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공녀의 마법 로맨스 · 총 6화 · AI 작가 윤슬

제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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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연기 사이로 떠오른 덩굴과 방패의 문양은 수정구의 투명한 표면을 차갑게 물들이고 있었다.

서고 안의 공기가 삽시간에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카엘의 허리춤에서 푸른빛 오러가 칼날을 따라 번쩍였다. 그의 발걸음이 돌바닥을 무겁게 울리며 문가를 향했다.

"지금 즉시 수도에 주둔 중인 북부 기사단을 움직이겠습니다."

카엘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호수 밑바닥처럼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숨겨지지 않았다.

"바르샤트 후작가가 어둠의 무리와 결탁해 왕궁 결계를 건드렸다면 이는 명백한 대역죄입니다. 날이 밝아 방위군이 교대하기 전에 후작 저택을 포위하고 놈의 목을 베어 배후를 캐내겠습니다."

"멈추세요, 카엘."

엘리시아의 단호한 목소리가 서고의 벽을 때렸다.

카엘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는 그의 서늘한 푸른 눈동자에는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배신자를 향한 살의가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피멍이 든 손바닥을 천천히 쥐었다 펴며 카엘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검을 거두세요. 감정에 휘둘려 칼을 뽑을 때가 아닙니다."

"공녀님, 놈은 결계의 핵을 흔들어 공녀님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습니다. 시간을 주면 증거를 인멸하고 수도 방위군을 동원해 학회 전체를 봉쇄할 겁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안 됩니다."

엘리시아는 카엘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차분했다.

"수도 방위군은 수천에 달합니다. 아무런 공적 증좌도 없이 북부 대공의 사병이 총사령관의 사저를 기습한다면, 수도 사람들의 눈에는 누가 반역자로 보이겠습니까? 바르샤트 후작은 오히려 북부군이 황실을 위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 병력을 소집할 겁니다."

카엘의 턱선이 굳어졌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명분 없는 무력 행사는 적에게 방패를 쥐여주는 꼴이었다.

"그렇다면 이 배신을 그대로 두고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단죄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어떤 선언보다 서늘한 무게를 담고 있었다.

그때, 탁자 위에서 깨진 결계석을 들여다보던 라온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잠시만요, 두 분. 이 잔흔의 기록을 다시 보십시오."

라온이 지팡이 끝으로 수정구를 가볍게 두드리자, 공중에 흩날리던 검붉은 파편들이 세 갈래의 궤적으로 나뉘며 허공에 정지했다. 라온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외벽 결계의 공명 주파수를 왜곡한 것은 바르샤트 후작의 마나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결계가 깨진 시각과 연구실 테라스의 방어 마법진이 차단된 시각이 일치합니다."

엘리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라온?"

"외벽 결계가 뚫린다 해도, 이곳 고문서 연구실은 학회 중앙 마법탑의 독립 차폐 결계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침입한 괴수가 단번에 테라스로 들이닥치려면 중앙 통제실에서 이 구역의 방어 술식을 강제로 꺼주어야만 합니다."

라온은 손끝으로 마나의 흐름도를 허공에 그렸다. 황금빛 궤적이 마법 학회의 구조도를 그리며 붉은 점으로 수렴했다.

"그 통제실을 다룰 권한은 방위군 총사령관에게 없습니다. 오직 마법 학회 상층부, 그것도 최고 원로원 소속의 대마법사들에게만 부여된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연구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시아의 입술 끝이 차갑게 비틀렸다.

"외부의 칼날과 내부의 열쇠지기라. 바르샤트 후작 혼자의 짓이 아니었군요."

"그렇습니다."

라온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회 원로원 내부에도 손을 뻗은 자가 있습니다. 공녀님의 각성이 결계를 바로잡기 전에, 아예 싹을 잘라버리려 한 공모자입니다."

카엘의 눈빛이 다시금 맹렬하게 타올랐다. 적이 밖뿐만 아니라 이 성채 안, 학회의 심장부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위협의 크기를 몇 배로 키워 놓았다.

"당장 공녀님을 이곳에서 모셔 나가야 합니다. 내부 배신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학회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아니요, 카엘. 도망치는 자는 결코 판을 뒤집을 수 없습니다."

엘리시아는 초대의 금서 마지막 장을 가슴 안쪽에 단단히 갈무리했다.

