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실의 높은 석조 천장을 울린 카엘의 목소리가 멎자,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흑청색 공명석의 거대한 표면은 성난 파도 같던 푸른빛을 거두고, 엘리시아가 불어넣은 은빛 마나를 잔잔히 머금은 채 본래의 묵직한 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원석의 갈라진 틈새마다 스며든 보랏빛 광휘가 서서히 식어 가며, 공기 중에 희박한 유황 냄새와 차가운 별빛의 냄새를 함께 남겼다.
엘리시아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부동자세로 엎드린 카엘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북부의 혹한을 담은 듯한 칠흑 같은 머리칼 사이로 곧게 뻗은 목덜미, 그리고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게 벼려진 어깨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자격을 의심하며 검집으로 앞을 가로막았던 사내였다. 타인의 비호나 인정 따위를 갈구하며 비참하게 숨죽여 살았던 제국의 스무 해가 불현듯 뇌리를 스쳤으나, 엘리시아는 고개를 젓는 대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 한가운데 선명하게 박힌 여덟 갈래 별 문양이 박동하듯 미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살갗 깊숙이 새겨진 그 선들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일부였다. 타인이 쥐여 준 족쇄가 아니라, 스스로 제 손을 뻗어 마력석의 균열을 억누른 대가로 얻어낸 흔적이었다.
"일어나십시오, 카엘 대공."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조금의 떨림도 섞이지 않았다.
카엘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가슴 위에 얹은 장갑 낀 손을 유지한 채, 푸른 눈동자만을 들어 올려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공녀님께서 거두지 않으신다면 이 무릎은 대리석에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아르테미스의 검은 오직 별빛 왕가의 정당한 혈통, 그리고 스스로 그 힘을 증명한 자에게만 꺾입니다. 당신은 방금 이 성채 전체를 집어삼킬 뻔한 파멸을 맨손으로 틀어막으셨습니다."
"증명이라."
엘리시아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한 발자국 카엘의 앞으로 다가섰다. 발걸음이 울릴 때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 끝에서 자잘한 은색 불티가 흩어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손을 뻗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발밑의 땅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뿐이죠. 그 자리에 당신이 서 있었든, 다른 누군가가 서 있었든 내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카엘의 눈빛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차가운 이성으로 가득 차 있던 얼굴 위에 아주 짧은 호흡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엘리시아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맹세는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카엘 대공. 내 앞길을 가로막지 말고, 오직 내 뜻에 따라 검을 휘두르십시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운명에 휩쓸려 도망치는 일은 이제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 제국의 낡은 별채에서 창밖의 달이나 세던 무력한 버림받은 공녀가 아니었다.
카엘의 입가에 찰나의 순간 서늘한 호선이 맺혔다. 그것은 복종을 굴욕으로 여기는 자의 표정이 아니라, 비로소 섬길 만한 주군을 발견한 기사의 서슬 퍼런 만족감에 가까웠다.
"명령대로."
카엘은 검자루를 잡고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털어내는 동작 하나에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검은 제복에 달린 은제 흉갑이 공명석의 잔광을 받아 번뜩였다. 그는 엘리시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구로 우뚝 섰지만, 아까와 달리 엘리시아를 내려다보며 위압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 보 물러서서 주군의 그림자 뒤편에 자신의 영역을 규정하는 엄격한 예의가 배어 있었다.
"아르테미스의 모든 기사와 북부의 성벽은 이제 엘리시아 님의 것입니다. 당신이 가리키는 곳이 심연이라 할지라도 내 칼날은 망설임 없이 그곳을 벨 것입니다."
"심연으로 걸어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살아서 이 세계의 꼭대기에 설 생각이지."
엘리시아가 담담하게 맞받아치자, 공명실 구석에서 숨죽이고 서 있던 라온이 조용히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타닥거리는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짙은 남색 연구원 예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라온이 품에 안고 있던 두꺼운 고서적을 갈무리했다. 언제나처럼 햇살을 머금은 듯한 온화한 금발과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누군가에게 검의 주권을 온전히 넘겨주는 광경을 제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학회의 오랜 역사책에 한 줄 남겨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라온은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엘리시아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엘리시아의 얼굴이 아닌, 공명석의 중앙 핵과 그녀의 오른손을 번갈아 훑고 있었다. 그 시선은 부드러운 미소와는 달리 정밀한 기계를 해체하듯 치밀했다.
