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학회 고문서 연구실 테라스의 핏빛 석양이 깨진 유리창 파편마다 붉은 칼날처럼 맺혔다. 황혼이 내려앉은 하늘을 등지고 허공을 가른 첫 번째 괴수는 검붉은 안개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카엘의 장검이 흉부를 관통한 자리에 서릿발 같은 푸른 오러가 얼어붙듯 번지더니, 괴수의 형체는 비명도 남기지 못한 채 잿더미로 스러졌다.
그러나 틈을 주지 않고 두 번째 괴수가 테라스 난간을 딛고 솟구쳤다. 날카로운 갈퀴가 카엘의 견갑을 향해 짓쳐 들었다.
카엘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 한 걸음 파고들며 검신을 비틀어 올렸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괴수의 앞다리가 허공으로 솟구쳤고, 반회전한 은색 검날이 괴수의 목덜미를 단숨에 베어 넘겼다. 짙푸른 오러의 잔향이 흩어지며 검은 연기가 석양 속으로 흩날렸다.
"본관으로 통하는 통로를 완전히 차단합니다!"
라온이 테라스 안쪽에서 외쳤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금빛 마법 기호들이 허공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깨진 난간 바깥으로 촘촘한 그물망 형태의 방어 결계를 엮어 냈다. 결계 외벽에 부딪힌 그림자 무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라온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양피지 고서적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그의 소매를 거세게 펄럭였다.
"외곽 결계탑이 무너지면서 외부의 탁류가 밀려들고 있습니다. 이 결계로는 길어야 십 분입니다, 대공 전하!"
"십 분이면 충분하다."
카엘이 검을 털어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검날에 묻었던 검은 잔해가 바닥 대리석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찰나, 테라스 바닥의 갈라진 석재 틈새에서 끈적이는 그림자가 솟구쳤다. 죽은 줄 알았던 세 번째 괴수였다. 형체를 해체했다가 그림자 형태로 바닥을 기어들어 온 괴수는 카엘의 발치 아래 사각을 단숨에 미끄러져 지나갔다. 라온의 금빛 방어선은 외벽을 향해 펼쳐져 있었기에, 이미 안쪽으로 스며든 그림자까지는 걸러내지 못했다.
괴수의 붉은 안광이 향한 곳은 단 하나였다.
손바닥에 여덟 갈래 별 문양을 점화한 채 테라스 중앙에 버텨 선 엘리시아였다.
"공녀님, 물러서십시오!"
카엘이 몸을 돌려 검을 뻗었으나, 바닥을 미끄러져 쇄도하는 어둠의 속도가 반 박자 빨랐다. 라온 역시 경악하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전개된 외곽 결계를 거두고 새로운 마법을 시전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피할 곳은 없었다. 아니, 피할 생각조차 없었다.
엘리시아는 도망치는 대신 오른발을 뒤로 단단히 디뎠다. 그녀는 제국의 차가운 별채 바닥에서 홀로 버텨 냈던 스무 해의 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자비나 보호를 기다리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기만과 방치뿐이었다. 제 손으로 쥐지 못한 힘은 주권이 될 수 없었다.
"꺼져."
엘리시아는 오른손 손바닥을 허공을 향해 내질렀다.
피부 가죽 아래 새겨져 있던 여덟 갈래 별 문양이 보랏빛 섬광을 일으키며 선명하게 드러났다. 공명석과 맞닿았을 때 요동쳤던 체내 마나가 폭포수처럼 손바닥 중앙으로 집중되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은빛 마나는 차가웠으나, 각인이 닿은 손바닥 표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붙이를 댄 듯 극심한 열기를 내뿜었다.
쿠웅!
손바닥에서 방출된 순수한 별빛의 파동이 테라스 바닥을 쐐기처럼 쪼개며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은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광선이 허공을 가르자, 돌진하던 괴수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괴수는 몸을 비틀어 별빛을 피하려 했으나, 여덟 갈래로 갈라진 마나의 궤적이 마치 살아 있는 덫처럼 허공에서 꺾이며 놈의 사지를 결박했다. 은빛 마나가 닿은 부위마다 검은 가죽이 지글거리며 타들어 갔다.
