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공녀의 마법 로맨스 · 총 3화 · AI 작가 윤슬

제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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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별빛 왕궁 최상층에 위치한 엘리시아의 처소 안으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수정 구슬에서 뿜어져 나온 백은빛 광채가 방 안을 대낮처럼 밝혔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공기 중에는 벼락이 치고 간 자리처럼 서늘하고 팽팽한 마나의 잔향이 맴돌았다. 미처 가라앉지 않은 빛의 티끌들이 눈앞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쾅.

거친 굉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처소의 두꺼운 문이 거칠게 밀려 열렸다.

은빛 테두리가 둘러진 검은색 제복을 입은 사내, 카엘 드 아르테미스였다. 그의 긴 손가락은 이미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칼집에서 세 뼘가량 뽑혀 나온 푸른빛 도신이 차가운 복도 등불을 반사하며 살기등등한 빛을 번뜩였다.

카엘의 시선이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침대, 창가, 어지럽혀진 공기, 그리고 홀로 서 있는 엘리시아에게로 내려앉았다. 밤하늘처럼 짙은 흑발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엘리시아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렸다. 엷은 살갗 아래에 낙인이라도 찍힌 듯, 손바닥 한가운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선명한 여덟 갈래로 뻗은 은빛 별 모양의 문양이 옷자락 너머로도 미세한 열기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물러서십시오."

카엘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하며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가죽 부츠가 대리석 바닥을 찍어 누르는 소리가 서늘하게 처소를 메웠다. 그는 칼집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채, 사방의 기운을 탐색하듯 검 끝을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방금 이 방 전체의 마나 파동이 위험 수치까지 치솟았습니다. 궁정 외곽의 감응석이 전부 반응할 정도의 충격이었습니다. 침입자입니까?"

"아닙니다."

엘리시아는 턱을 치켜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인간 제국의 음습한 별채에서 버려진 채 스무 해를 버텨왔던 방어기제가 즉각적으로 날을 세웠다. 그녀는 자신의 공간을 불쑥 헤집고 들어온 이 위압적인 대공을 향해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보시다시피 방 안에는 저 혼자뿐입니다, 대공 전하. 허락도 없이 남의 처소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스트라엘의 예법입니까?"

"예법을 따질 상황이 아닙니다. 왕가의 피를 이은 자가 이 처소에 머물고 있고, 어둠의 세력이 언제 결계를 뚫고 들어올지 모르는 전시 상황입니다. 작은 흔들림 하나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카엘의 시선이 엘리시아의 얼굴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은빛으로 변해버린 머리칼,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뒤로 감추어진 그녀의 오른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손을 뒤로 숨기지 마십시오."

카엘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제 불과 서너 걸음에 불과했다. 제복 옷깃에 달린 은제 훈장이 서늘한 금속음을 냈다.

"무엇을 감추고 계십니까."

"내 몸을 내가 어떻게 두든 전하께서 상관할 바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상관할 바가 아니라니요."

카엘의 입꼬리가 냉랭하게 비틀렸다.

"공녀께서 방금 만진 것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왕가의 마나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공명 수정입니다. 제어되지 않은 마력을 함부로 쏟아부었다면 왕궁 최상층의 결계가 통째로 무너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시는군요."

엘리시아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자각이요? 이곳에 끌려온 지 고작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설명해 준 사람도 없었지요. 그저 별빛 공녀라는 거창한 이름을 씌워놓고 이 방에 밀어 넣은 건 당신들이었습니다."

그녀는 등 뒤로 감추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손바닥 안쪽에서 고동치는 열감이 손목을 타고 맥박과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방치해 두고, 이제 와서 위험을 운운하며 칼을 들이미는 겁니까? 무책임한 건 내가 아니라, 운명이라는 핑계로 날 이곳에 세워둔 당신들입니다."

엘리시아의 반박은 거침이 없었다. 제국의 황궁에서도 그녀는 늘 침묵 속에 버려져 있었지만, 부당한 손길 앞에서는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 악착같은 생존 방식이 이 낯선 마법 세계에서도 고스란히 튀어나왔다.