"놀라운 통제력이었습니다, 엘리시아 님. 별의 마나를 한 번도 체계적으로 훈련받지 않은 상태에서, 폭주 직전의 핵을 역류 없이 봉합해 내다니요. 초대 공녀의 혈통이 지닌 힘이란 역시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손바닥의 각인이 제멋대로 반응했으니까요."
"우연이라는 단어로 치부하기엔 각인의 결속이 지나치게 견고합니다."
라온이 들고 있던 고서적의 모서리로 가볍게 턱을 괴며 낮게 반박했다.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는 학자 특유의 집요한 탐구열이 묻어 있었다.
"초대 공녀의 문양은 주인의 의지에 감응하지 않으면 결코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으니까요. 공녀님께서 그 위험한 순간에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공명석을 제어하겠다는 의지를 품으셨기에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엘리시아는 여전히 붉은 온기가 감도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피부 아래에서 여덟 갈래로 뻗은 별 문양이 은은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타오르는 듯하던 격통은 가라앉았으나, 온몸의 혈관을 타고 순환하는 이질적인 마나의 흐름은 분명 이전과 달랐다.
"하지만 이 문양이 언제까지 제 통제 아래에 머물지는 장담할 수 없겠군요."
"그렇기에 체계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라온이 공명석의 하단으로 다가가 손가락 끝으로 결계 제어반의 금속판을 살폈다. 그의 온화하던 미소 사이로 언뜻 날 선 긴장감이 비쳤다.
"결계 핵 자체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방금 방출된 별빛 마나의 여파가 문제입니다. 공녀님의 힘이 워낙 거대하고 순수했던 탓에, 학회의 차단 결계를 뚫고 왕도 상공 너머까지 파동이 번져 나갔습니다."
그 말에 묵묵히 뒤를 지키고 서 있던 카엘의 시선이 즉각 창문 쪽으로 향했다. 높은 회랑 너머로 아스트라엘의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지만, 카엘의 서늘한 감각은 이미 공기의 미세한 일렁임을 포착하고 있었다.
"파동이 결계 외벽을 흔들었다면, 바깥의 어둠 역시 이 신호를 감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카엘의 목소리는 북부의 눈보라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검자루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경비대를 증강 배치하고 결계 외곽 순찰을 강화해야 합니다. 왕궁 방어탑의 마력 흐름도 재점검하도록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대공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라온이 들고 있던 서책을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다시 평소의 온화하고 사려 깊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으나, 그 눈빛 한구석에는 쉬이 지워지지 않는 짙은 그늘이 어려 있었다.
"공녀님의 손바닥에 남은 마나 잔향과 각인의 상태를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초대 공녀의 각인은 단순한 열쇠가 아닙니다. 혈통의 마나를 소모하는 방식에 따라 육체에 가해지는 반동이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반동이라고요?"
엘리시아가 턱을 꼿꼿이 든 채 묻자, 라온은 시선을 부드럽게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대 기록에 따르면 각성이 급격하게 이루어질수록 마나 회로가 감당해야 하는 대가가 뒤따른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단순한 기우일 수도 있습니다만, 확인해서 해가 될 것은 없겠지요. 고문서 연구실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그곳에 각인의 구조를 해독할 수 있는 원본 서책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라온의 말투는 더없이 차분하고 정중했으나, 서책을 그러쥔 그의 손가락 마디에는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언가 완전히 털어놓지 않은 사실이 있는 듯한 위화감이 엘리시아의 날카로운 감각을 스쳤다.
엘리시아는 손바닥을 천천히 오므려 쥐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결계의 핵을 억누른 감각은 아직도 손끝에 생생했다. 그것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든,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뒷걸음질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좋습니다. 안내하세요, 라온 수석 마법사."
"명예로운 공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라온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앞장서서 공명실의 묵직한 아치문을 향해 걸어갔다. 카엘은 엘리시아의 비스듬한 뒤편으로 자리를 옮기며 장검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제가 뒤를 맡겠습니다, 엘리시아 님."
주군을 호위하는 단호한 기사의 목소리가 복도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고 울렸다. 엘리시아는 은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굳게 닫힌 연구실 문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정오를 갓 넘긴 시각, 마법 학회 고문서 연구실의 높은 아치형 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중앙의 흑요석 탁자 위에 차갑게 부서졌다. 공중에 떠돌던 서책 몇 권이 서가 구석으로 물러앉아 조용히 파닥거렸고, 묵직한 가죽 냄새와 오래된 양피지의 마른 향이 연구실 안을 메웠다.