"핵을 부숴야 합니다!"
라온의 날카로운 외침이 귀를 때렸다.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뒤틀린 연기 속에서 붉게 맥동하는 타원형의 핵이 보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쥐어짜듯 오므렸다. 손바닥에 새겨진 여덟 갈래의 각인이 뼈마디를 파고드는 통증을 낳았지만, 엘리시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마나의 압력을 한 점으로 모았다.
파앙!
별빛의 궤적이 괴수의 흉부 한가운데로 수렴하며 핵을 완전히 꿰뚫었다. 단단한 흑요석 같던 핵이 균열을 일으키며 산산이 부서졌다.
귀청을 찢는 비명과 함께 어둠의 괴수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테라스를 뒤흔들던 소음이 멎고, 핏빛 석양 아래로 검은 재만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엘리시아는 손을 내렸다. 적을 완전히 분쇄했다는 승리감이 차오르기도 전, 끔찍한 반동이 전신을 덮쳤다.
여덟 갈래 별 문양이 새겨진 손바닥 전체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타들어 갔다. 억누르고 있던 생명력이 바닥으로 쑥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다리의 힘이 풀리며 무릎이 꺾였다. 바닥의 차가운 대리석이 시야 밑으로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쓰러지기 직전, 묵직하고 서늘한 감촉이 그녀의 상체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카엘이었다.
어느새 거리를 좁혀 온 카엘이 검을 거두지도 않은 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엘리시아를 품에 받아냈다. 짙은 흑발 사이로 드러난 그의 서늘한 푸른 눈동자에는 지독한 책망과 억눌린 동요가 뒤섞여 있었다. 그의 갑주에서 풍기는 차가운 쇠 냄새와 푸른 오러의 냉기가 엘리시아의 달아오른 뺨을 스쳤다.
"공녀님!"
라온이 다급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온화한 녹색 치유 마법이 엘리시아의 손바닥을 감쌌으나, 화인처럼 붉게 부풀어 오른 여덟 갈래 별 문양은 치유의 빛을 완강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치유 마법이 먹히지 않습니다. 마나 고갈이 아니라…… 각인이 체내 생체 에너지를 연료 삼아 강제로 타오른 탓입니다."
라온의 목소리가 짓눌린 듯 떨려 나왔다.
카엘은 엘리시아의 손바닥에 새겨진 붉은 흔적을 응시했다. 은빛 살결 위로 핏줄이 굵게 돋아나 있었고, 여덟 모서리를 가진 별 문양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낙인처럼 희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카엘의 단단한 턱선이 굳게 당겨졌다.
"제 검은 당신의 방패라 맹세했습니다."
카엘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테라스의 정적을 갈랐다.
그는 엘리시아를 안아 든 팔에 단단히 힘을 주며, 시선을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똑바로 맞추었다.
"허나 스스로를 부수며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공녀님."
엘리시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카엘의 흉갑을 짚었다. 손끝에 닿는 철갑의 냉기가 손바닥의 작열감을 겨우 식혀 주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 안쪽을 살짝 짓씹으며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방패 뒤에 숨어서…… 살아남는 법은 모릅니다, 카엘."
엘리시아는 자신을 부축한 카엘의 팔을 밀어내려 애쓰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것이 내가 치러야 할 대가라면, 피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요."
라온이 참담한 낯빛으로 두 사람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시선은 테라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깨진 결계석 조각에 닿아 있었다. 단순한 괴수의 습격이라기엔 무언가 이상했다. 라온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바닥의 파단면을 훑더니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라온은 테라스 바닥에 무릎을 댄 채, 깨진 결계석의 단면 위로 떨리는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검게 그을린 대리석 위로 괴수들이 남긴 부식성 체액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지만, 그의 신경은 오직 손끝에 닿은 차가운 청색 광석 조각에 쏠려 있었다. 부서져 나간 단면을 덧그리던 라온의 녹색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이건 단순한 외부 파괴가 아닙니다."