카엘은 대답 대신 검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차르륵, 소리와 함께 장검이 칼집 안으로 완전히 물러앉았다. 그러나 그 푸른 눈동자에 서린 압박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운명을 탓하기 전에 현실을 보십시오. 당신이 진짜 별빛 왕가의 후계자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불려 온 빈 껍데기인지 증명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카엘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엘리시아의 오른쪽 손목을 정확하고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놓으세요!"

엘리시아가 팔을 빼내려 했으나, 굳은살이 박인 기사의 손아귀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카엘은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기지 않는 대신, 숨겨진 오른손을 강제로 앞으로 끌어내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순간, 카엘의 몸이 굳었다.

방 안을 채운 침묵 속에서, 엘리시아의 하얀 손바닥 한가운데 새겨진 문양이 은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단순한 흉터나 낙인이 아니었다. 섬세한 선들이 얽혀 만들어낸 정교한 별의 문장. 고대 벽화나 왕실의 옥새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스트라엘의 시초부터 전해 내려오던 순수한 수호의 각인이었다.

카엘의 시선이 문양에 단단히 박혔다. 평정을 유지하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는 북부의 대공이라 해도, 수백 년간 끊어졌던 진짜 별빛의 징표를 눈앞에서 마주하고는 동요를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이건……."

카엘의 낮은 음성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초대 공녀의 각인입니다. 외부의 마나 주입으로는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오직 핏줄 안에 잠들어 있던 본연의 힘이 공명할 때만 나타나는 형상이지요."

엘리시아는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냈다. 이번에는 카엘도 순순히 손을 놓았다.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았지만, 엘리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올려 카엘의 눈앞에 보란 듯이 내밀었다.

"빈 껍데기라 하셨습니까?"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시리도록 투명하게 빛났다.

"당신들이 부르지 않았어도 난 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로 날 끌어당겨 이 징표를 깨운 것이 운명이라면, 좋습니다.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카엘 대공."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나는 당신들의 인형이나 방패막이가 되기 위해 여기에 선 게 아닙니다. 내 몸에 흐르는 이 힘이 무엇이든, 이것을 어떻게 다루고 어디에 쓸지는 내가 결정합니다. 이 힘의 주인은 나니까요."

단호한 목소리가 텅 빈 처소의 벽을 울렸다. 제국에서 버림받았던 비관적인 소녀의 흔적은 그 순간만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날을 갈아왔던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슬 퍼런 투지였다.

카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과 손바닥의 별 문양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불신과 경계로 가득 차 있던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 다른 감정이 묵직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강자를 마주한 기사의 긴장이었다.

한참의 정적 끝에 카엘이 먼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은 제복의 망토 자락이 바닥을 스치며 번뜩였다.

"공녀님의 결의가 단순한 객기가 아니길 바랍니다."

문턱에 선 카엘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건조하게 덧붙였다.

"방금의 파동으로 왕궁 안팎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릴 겁니다. 오늘 밤은 제 직속 기사단이 처소 앞을 지킬 것입니다. 마법 학회로 떠나기 전까지는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마십시오."

"명령입니까?"

"보호입니다."

카엘은 짧게 답하고는 문을 나섰다. 묵직한 문이 닫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복도 너머로 철갑을 두른 기사들의 절도 있는 발소리가 처소 문 앞을 에워싸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 다시 홀로 남겨진 엘리시아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자, 은빛 별 문양은 여전히 꺼지지 않은 채 은은한 열을 내뿜고 있었다. 바깥의 밤하늘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녀의 손끝에 맺힌 빛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창밖 너머, 저 멀리 동쪽 하늘 끝에서 아주 천천히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아스트라엘 마법 학회 고문서 연구실은 아치형 창문으로 쏟아져 내리는 맑은 햇살과 은은한 쪽빛 마나의 잔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닿은 거대한 서가들 사이로 두꺼운 양장본 서책들이 스스로 책장을 펄럭이며 공중을 유영하고 있었다. 인간 제국의 낡고 메마른 별채에만 갇혀 살았던 엘리시아에게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 하나하나가 낯선 충격이었다. 허공을 부유하던 푸른빛 가루 하나가 그녀의 은빛 머리칼에 닿았다가 스르륵 흩어졌다.