라온은 흑요석 탁자 위에 양가죽으로 장정된 두꺼운 고서를 넓게 펼쳐 놓았다. 그는 긴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 올린 뒤, 엘리시아를 마주 보고 섰다.
"손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공녀님. 조금 전 공명석의 파동을 억누르실 때 각인 내부로 흘러들어 간 마나의 결을 확인해야 합니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손바닥 정중앙에 새겨진 여덟 갈래 별 문양은 여전히 옅은 은빛 잔열을 내뿜고 있었다. 인간 제국의 음습한 별채에서 상처투성이로 버텨 왔던 피부 위에 아스트라엘의 피가 선명한 표식으로 자리 잡은 채였다.
라온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엘리시아의 손끝에 닿았다. 마법사의 손길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른 연녹색 마나가 엘리시아의 손바닥 위로 가늘게 흩뿌려지며 여덟 갈래 별의 윤곽을 따라 천천히 회전했다.
"흐름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입니다. 방금 전까지 결계 핵의 거대한 폭주를 받아내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요. 보통의 마법사였다면 마나 회로가 타버렸을 터인데, 오히려 별빛 마나가 체내의 관을 넓혀 놓았군요."
라온은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탁자 위의 고서와 엘리시아의 손바닥을 번갈아 살폈다.
"이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여덟 갈래 별 문양은 단순한 계승의 증표가 아니라 아스트라엘 결계 그 자체와 영혼을 묶는 고대의 서약입니다. 초대 공녀께서 결계를 치실 때 남기신 원초적 마법이지요. 공녀님께서 원석의 폭주를 잠재울 수 있었던 것도 결계의 핵이 공녀님의 혈통을 진정한 지배자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각인을 다룰수록 결계는 더 견고해진다는 뜻인가요?"
엘리시아가 묻자, 라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공녀님의 의지가 닿는 한 아스트라엘의 장막은 그 어떤 어둠도 침범할 수 없는 요새가 될 테니까요."
라온은 서책의 다음 장을 넘겼다. 고대 문자가 빽빽하게 적힌 양피지 위로 복잡한 마법진의 도해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마법진의 외곽선을 짚으며 설명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라온의 손가락이 책장 하단의 붉은 필사 부분에 닿았을 때 미세하게 굳었다.
그의 시선이 하단부에 적힌 문구에 닿았다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햇살을 받던 라온의 옆얼굴에서 평소의 온화함이 찰나의 순간에 걷히고, 서늘한 긴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소매를 길게 늘어뜨리며 넓은 손바닥으로 그 붉은 문자들을 은밀하게 덮어 눌렀다. 그리고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기려 손끝을 움직였다.
엘리시아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인간 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대의 사소한 눈짓과 손짓 하나까지 뼈저리게 읽어 내야 했던 감각이 즉각 반응했다.
탁.
엘리시아의 손이 빠르게 뻗어 나가 라온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서책을 넘기려던 라온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추어 섰다.
"공녀님?"
라온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의 에메랄드빛 시선을 정면으로 꿰뚫고 있었다. 잡힌 손목 사이로 라온의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손을 치우세요, 라온."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엇을 가린 겁니까?"
"아, 공녀님. 이 부분은 초대의 제례 의식에 관한 오래된 은유일 뿐입니다. 지금 당장 각인을 통제하는 데는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는 난해한 내용이라……."
"내가 읽겠습니다."
엘리시아는 라온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죠, 라온? 내 운명을 다른 사람의 장막 뒤에 숨겨진 채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연구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서가 사이를 날아다니던 책들이 기척을 죽인 채 서가 틈새로 숨어들었다.
라온은 엘리시아의 단단한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그의 얼굴에서 언제나 걸치고 있던 완벽한 마법사의 미소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깊은 고뇌와 억눌린 두려움만이 남아 있었다.
"……공녀님께서는 늘 제 예상보다 훨씬 예리하시군요."
라온이 나직하게 숨을 뱉으며 손바닥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가 덮고 있던 양피지 하단부에는 핏빛 잉크로 덧칠해진 거친 고대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시아는 시선을 내려 그 문양과 글귀를 훑었다. 해독할 수 없는 고대 문자였으나, 그 문자가 품고 있는 붉은 기운은 손바닥의 각인을 서늘하게 찌르고 있었다.