"적이 원하는 것은 내가 두려움에 질려 숨거나, 성급하게 칼을 휘둘러 제 발로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계산을 정면에서 깨부수어야지요."

그녀는 곧장 카엘을 응시하며 명령을 내렸다.

"카엘, 당신은 지금 즉시 서고를 빠져나가 북부 사병들의 은밀한 연락망을 가동하세요. 바르샤트 후작의 저택을 치는 것이 아니라, 후작 휘하 방위군 제1, 2연대의 이동 경로를 감시하는 겁니다. 그들이 수도 밖이나 외곽 경계탑으로 병력을 빼돌리는 징후가 있는지 샅샅이 파악하세요."

카엘은 엘리시아의 지시를 들으며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적의 발목을 묶어두는 정확한 통찰이었다. 그러나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깊은 우려가 남아 있었다.

"공녀님 곁을 비울 수는 없습니다. 저 혼자 움직이면 학회 내부의 위협에 공녀님이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내 곁에는 라온이 있습니다."

엘리시아가 차분하게 라온을 가리켰다. 라온 역시 물러섬 없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대공 전하의 염려는 이해하나, 학회 내부의 마법적 동선과 결계 기록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공녀님을 지킬 터이니, 전하께서는 밖의 퇴로를 막아주십시오."

카엘의 시선이 라온에게 닿았다. 평소 학자 특유의 온화함만을 보이던 라온의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결기가 차올라 있었다.

카엘은 이내 엘리시아를 향해 깊숙이 상체를 숙였다.

"공녀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날이 밝기 전까지 바르샤트의 모든 병력 동향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겠습니다. 부디 무탈하십시오."

카엘은 망토를 휘감으며 서고의 비밀 문 너머로 신속하게 몸을 감추었다. 발소리조차 남기지 않는 기사의 움직임이었다.

카엘이 떠난 서고 안에는 엘리시아와 라온, 두 사람만이 남았다.

엘리시아는 바닥에 떨어진 결계석 파편을 내려다보며 라온에게 시선을 던졌다.

"라온, 방어 결계를 강제로 내린 자를 특정할 방법이 있습니까?"

"학회 최하층, 중앙 보관소에 결계 제어 기록 원부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마법탑의 술식을 조작했다면 인장과 마나 파동의 기록이 반드시 원부에 각인되어 남습니다."

"원로원 몰래 그 기록을 열람할 수 있나요?"

"정상적인 절차로는 원로회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수석 마법사에게 부여된 비상 열람권을 사용한다면, 제어 마법진의 봉인을 일시적으로 해제할 수 있습니다."

라온은 탁자 위에 놓인 감별용 수정구를 갈무리하며 서고 안쪽의 낡은 철제 문을 가리켰다. 그 문은 마법 학회의 가장 깊고 어두운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이 증거를 없애기 전에 먼저 도달해야 합니다."

"안내하세요."

엘리시아의 은빛 머리칼이 돌아선 어깨 위로 차갑게 흩날렸다. 두 사람은 서고의 주황빛 등불을 등진 채, 깊은 어둠이 가라앉은 지하 회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공기는 서늘해졌다. 수백 년 동안 봉인된 석벽 틈새로 서늘한 지하수가 스며 나오며 눅눅한 이끼 냄새를 풍겼다. 횃불 대신 천장에 박힌 창백한 형광석만이 두 사람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통로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청동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문 표면에는 마법 학회 원로원의 인장이 겹겹이 얽힌 채 봉인 마법진을 이루고 있었다.

라온이 품에서 은색 펜던트를 꺼내 문양 정중앙의 홈에 맞추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금빛 마나가 자물쇠 내부의 마법 회로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묵직한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청동 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 열렸다.

"원로원 비공개 열람실입니다. 학회 설립 이래 수도 결계의 모든 변동 사항이 이곳에 기록됩니다."

라온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까지 닿은 흑요석 서가들이 원형으로 늘어선 장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서가마다 보랏빛 보존 결계가 둘러쳐져 있었고, 서책들은 바깥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차갑게 침묵하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양피지 한 장을 펼쳤다. 앞서 라온이 건넸던 초대의 금서 마지막 장이었다. 찢겨 나간 테두리 위로 여덟 갈래 별 문양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힌 고대 제어식이 붉은 잉크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제어식이 결계의 본질이라고 했지요."

엘리시아가 묻자 라온은 중앙의 석재 받침대로 다가가 두꺼운 가죽 장정의 책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결계 제어 기록 원부였다.

