있었다. 원로원 정예 집행대를 이끄는 집행대장이었다.
그는 카이젠과 리아나가 나타났음에도 무기를 겨누지 않았다. 대신 가슴팍에 박아 넣은 둥근 왜곡 마도석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마도석의 푸른 결정 표면에서 에메랄드빛 빛무리가 수직으로 솟구쳤다. 공기가 파르르 떨리며 입체적인 공간 왜곡 현상이 일어나더니, 단정하게 차려입은 붉은 머리칼의 환영이 허공에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아드리안 벨모트였다.
연구실에 편안히 앉아 있는 듯 턱을 괸 채 나타난 아드리안의 허상은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생각보다 발걸음이 빨랐네, 리아나. 황태자의 폭주하는 마력을 달고 그 좁은 통로를 무사히 빠져나올 줄은 몰랐는데."
투명한 녹색 눈동자가 리아나의 손가락 끝에서 카이젠의 목덜미로 이어진 금빛 실을 집요하게 훑었다. 아드리안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부드러웠으나, 그 뒤에 어른거리는 오라는 짙은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원로원을 움직여 도서관 지상을 완전히 틀어막은 게 역시 너였군, 아드리안."
카이젠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하 암벽을 울렸다. 제복 소매를 걷어붙인 채 검자루를 틀어쥔 카이젠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쇄골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마력이 리아나의 금빛 실과 맞부딪치며 미세한 파찰음을 냈다.
"반역죄로 가문 전체의 목을 날려도 할 말이 없을 텐데. 감히 황실 원로원의 집행관들을 사병처럼 부려 황태자의 퇴로를 막아?"
"반역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전하."
아드리안의 환영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말투는 예의를 갖추고 있었으나 음색에는 조롱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저는 그저 폭주 직전의 위험인물을 격리하고, 도서관 결계를 파괴한 주범을 확보하라는 원로원의 규정을 성실히 이행하도록 조언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지금 그 꼴로 지상에 올라가 보았자, 원로원 마탑주들이 전하의 쇄골에 박힌 부서진 억제 장치를 보고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당장 제1 격리탑의 마력 차단 감옥으로 끌고 가 황태자 폐위안을 발의하겠지요."
아드리안은 카이젠을 완전히 배제하듯 시선을 돌려 리아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허상 너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지하로 걸어 들어와, 리아나. 널 괴물로 만들려는 저 황태자에게서 벗어나게 해줄 테니."
리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아치 관문을 올려다보았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오래전 봉인된 마도 병기의 잔열이 비정상적인 파동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상대의 처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오만함이 실려 있었다.
"알고 있잖아. 그 황태자의 신경계를 잠식한 네 에테르 실은 강제로 떼어낼 수 없어. 시간이 지날수록 전하의 마력은 네 생명력을 갉아먹을 테고, 너 역시 그 파멸적인 갈증에 묶여 영원히 황실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지만 저 거대 아치 문 너머, 고대 병기의 심장부에는 대붕괴 이전의 정화석이 잠들어 있어. 위버의 매듭을 마력 손상 없이 풀어낼 유일한 열쇠지."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듯 환영의 팔을 뻗었다.
"문을 열어. 네 손끝에 흐르는 순수한 위버의 파동이라면 저 봉인 관문은 저절로 풀려. 안으로 들어오면 황태자의 연결도 끊어내고, 원로원의 추적도 내가 완벽히 차단해 줄게. 내 곁에 오면 넌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어."
카이젠의 눈빛이 살의로 번뜩였다.
"천박한 혓바닥을 잘라놓지."
서걱, 소리와 함께 카이젠이 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붉은 마력이 검신을 타고 칼날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가 검을 휘둘러 집행대장의 가슴에 박힌 마도석을 부숴버리려 발을 내딛는 찰나였다.
리아나가 카이젠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손가락 끝에 걸린 금빛 실을 가볍게 비틀자, 카이젠의 체내 마력 순환이 순간적으로 꺾이며 그의 거친 발걸음이 바닥에 못 박혔다. 카이젠이 턱을 굳힌 채 리아나를 내려다보았지만, 리아나는 황태자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리아나는 반 보 앞으로 걸어 나가 아드리안의 환영을 마주했다.
그녀의 금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오히려 아드리안이 드리운 짙은 검은빛 오라의 이면, 도서관 고문헌실의 찢겨 나간 기록과 그가 빼돌린 고대 결속진의 잔상이 그녀의 시야에 선명하게 겹쳐졌다.
"당신은 황태자의 폭주를 잠재우려는 게 아니에요."
리아나의 서늘한 목소리가 거대한 지하 공간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도서관 결계를 일부러 깨뜨려 경보를 울린 것도, 원로원을 움직여 지상의 모든 격벽을 닫고 오직 이 하강로만 열어둔 것도 전부 하나의 목적 때문이었죠."
아드리안의 미소가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고문헌실에서 뜯어낸 양피지에 적혀 있던 게 무엇인지 내가 모를 줄 알았나요? 천년 전 봉인된 마도 병기의 동력핵은 일반적인 마력으로는 깨어날 수 없어요. 오직 감정의 오라를 물질화할 수 있는 순수한 위버 혈통의 파동만이 그 핵의 시동어가 되죠."
리아나는 아치 관문 표면의 문양들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저 문을 열라는 건, 나를 피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봉인실 안으로 나를 밀어 넣어 마도 병기의 심장을 강제로 뛰게 만들려는 거잖아. 병기가 깨어나는 순간 내 생명력은 동력핵에 흡수되어 바스러질 테고, 당신은 벨모트 가문의 이름으로 그 병기를 손에 쥐어 원로원과 황실을 동시에 굴복시키려는 속셈이지."
지하의 공기가 얼어붙듯 가라앉았다. 집행대장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스쳤고, 허상 속 아드리안의 표정에서 신사적인 가면이 순식간에 벗겨져 나갔다.
"리아나. 넌 지금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어."
아드리안의 음색이 거칠어졌다.
"저 상태의 황태자는 언제든 널 집어삼킬 괴물이야. 내 손을 잡지 않으면 넌 이 지하에서 살아서 나갈 수 없어. 내가 준비한 결속진을 통과해야만—"
"천박한 거짓말은 그만둬요, 아드리안."
리아나가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집행대장의 가슴에 박힌 마도석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손끝에서 피어오른 금빛 에테르 실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허공을 꿰뚫으며 팽팽한 살기를 뿜어냈다.
"난 누구의 소유물도, 사슬도 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카이젠의 광증도 내 손으로 억누를 것이고, 내 운명 역시 내가 선택해요. 당신의 야망을 위해 문을 열어줄 열쇠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리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아드리안의 일그러진 얼굴을 서늘하게 꿰뚫었다.
"아드리안 벨모트. 당신이 파놓은 이 덫은, 여기서 끝이에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리아나의 손끝에서 쏘아진 금빛 실이 아치 관문 앞의 공간 마도석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