"읽지 못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대 왕실의 비전 언어니까요."
라온이 잡힌 손목을 빼내지 않은 채, 낮고 잠긴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이곳에 적힌 것은 대가에 관한 기록입니다. 결계를 열고 닫는 열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덟 갈래 별의 각성이 완전해질수록, 결계를 지탱하기 위해 공녀님의 생명력과 영혼이 조금씩 결계의 핵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엘리시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생명력과 영혼이라니."
"초대 공녀께서 아스트라엘을 지키기 위해 결계에 새겨 넣은 저주에 가까운 맹약입니다. 마나를 개방할 때마다 공녀님의 수명이 깎여 나간다는 뜻입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마법 학회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초대 이후 그 기록은 금서로 분류되어 봉인되었으니까요."
라온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고통스럽게 일렁였다.
"저는 공녀님을 그저 결계를 복구할 제물로 바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공 전하는 왕국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공녀님의 희생조차 명예로 포장할 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공녀님의 목숨을 갉아먹지 않고도 결계를 바로잡을 다른 길을요."
라온의 고백은 연구실의 무거운 공기를 뚫고 엘리시아의 귓가에 서늘하게 내리꽂혔다. 그토록 따뜻하고 영민해 보이던 마법사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잔혹한 진실. 자신이 제국에서 도망쳐 온 이곳조차, 결국 또 다른 형태의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제단에 불과했던 것인가 하는 냉엄한 현실이 폐부를 찔렀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손목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놓으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흔들리기보다 오히려 더 차갑고 단단하게 빛을 발했다.
"나를 동정했군요, 라온."
"동정이 아닙니다, 공녀님. 이것은……."
"그게 동정입니다. 알 권리를 빼앗고, 혼자 짐을 짊어진 채 선의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가리는 오만함."
엘리시아는 손바닥을 펴서 다시 한번 여덟 갈래 별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수명을 갉아먹는 각인이라 한들, 도망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제국의 차가운 마구간 구석에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무너져 내릴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초대 공녀가 결계에 제 목숨을 묶었다면, 그 맹약을 부수고 새 길을 내는 것 또한 내 몫입니다. 내 삶을 갉아먹는 대가 따위, 순순히 지불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요."
라온의 눈에 경탄과 죄책감이 뒤섞였다. 그가 다급히 말을 덧붙이려 입을 연 순간이었다.
쿵!
연구실 외벽 전체가 거칠게 흔들리며 바닥의 흑요석 탁자가 비명을 지르듯 울렸다. 공중에 머물던 마법 서책들이 일제히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우수수 곤두박질쳤다.
동시에 창문 너머 학회 외곽의 하늘이 핏빛과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 엘리시아가 공명실에서 터뜨린 거대한 마나 파동에 반응하듯, 왕궁 결계 경계탑의 비상 경종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금속음을 토해 내며 울려 퍼졌다.
"이 파동은……!"
라온이 서둘러 창가로 몸을 돌렸고, 굳게 닫혀 있던 연구실의 문이 거칠게 부서지듯 열리며 카엘이 장검을 빼든 채 들이닥쳤다.
칠흑 같은 제복 차림의 카엘은 거친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연구실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칼집에서 반쯤 뽑혀 나온 서늘한 은색 검날 위로 푸른빛 오러가 가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방 안을 훑더니, 곧장 라온을 지나쳐 엘리시아의 온전한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정지했다.
"무사하십니까."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에는 날 선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카엘은 뒤편의 깨진 유리창이나 바닥에 흩어진 서책 따위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공명실의 파동이 학회 외벽을 넘어 왕궁 결계 북단까지 치솟았습니다. 외곽 경계탑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경계탑이 무너졌다고요?"
라온이 들고 있던 고서적을 품에 끌어안은 채 창가로 다가붙었다. 학회 외곽을 둘러싼 거대한 결계 회랑 너머, 쪽빛이어야 할 아스트라엘의 하늘이 흉측한 핏빛과 먹구름 같은 흑색으로 뒤엉켜 있었다. 결계를 떠받치던 웅장한 수정 첨탑 한 채가 중심을 잃고 굉음과 함께 주저앉는 광경이 먼발치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공기 중에는 타버린 유황 냄새와 차가운 비린내가 뒤섞여 번져 오고 있었다.