라온이 부러진 결계석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단면 안쪽에는 억지로 비틀려 끊어진 결계 술식이 검붉은 잔상으로 응고되어 있었다. 마치 내부에서 열쇠를 돌려 빗장을 풀어 준 것 같은 뚜렷한 역류의 흔적이었다.
라온은 부서진 돌가루가 묻은 손가락을 털어내지도 않은 채, 부러진 석편의 핵을 엄지로 세게 문질렀다. 푸른빛 광석 중심부에서 가느다랗게 타오르던 마력선들이 바깥쪽이 아닌 안쪽을 향해 꺾여 짓눌려 있었다. 그의 맑은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지며 어둡게 가라앉았다.
"외부의 파동에 단순히 이끌려 들이닥친 게 아닙니다. 학회 방어 결계의 고유한 파동 결과 성채의 핵심 공명 지점을 사전에 꿰뚫고 있지 않았다면, 이 견고한 외벽 결계를 단번에 가르고 연구실 테라스만을 정확히 짚어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라온이 석편을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습니다. 그것도 결계의 마나 순환 구조를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입니다."
연구실 안에 무겁고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테라스 난간 너머로 불어오는 밤바람이 어지럽게 찢긴 양피지들을 팔랑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카엘은 엘리시아를 단단히 받쳐 들고 있던 한쪽 팔을 천천히 풀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냉혹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의 칼집을 쥔 그의 손마디가 희게 도드라졌다.
"내부의 배신자라."
카엘의 음성은 살얼음판을 밟는 것처럼 낮고 위압적이었다.
"당장 근위대와 북부 직속 기사단을 소집하겠습니다. 학회 상층부뿐만 아니라 오늘 공명실의 파동을 전달받은 왕궁 평의회 전체를 봉쇄하고 샅샅이 뒤져 색출해야 합니다. 결계를 쥐고 흔드는 쥐새끼를 살려 둘 이유는 없습니다."
"잠깐만요, 대공 전하."
라온이 급히 손을 들어 카엘을 제지했다.
"지금 무작정 군사를 움직여 평의회를 들쑤시면, 결계 조작의 흔적을 지우고 완전히 숨어버릴 겁니다. 공명 지점을 교란하는 주술식은 학회 내에서도 오직 고위 술사들만 열람할 수 있는 극비 문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섣부른 압박은 오히려 궁지에 몰린 적이 왕궁 중앙의 주 결계석마저 건드리게 만드는 도화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이 이 안방까지 쳐들어와 공녀의 목숨을 노리도록 방치하자는 말입니까?"
카엘의 시선이 라온을 거칠게 꿰뚫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그 팽팽한 대치 사이로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싸움을 멈춰요, 두 사람 다."
엘리시아였다.
그녀는 카엘의 차가운 갑주를 짚고 서서히 몸을 일으켜 벽을 등지고 섰다. 다리에 실리는 무게감 탓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보랏빛 눈동자만은 흔들림 없이 맑았다. 엘리시아는 붉은 화인처럼 여전히 열을 뿜어내는 오른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여덟 갈래로 뻗은 별 문양이 은빛 살갗 아래에서 맥박에 맞추어 둔중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배신자의 목적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에요."
엘리시아의 말에 카엘과 라온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로 향했다.
"공명실에서 내가 마력석을 잠재웠을 때, 방출된 파동을 타고 괴수들이 움직였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괴수들은 다른 곳도 아닌, 내가 각인의 비밀을 확인하러 온 이 고문서 연구실 테라스를 정확하게 부수고 들어왔어요. 배신자는 내가 결계의 열쇠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각인을 온전히 깨우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까지 알고 있는 자예요."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려 라온을 똑바로 응시했다.
"라온 엘릭스. 당신이 내게 숨겼던 그 금서의 내용. 카엘 대공에게도 숨김없이 털어놓으세요."