"밤새 대공 전하의 삼엄한 감시를 견디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발걸음이 무척 곧으시네요."

한 발짝 앞서 걷던 라온이 뒤를 돌아보며 가볍게 눈꼬리를 접었다. 헐렁한 감청색 학자 예복을 걸친 그의 금발이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품에 두꺼운 가죽 피지의 고서적을 안아 든 채였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먼지를 밟지 않듯 사뿐했다.

"감시라기보다는 연금에 가까웠습니다."

엘리시아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손목에 남아 있던 붉은 압박흔은 밤새 가라앉았으나, 어젯밤 카엘과 부딪쳤던 서늘한 날은 여전히 기억 속에 또렷했다.

"대공 전하의 방식이 거칠기는 해도, 본성은 아스트라엘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너무 개의치 마세요, 공녀님."

라온은 연구실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흑요석 탁자 앞에 멈춰 섰다. 그가 손을 가볍게 내젓자, 허공을 날아다니던 서책 서너 권이 책장을 닫으며 탁자 위로 가지런히 내려앉았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고서적을 흑요석 판 위에 펼쳐 놓았다.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낡은 양피지 위로 복잡한 은색 궤적의 기하학 도형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리 와서 보시겠습니까?"

라온의 부드러운 권유에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탁자 곁으로 다가섰다. 펼쳐진 책장 중앙에는 정확히 여덟 갈래로 뻗은 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젯밤 수정 구슬을 부수고 그녀의 오른손 바닥에 새겨진 그 문양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이것은……."

"초대 별빛 공녀께서 남기신 결계의 원형입니다."

라온이 길고 섬세한 손가락 끝으로 양피지 위의 문양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마나의 불씨가 피어오르더니 책의 도안을 따라 길을 그리며 반짝였다.

"천 년 전, 아스트라엘의 밤하늘을 집어삼키려던 심연의 그림자를 가두기 위해 왕가의 혈통만이 다룰 수 있는 원초의 별빛으로 엮은 쐐기지요. 공녀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은 단순한 흉터가 아니라, 그 거대한 결계를 열고 닫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엘리시아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쥐었다 펴자, 살갗 아래에 잠들어 있는 미세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의문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토록 대단한 힘이라면 왜 이제야 나타난 겁니까? 나는 스무 해 동안 인간 제국의 진흙탕 속에서 쓸모없는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단 한 번도 내게 마법 같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걸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과거에 대한 짙은 회한이나 원망 대신, 현실을 철저히 검증하려는 냉철함이 서려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의심하는 버릇은 은빛 머리칼로 변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라온은 그녀의 날 선 질문에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조용히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를 꿰뚫어 보았다.

"공녀님의 마나는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잠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별빛은 어둠 속에서만 그 길을 보여주니까요."

라온의 나직한 음성이 연구실의 정적을 갈랐다.

"만약 제국에서 그 별빛이 깨어났다면, 공녀님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아스트라엘의 결계를 갉아먹는 어둠의 추적자들에게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왕가의 마나는 위협을 피해 혈통의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고, 마법이 완전히 메마른 인간들의 땅에서 형태를 감춘 채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왕궁의 수정 구슬들이 빛을 잃고 결계가 무너지기 직전인 바로 지금을요."

라온은 고서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검은 안개처럼 아스트라엘의 탑들을 휘감고 있는 어둠의 형상들이 정밀한 삽화로 기록되어 있었다. 궁정 복도의 꺼진 램프들과 봉인된 회랑들이 스쳐 지나갔다. 왕궁이 겪고 있는 쇠락은 단순한 방치가 아니라 서서히 숨통을 죄어오는 침식의 결과였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엘리시아가 묻자 라온은 양피지 한구석의 작은 마법진을 가리켰다.

"기초적인 마나의 물길을 터야 합니다. 억지로 힘을 쥐어짜 내는 것이 아니라, 몸 안의 혈관처럼 흐르는 별의 결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죠."

라온이 엘리시아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이끌어 양피지 위에 얹었다. 그의 서늘하면서도 정갈한 손끝이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받쳤다.