"그렇습니다. 초대 공녀의 각인은 방어 결계의 열쇠가 아니라, 결계를 작동시키는 영구적인 마나 동력원이었습니다. 결계가 외부 충격을 받을 때마다 각인을 통해 공녀의 생명력과 영혼을 직접 추출해 방어막을 보충하도록 술식이 짜여 있었습니다."

라온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원부를 펼치는 그의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역대 학회장들은 이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별빛 왕가의 힘이 쇠락하자 그들은 다음 강림자가 나타났을 때 온전히 결계의 희생양으로 소모할 수 있도록, 대가를 우회할 수 있는 이 마지막 장만을 고의로 찢어 숨겼습니다. 학회가 수호하려던 평화는 공녀님의 목숨을 담보로 유지되는 기만이었던 것입니다."

학자의 단정한 얼굴 위로 짙은 자책이 번졌다. 지식을 탐구하고 세계의 균형을 지킨다는 마법 학회의 기저에 이토록 비열한 착취 구조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평생 학문에 몸담아온 라온에게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학회의 일원으로서 제가 이 썩은 고리를 진작 밝혀냈어야 했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며 쥐어짜듯 말했다.

그 순간, 엘리시아의 오른손 끝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 전 괴수의 핵을 부수며 과도하게 개방했던 각인의 반동이었다. 손바닥 중앙의 별 문양이 푸르스름한 한기를 내뿜더니, 순식간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얼어붙으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엘리시아는 숨을 고르며 손을 거두려 했으나, 라온의 시선이 먼저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공녀님, 손이……."

라온이 급히 엘리시아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살갗을 맞대는 순간 얼음장 같은 냉기가 전해져 왔다. 라온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따스하고 온화한 금빛 마나가 라온의 손바닥에서 피어나 엘리시아의 얼어붙은 손가락을 천천히 감싸 녹여 나갔다.

"무리하게 힘을 쓰신 탓에 각인이 체내 생명력을 급격히 끌어당긴 흔적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일찍 대처했더라면……."

라온의 말에는 자신을 향한 날 선 책망이 배어 있었다.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공녀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자괴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자신의 손을 덮은 라온의 따스한 마나를 거두어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인 라온을 똑바로 응시했다. 차갑게 식었던 보랏빛 눈동자에 서늘한 불꽃이 일었다.

"고개 들어요, 라온."

명령조의 단호한 음성이 조용한 지하 열람실에 울렸다.

"죄책감으로 무릎을 꿇고 자책하는 신하는 내게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학회의 전통에 얽매여 침묵했다면 배신자였겠지만, 당신은 금서를 내게 바쳤고 그 대가를 찾아내기 위해 여기에 섰습니다."

엘리시아는 마나로 데워진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라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신의 지식과 마나는 과거의 죄를 한탄하는 데 쓸 것이 아닙니다. 내 손으로 이 뒤틀린 맹약을 찢어발기고 학회의 기만을 부수는 데 쓰세요. 그것이 당신이 내게 바쳐야 할 진짜 충성입니다."

라온은 숨을 멈춘 채 엘리시아를 올려다보았다. 가련한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하고, 억압된 운명 자체를 지배하려는 주군의 위엄이 그곳에 있었다. 라온의 가슴 속을 맴돌던 자책과 혼란이 씻겨 나가고, 그 자리에 단단한 결기가 차올랐다.

"명심하겠습니다, 저의 주군이시여."

라온이 정중히 답하며 기록 원부로 시선을 돌렸다. 손끝의 떨림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는 금서의 제어식에 적힌 고대 좌표와 원부에 기록된 마나 변동 기록을 빠르게 대조하기 시작했다.

"테라스 습격 당시 결계의 공명 주파수가 뒤틀린 시점은 자정 정각입니다. 결계의 외부 방어망은 바르샤트 후작의 사병이 물리적으로 훼손했지만, 학회 내부에서 이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중앙 통제 마법진의 경보를 묵살한 승인 코드가 남아 있습니다."

라온의 손끝에서 뿜어진 금빛 마나가 양피지 위에 스며들자, 가려져 있던 은밀한 인장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푸른빛으로 굳어진 삼각 형태의 마법 서명이었다.

"이 서명은……."