라온의 입술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깨진 결계석을 흑요석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학자 특유의 온화하고 다정했던 얼굴에 짙은 자책감이 드리워졌다.
"……초대 공녀님의 각인은, 결계를 강화하고 유지할 때마다 시전자의 생명력과 영혼을 등가교환으로 태워 올립니다."
라온의 메마른 음성이 반파된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성채의 결계는 완전한 마법이 아닙니다. 별빛의 맹약이라 불리는 고대 술식은, 공녀님의 수명을 갉아먹는 것으로 성벽의 균열을 메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제가 공녀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여덟 갈래 별 문양을 점검하려 했던 것도, 그 각인의 봉인을 억누르고 대가를 우회할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순간, 카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서슬 퍼런 냉기가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카엘은 연구실 바닥이 쩍 갈라질 정도로 거칠게 발을 내딛으며 라온의 멱살을 틀어쥘 듯 다가섰다. 그의 서늘한 푸른 눈동자 속에 들끓는 분노가 번뜩였다.
"그 끔찍한 저주를 알고도 공녀님을 공명실의 핵으로 밀어 넣었단 말입니까?"
"전하, 저는 공녀님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비극을 막기 위해……!"
"닥치십시오!"
카엘의 일갈이 천장을 뒤흔들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돌아섰다. 그의 시선이 엘리시아의 붉게 달아오른 손바닥에 가닿았다. 조금 전, 괴수의 핵을 부수던 순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던 억눌린 신음과, 핏기 없이 무너지던 모습이 그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카엘은 엘리시아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시선 높이에 맞추어 몸을 낮추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감싸 쥐었다. 갑주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손길은 굳어 있었다.
"공녀님."
카엘의 목소리가 짓눌린 칼날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숨을 깎아내어 지탱해야 하는 결계라면, 그따위 것은 무너져도 상관없습니다. 아스트라엘의 평화 따위를 위해 당신의 수명을 제물로 바치게 둘 순 없습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집요하리만치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를 옭아맸다.
"더 이상의 각인 개방은 불허합니다. 제 검을 쓰십시오. 결계가 깨지면 제가 벨 것이고, 괴수가 쏟아지면 기사단이 방패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힘을 단 한 줌도 다시 써서는 안 됩니다."
어두운 밤, 연구실 안쪽 비밀 서고는 탁자 위에 놓인 외톨이 촛불 하나에 의지해 위태로운 주황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찬 바람이 바닥에 흩어진 고서의 양피지들을 바스락거리게 만들었다.
카엘은 여전히 엘리시아의 손목을 쥔 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손바닥 한가운데 멍울처럼 번진 푸르스름한 피멍과 그 위로 희미하게 맥동하는 여덟 갈래 별 문양에 꽂혀 있었다. 괴수의 핵을 부수며 흘러든 반동은 살갗 아래 핏줄을 검붉게 태워 올린 상태였다.
"지금 당장 왕실 심층 방공호로 가셔야 합니다."
카엘의 음성은 단단한 쇳소리를 냈다. 그는 엘리시아를 일으켜 세우려는 듯 장갑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결계의 좌표를 빼돌린 자가 성채 내부에 있다면, 학회 역시 안전하지 않습니다. 결계석을 쥐어짜는 것은 제가, 그리고 북부의 기사단이 감당할 몫입니다. 공녀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보태실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시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짙푸른 눈동자 속에는 날카로운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자신을 지키겠다는 순수한 충정이었으나, 동시에 완벽한 통제였다.
엘리시아는 손목을 억센 힘으로 비틀지 않았다. 대신 비어 있는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카엘의 손목 갑주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강철의 냉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엘리시아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카엘의 손목을 바깥쪽으로 단호하게 밀어냈다.
"물러서라는 배려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카엘."
그녀의 목소리는 서고의 정적을 가르고 또렷하게 울렸다. 떨림조차 섞이지 않은 담담한 음성이었다. 카엘의 눈썹이 꿈틀했다.