"눈을 감지 마세요. 책장에 새겨진 궤적을 눈으로 좇으며, 손바닥의 중심에서부터 마나를 바깥으로 밀어내 보세요. 물방울 하나를 손가락 끝으로 굴려 보낸다는 기분으로요."

엘리시아는 숨을 고르며 고서의 선들을 응시했다. 차가운 흑요석의 기운 위로 손바닥의 별 문양이 닿자, 갇혀 있던 맥박 같은 것이 손가락 끝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찌릿한 감각과 함께 양피지에 그려진 은색 선들이 하나둘 빛을 뿜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던 빛줄기가 순식간에 굵어지며 고서 전체를 보랏빛과 은빛의 섬광으로 물들였다. 연구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먼지들이 파동에 밀려 일제히 밀려났다.

"역시…… 대단한 재능이군요."

라온의 감탄 어린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양피지 중앙에 모여든 마나가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하며 연구실 바닥의 석판들을 미세하게 진동시켰다. 통제되지 않은 원초적인 빛이 천장을 향해 솟구치려던 바로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연구실의 육중한 철문이 굉음과 함께 활짝 열렸다.

"물러서라!"

차갑게 내리꽂히는 목소리와 함께,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카엘이 연구실 안으로 성큼 발을 들이밀었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에 찬 장검의 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카엘의 검집 끝이 양피지 중심을 내리누르기 직전, 책장에서 치솟은 은빛 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천장 회랑을 타고 옆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법 학회 연구실과 바로 맞닿아 있는 중앙 공명실의 벽체들이 묵직한 울림을 토해 냈다.

"공명실 쪽입니다!"

라온이 펄럭이는 외투 자락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연구실의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공명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마력석이 백청색 빛을 뿜어대며 진동하는 광경이 보였다. 정오의 높은 해가 학회의 천창을 뚫고 내리쬐고 있었지만, 공명실 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마나의 파동은 그 햇살마저 집어삼킬 만큼 날카로웠다.

엘리시아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고통을 털어내지 않은 채 공명실로 내달렸다. 제어되지 못한 빛줄기가 제 손바닥의 별 문양과 굵은 실타래처럼 이어져 있었다.

"멈춰라!"

카엘의 서늘한 호통이 귓가를 스쳤지만 엘리시아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공명실의 둥근 아치문을 통과하자마자 살갗을 베어낼 듯한 냉기가 전신을 덮쳤다. 방 중앙의 거대한 마력석은 흑청색 원석으로, 왕궁과 학회의 방어 결계를 지탱하는 중심 핵이었다. 엘리시아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온 별빛 마나가 그 핵을 직격하면서 원석 표면에 날카로운 균열이 달리기 시작했다.

"기초 순환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공명석을 건드리면 파편이 온몸을 찢을 것이다. 뒤로 물러서."

카엘이 엘리시아의 어깨를 낚아채듯 뒤로 당기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검은 제복 위로 마력석의 거친 파동이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냈다. 카엘은 검을 뽑지 않은 채, 흑요석이 박힌 칼집의 끝을 공명석의 균열 중심부에 단단히 틀어막았다. 대공의 칼집에서 뿜어져 나온 짙은 푸른빛의 오러가 날뛰는 마나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력석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카엘의 무력으로 짓누르자, 왕가의 피를 거부하지 못하는 고대의 돌은 더 강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굉음을 냈다. 바닥의 대리석 타일이 들썩였다.

"당장 피하십시오, 공녀님! 대공 전하의 힘만으로는 공명석의 거부 반응을 다 억누를 수 없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라온이 고서적을 펼쳐 결계 주문을 읊조리려 했다. 허공에 에메랄드색 술식이 복잡하게 얽혀들었지만, 공명석에서 튕겨 나간 벼락 같은 빛이 그 술식을 단번에 깨뜨렸다.

카엘의 턱 끝이 단단하게 굳었다. 짓누르는 칼집 너머로 튀는 불꽃이 그의 흑발을 어지럽게 헤집었다.

"라온, 공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 내가 이 핵을 깨뜨려서라도 파동을 가라앉히겠다."