라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학회 원로원의 수장이자, 결계 유지 위원회의 최고 책임자인 베르만 대마법사의 고유 인장입니다. 그가 바르샤트 후작에게 결계의 취약 경로를 열어주고 침입로를 유도한 공모자입니다."

원로원의 최상층부가 어둠의 무리와 손을 잡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수면 위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열람실 입구를 봉인하고 있던 청동 문의 마법진이 거칠게 요동쳤다.

챙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열람실 전체를 감싸고 있던 침묵 결계가 바깥에서부터 강제로 뜯겨 나갔다. 문틈 사이로 차갑고 끈적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며, 누군가의 묵직한 발소리가 지하 회랑의 정적을 깨뜨렸다.

바닥을 타고 기어든 것은 차가운 냉기가 아니라 살을 녹일 듯이 독한 비린내였다.

부서진 침묵 결계의 잔해 사이로 흑자색 마나가 바닥의 석판 틈새를 메우며 빠르게 번져 나갔다. 청동 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딸깍거리는 금속 태엽 소리가 기괴한 화음을 이루며 울렸다.

바르샤트 후작과 베르만 대마법사가 파놓은 함정이었다. 카엘이 방위군의 이동 경로를 감시하기 위해 서고를 빠져나간 사이, 기록 원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 지하 열람실로 향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복병을 배치해 둔 것이었다. 청동 문 너머로 이어진 유일한 퇴로가 순식간에 차단되며 두 사람은 이 음습한 지하 열람실에 갇히고 만 꼴이었다.

수도 방위군 사령부의 극비 병기인 살육 마도구들이었다. 인간의 살점을 찢기 위해 고안된 강철 거미 형상의 마도구 여섯 기가 회랑의 천장과 벽면을 타고 기어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들의 중심부에는 벨리안 바르샤트 후작의 문장이 푸른 불꽃을 뿜으며 박혀 있었다.

"차단 결계…… 통신석과 이동 마법진이 전부 먹통입니다."

라온이 쥐고 있던 통신석의 파편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으나,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방위군의 동향을 감시하러 학회를 비우신 틈을 정확히 노렸군요. 공명 지점을 뒤틀어 퇴로를 끊다니, 벨리안 바르샤트 후작은 처음부터 우리를 이 지하로 몰아넣고 덫을 놓아두었던 겁니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자가 누구든 산 채로 매장하기 위해서."

라온이 양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찬란한 금빛 마나가 뿜어져 나오며 반구형의 방어막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단단하게 덮었다.

끼기긱!

천장에서 낙하한 첫 번째 마도구의 날카로운 칼날 다리가 라온의 결계 표면을 긁어내렸다. 금빛 막 위에 거친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곧이어 회랑 전체의 공기가 급격하게 수축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물리적 기습이 아니었다. 열람실을 통째로 밀폐시켜 공기 중의 마나를 소멸시키는 질식 결계가 외벽에서부터 기동되고 있었다.

라온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공녀님, 제 등 뒤에 바짝 붙으십시오. 이 결계는 수도 방위군의 결계 순환 구조를 통째로 비틀어 설계된 고위 살상 진입니다. 제가 정면의 제어 핵을 억누르며 통로를 벌릴 테니, 안쪽 서가 뒤편의 배수로로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라온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며 방어 결계의 출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마나가 팽팽하게 팽창하자, 마도구들이 뿜어내는 검은 기운이 조금씩 밀려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 반동으로 라온의 입술 틈새에서 붉은 핏물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방위군의 고위 결계를 혼자만의 마나로 버텨내는 것은 수석 마법사라 할지라도 무리였다.

"공녀님께서는 아직 각인의 반동에서 회복되지 않으셨습니다. 더 이상 생명력을 소모하셨다간 혈관이 버티지 못합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제가 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길을 열 테니……."

"라온."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귓전을 때리는 금속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공녀님, 제발!"

라온이 다급하게 외치며 마나를 더 쥐어짜려 할 때였다.

엘리시아의 차가운 손이 거칠게 라온의 어깨깃을 낚아챘다. 망설임 없는 강한 힘에 라온의 상체가 순식간에 뒤로 끌어당겨졌다.

"읍……!"

중심을 잃고 물러선 라온의 시야에 엘리시아의 곧게 뻗은 등이 들어왔다. 은빛 머리칼이 일렁이는 결계의 바람을 타고 서늘하게 흩날렸다. 그녀는 라온을 자신의 등 뒤로 완전히 밀어 넣은 채, 쇄도하는 강철 마도구들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내 신하의 목숨을 헐값에 내던져 살아남는 군주 따위는 되지 않습니다."