"공녀님."
"당신은 내 방패이지, 나를 가두는 새장이 아닙니다."
엘리시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흐트러진 은빛 머리칼이 어깨 너머로 흘러내렸고, 보랏빛 눈동자는 촛불의 흔들림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카엘을 응시했다.
"나는 스무 해 동안 제국의 뒷방에서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방패막이가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무력한 삶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엘리시아는 피멍이 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여덟 갈래의 모서리가 제 살을 파고들 듯 박혀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서슬 퍼런 투지가 서려 있었다.
"초대의 맹약이 내 영혼을 갉아먹는 대가로 설계되어 있다면, 뜯어고치면 그만입니다. 내 피를 제물로 바치길 기다리는 저주 따위에 끌려다니지 않겠어요. 그리고 결계의 틈을 열어 괴수를 불러들인 자는 내 손으로 찾아내 그 목을 벨 겁니다."
카엘은 엘리시아의 얼굴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주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 군주의 위엄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섬기기로 맹세한 이가 나약하게 보호받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님을, 그는 다시금 뼈아프게 직시해야 했다. 카엘은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거두며 물러섰다. 그리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녀님의 뜻을 거스른 오만을 용서하십시오."
카엘의 고개가 깊숙이 숙여졌다. 은빛 칼집을 쥔 그의 손가락 마디에 단단한 힘이 들어갔다. 주군과 기사의 경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시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라온이 비틀거리며 흑요석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에는 자책을 넘어선 깊은 경의가 번져 있었다.
"공녀님."
라온은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낡은 양피지 묶음을 꺼내 들었다. 금박이 군데군데 벗겨진 채 굳게 묶여 있던 가죽 끈이 풀렸다.
"초대의 금서, 그 마지막 장입니다. 각인의 대가를 우회할 술식을 연구하다가 발견했으나, 너무나 위험하여 학회장조차 봉인해 두었던 기록입니다.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공녀님의 생명력을 갉아먹지 않고도 결계를 바로잡을 방도를 반드시 찾아내 바치겠습니다."
엘리시아는 라온이 내민 양피지를 건네받았다. 거친 표면 너머로 고대 마나의 잔향이 가늘게 전해졌다.
"방도를 찾는 것은 라온,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대신 내게 숨기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약조하겠습니다."
라온은 바닥에 한 손을 얹으며 머리를 숙였다. 그의 어조에는 학자로서의 온화함 대신 주군을 향한 결연한 복종이 실려 있었다.
라온은 이내 탁자 위에 흩어져 있던 깨진 결계석 파편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품에서 맑고 투명한 감별용 수정구를 꺼내 파편 한가운데 올려놓았다. 수정구 안으로 라온의 금빛 마나가 흘러들자, 깨진 돌 틈에 남아 있던 검붉은 기운이 서서히 솟아올랐다.
"결계의 균열을 유도한 자의 마나 잔흔을 역추적하겠습니다. 외부의 침입로를 열기 위해선 공명석의 고유 주파수를 내부에서 흔들어야만 했습니다. 그 흔적은 지울 수 없습니다."
수정구가 탁탁 소리를 내며 불규칙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연기가 둥근 표면 안쪽에서 맴돌더니, 마침내 하나의 형상을 빚어냈다.
날카로운 세 줄기 덩굴이 방패를 휘감고 있는 형상.
그 문장이 뚜렷한 음각으로 수정구 중앙에 떠오르는 순간, 연구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카엘이 검을 쥔 채 벼락 맞은 듯 몸을 굳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수정구 속 문장을 응시하며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바르샤트."
카엘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수도 방위군 총사령관, 벨리안 바르샤트 후작의 가문 문장입니다."
라온의 손끝이 파들거렸다. 수정구 속에서 타오르는 문장은 틀림없이 왕궁의 심장부를 지키는 방위군의 상징이었다. 성채의 문을 지켜야 할 자가 어둠을 향해 문을 열어젖혔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무겁게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