"안 됩니다, 전하! 그 핵을 부수면 왕도 북부의 결계마저 동시에 무너집니다!"

두 남자의 목소리가 소음 속에 뒤섞였다.

그 순간 엘리시아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살갗 아래에서 맥박 치는 별 모양의 문양이 아플 만큼 뜨거워져 있었다. 도망치거나 피하라는 경고 속에서, 인간 제국의 서늘한 별채에 버려져 있던 스무 해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늘 숨죽이고, 눈에 띄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과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는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숨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 힘은 도망치는 자의 손바닥에 머무를 수 없는 종류의 불꽃이었다.

엘리시아는 카엘의 등 뒤에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물러서지 않아요."

"무슨 짓을……!"

카엘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제지하려 팔을 뻗었지만, 엘리시아는 거칠게 그의 손을 쳐냈다. 가녀린 손등 위로 솟구친 은빛 광휘가 카엘의 푸른 오러를 스치며 불꽃을 일으켰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공명석 앞으로 다가섰다.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마나의 파편들이 그녀의 뺨을 스치며 은빛 머리칼을 뒤흔들었다. 라온이 경악 섞인 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엘리시아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불타는 듯한 별 문양이 새겨진 손바닥을 균열의 한가운데로 거침없이 내리찍었다.

카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공명실 전체가 눈이 멀 듯한 보랏빛과 은빛의 섬광에 휩싸였다.

거센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진동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엘리시아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별빛은 날카롭게 튀는 파편들을 집어삼키며, 흑청색 원석의 깨진 틈새를 꿰매듯 파고들었다. 원석은 부서지는 대신, 왕가의 순수한 마나를 빨아들이며 본래의 맑은 흑요석 빛깔을 되찾았다.

엘리시아는 손바닥을 떼지 않은 채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끝을 타고 전신으로 되돌아오는 온기는 차갑지 않았다. 온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놓인, 분명한 제 자신의 힘이었다.

공명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기 중에 떠돌던 먼지들이 은빛 잔향을 머금은 채 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라온은 펼쳐 쥐었던 고서적을 천천히 내리며 멍하니 엘리시아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다정한 에메랄드색 눈동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경탄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카엘이 있었다.

카엘은 칼집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의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공명석 앞에 당당히 버텨 선 엘리시아의 옆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차갑고 흔들림 없던 그의 얼굴에 명백한 균열이 인 것은 그때였다. 보호해야 할 나약한 존재로만 치부했던 여자가, 스스로 피를 흘리지 않고 거대한 핵의 폭주를 잠재웠다.

카엘은 말없이 검을 제자리에 고쳐 맸다. 가죽 제복이 스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텅 빈 방 안을 낮게 울렸다.

그가 엘리시아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그의 기세는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무게를 품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피하지 않고 돌아서서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흑발의 대공을 단단히 겨누었다.

카엘은 엘리시아의 세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장검의 자루를 쥔 채, 바닥의 찬 대리석 위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 적 없을 것 같던 북부의 대공이, 왕가의 수호자로서 가장 엄격한 신하의 예를 갖춘 것이다.

"전하……?"

라온이 작게 이름을 읊조렸으나 카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카엘은 바닥을 보지 않고,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엘리시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차가운 얼음 같던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거센 불길 같은 결의가 일렁였다.

"지키는 자로서 묻겠습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명실의 높은 천장을 타고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당신은 이 세계를 위해 스스로를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엘리시아는 손바닥의 별 문양을 쥐어짜듯 오므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 질문은 이미 끝났습니다. 내가 도망치지 않는 것을 당신 두 눈으로 보았을 텐데요, 카엘 드 아르테미스."

카엘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리듯 올라갔다 사라졌다. 그는 가슴 위에 오른손을 얹으며, 낮고 단단한 음성으로 맹세를 읊었다.

"그렇다면 더는 방관자가 아닌, 나의 주군으로 대하겠습니다."

카엘의 시선이 그녀의 손바닥에 남은 붉은 열기를 훑고 올라와 보랏빛 눈동자에 단단히 얽혔다.

"나의 왕녀, 엘리시아 님."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는 카엘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결의가 배어 나왔다. 엘리시아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를 향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시선을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