엘리시아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테라스에서 괴수를 짓이기며 피멍이 든 손바닥이 드러났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찢어지고 살갗 아래로 검푸른 어혈이 맺혀 있었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공녀님, 손을 거두십시오! 각인을 또다시 강제로 개방하면……!"

"닥쳐요, 라온."

단호한 일갈이 라온의 턱을 꿰뚫듯 멎게 만들었다.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전 세계의 낡은 별채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던 공녀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남에게 지켜지기만을 바라는 인형은 사양이었다. 방패막이를 자처하는 기사나 제 목숨을 버려가며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마법사의 등 뒤에 숨어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를 지킨다는 핑계로 물러서게 하지 마세요. 카엘에게도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내 앞을 가로막는 방패가 되지 말라고."

엘리시아는 손바닥을 활짝 폈다.

짓이겨진 상처 틈새로 푸른빛의 섬광이 번뜩였다. 살갗 아래 깃들어 있던 여덟 갈래 별 문양이 마치 불길에 달궈진 인장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솟구치는 지독한 통증이 손목을 지나 팔꿈치까지 뻗쳤지만, 엘리시아의 손끝은 단 일 센티미터도 떨리지 않았다.

"공녀님……!"

라온이 경악에 찬 비명을 토해내며 손을 뻗었으나, 엘리시아가 방출한 순수한 별빛의 파동이 그를 부드럽지만 완강하게 밀어냈다. 상처 입은 몸 어디에서 이런 막대한 마나가 터져 나오는지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벨리안 바르샤트 후작이 나를 죽이려 든다면, 직접 내 목을 베러 와야 할 겁니다. 비겁하게 쇳덩이와 살상 결계 따위 뒤에 숨을 게 아니라."

엘리시아의 목소리에 서늘한 패기가 실렸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과 짙푸른 마나가 허공으로 치솟더니, 날카로운 나선형 창의 형태로 벼려졌다. 그 순수한 파괴력 앞에서 라온의 금빛 방어막조차 부르르 떨며 길을 비켜주었다.

키에에엑!

벽을 타고 내려오던 강철 거미들이 위협을 감지하고 일제히 날카로운 다리를 뻗으며 엘리시아를 향해 도약했다. 푸른 불꽃을 뿜어내는 마도구의 핵이 여섯 방향에서 동시에 쇄도했다. 칼날이 살점을 가르기 직전의 찰나, 엘리시아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부서져라."

단 한마디의 낭랑한 언령과 함께 여덟 갈래 별 각인이 찬란하게 폭발했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파열음이 지하 회랑을 뒤흔들었다. 정면에서 덮쳐오던 첫 번째 강철 거미가 별빛의 창에 정통으로 꿰뚫렸다. 바르샤트의 인장이 새겨진 핵이 허망하게 산산조각 났고, 거대한 쇳덩이는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벽면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어 잔여 마나가 회랑 전체로 뻗어 나가며 사방에 드리워져 있던 질식 결계의 마법진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천장에 새겨진 흑자색의 기괴한 문자판들이 엘리시아의 은빛 마나에 닿는 족족 유리창처럼 갈라지며 파편을 쏟아냈다.

"크윽……."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마침내 가느다란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각인의 힘을 억지로 끌어올린 대가로 생명력이 깎여 나가는 날카로운 한기가 폐부를 찔렀다. 눈앞이 순간 하얗게 점멸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벽을 짚지도,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을 다시금 단단히 쥐었을 뿐이다.

"공녀님, 제발 멈추십시오! 결계는 이미 부서졌습니다!"

라온이 피를 흘리는 입술을 닦을 새도 없이 다가와 엘리시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억누를 수 없는 경외감과 애통함으로 젖어 있었다.

엘리시아는 거친 숨을 내쉬며 라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 끝난 게 아닙니다, 라온."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반쯤 박살 난 청동 문 너머의 어두운 회랑을 노려보았다. 나머지 강철 거미들이 망가진 태엽을 덜거덕거리며 도주하고 있었다. 그 너머, 수도 방위군 사령부에서 이 모든 것을 꾸며냈을 벨리안 바르샤트 후작을 향해 엘리시아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손바닥 위의 여덟 갈래 별이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을 내뿜으며 닫힌 철문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