"조금 전 공명석을 안정시키며 방출된 순수 마나가 너무 거대했습니다. 결계 너머에 웅크리고 있던 어둠의 무리에게는 어둠 속의 횃불이나 다름없었겠지요."
라온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자신의 학술적 오판을 자책하듯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제가…… 그만한 파동이 외부로 샐 것을 미리 차단했어야 했는데."
"자책은 나중에 해라, 수석 마법사."
카엘이 냉정하게 라온의 말을 끊었다. 그의 시선은 이미 연구실 테라스 너머, 균열이 번져 나가는 허공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놈들이 결계의 틈을 찢고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이곳 연구실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테라스 쪽 대리석 바닥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창틀을 지탱하던 석조 기둥에 굵은 금이 가며 회반죽 가루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회랑 저편에서 결계를 찢고 들어온 검은 형체들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학회 본관을 향해 쇄도하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사람의 형태를 모방했으나 팔다리가 기괴하게 뒤틀린 그림자의 형상들이었다.
카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엘리시아의 앞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그의 장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고, 짙푸른 오러가 검신을 휘감으며 테라스 일대를 서릿발 같은 냉기로 물들였다.
"물러서지 마십시오, 엘리시아 님. 제 푸른 오러가 부서지지 않는 한, 어떠한 어둠도 당신의 발끝을 스치지 못할 것입니다."
철갑을 두른 듯 단단한 카엘의 등 뒤에서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방금 전 연구실에서 라온이 털어놓았던 각성의 대가, 생명력을 깎아내며 결계를 지탱해야 한다는 잔혹한 진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지금은 그 의구심에 매몰되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눈앞에 닥친 것은 분명한 파멸의 위협이었다.
"피할 곳은 없습니다, 대공."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카엘의 검날만큼이나 차분하고 건조했다.
"당신이 앞을 막아선다고 해서 내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에요. 저들이 노리는 게 공명석을 건드린 내 마나라면, 내가 직접 마주해야 끝납니다."
"공녀님, 안 됩니다!"
라온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품 안의 고서적을 펼쳤다. 그의 섬세한 손가락 끝에서 금빛 마법 기호들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연구실 입구를 감싸는 반구형 방어 결계를 그려 냈다.
"아직 마나 운용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각인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무리하게 힘을 끌어올리면 체내 마나 회로가 버티지 못합니다. 제가 시간을 벌 테니 대공 전하와 함께 지하 대피로로……!"
"도망치라고요?"
엘리시아는 라온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그녀는 카엘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카엘의 단단한 등이 그녀의 진로를 막아서려 했지만, 엘리시아는 주저 없이 그의 팔갑주를 손끝으로 밀어냈다.
"스무 해 동안 도망칠 곳도 없는 제국의 뒷방에서 숨죽여 살았습니다. 겨우 내 손으로 쥔 힘인데, 첫 번째 습격 앞에서 등을 보이고 숨으라는 말은 사양하겠어요."
엘리시아는 오른손 손바닥을 활짝 폈다. 피부 아래 잠들어 있던 여덟 갈래 별 문양이 보랏빛 안광과 공명하며 서서히 푸른빛과 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공명석을 어루만졌을 때 느꼈던 마나의 묵직한 무게감이 혈관을 타고 거칠게 역류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며 흐름을 제어했다.
카엘이 이를 갈며 검을 고쳐 잡았다. 물러서라는 주군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으나, 그녀를 사지로 내몰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그의 오러가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
"그렇다면 제 곁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마십시오. 당신의 결의를 꺾지 않는 대신, 제 검이 당신의 방패가 될 것입니다."
"좋아요. 방패가 부서지지 않는지 시험해 보죠."
엘리시아의 대답과 함께 테라스의 거대한 유리창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칠흑 같은 어둠의 괴수 세 마리가 검은 연기를 휘감으며 테라스 난간을 넘어 덮쳐들었다.
카엘의 검이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고, 푸른 오러가 첫 번째 괴수의 흉부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동시에 엘리시아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마나가 여덟 갈래로 갈라지며 바닥에 날카로운 별빛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라온의 금빛 방어 결계와 엘리시아의 은빛 파동, 그리고 카엘의 푸른 검격이 테라스의 핏빛 하늘 아래에서 한데 뒤엉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