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석벽 틈새로 흙먼지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강철 거미의 파편이 바닥을 구르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목덜미를 옥죄던 질식 결계가 산산이 깨져 나가자, 지하 열람실을 메우고 있던 서늘한 이끼 냄새와 타버린 금속의 비린내가 단숨에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엘리시아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떨리는 오른팔을 내렸다. 살갗 아래 깃든 여덟 갈래 별 문양에서 푸른 불씨가 사그라지는 것과 동시에, 뼈마디를 도려내는 듯한 냉기가 손끝에서부터 어깨를 향해 치고 올라왔다. 각인을 억지로 개방해 생명력을 깎아 먹은 대가였다. 무릎이 꺾이며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는 순간, 라온이 황급히 다가와 팔을 뻗었다.
“공녀님!”
라온의 떨리는 손길이 닿기 직전, 엘리시아는 부서진 책장 모서리를 움켜쥐며 스스로 몸을 바로 세웠다. 거친 숨 사이로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시린 오한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라온의 손을 밀어냈다.
“기대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요.”
“하지만 손이 온통 찢기셨습니다. 무리해서 각인을 폭주시키시면 뼛속까지 마나가 타들어 갑니다!”
라온의 단정한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엘리시아의 완강한 태도에 차마 억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소매를 걷어올려 떨리는 손가락 끝에 온화한 연록색 빛무리를 피워 올렸다. 치유의 술식이었다. 은은한 빛이 허공을 맴돌며 엘리시아의 짓무른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찢겨 나간 살갗 틈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에 칼날 같던 한기가 겨우 한풀 꺾였으나, 살점 밑에 박힌 여덟 갈래 별 문양은 여전히 서늘한 푸른 잔광을 머금고 있었다.
라온은 입술을 짓이기며 시선을 떨구었다.
“학회가 저지른 기만이 공녀님을 여기까지 내몰았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원로원의 조작을 파헤쳤더라면, 공녀님께서 이토록 위험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셨을 텐데…… 전부 제 무지와 오만 탓입니다.”
“자책으로 낭비할 시간은 없어요.”
엘리시아는 손바닥에 맺힌 피를 털어내듯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통증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신경을 갉아먹던 냉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은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바닥에 흩어진 종잇장들을 서늘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원부를 챙기세요, 라온. 베르만 대마법사와 바르샤트 후작의 목을 왕실 법정에 나란히 매달 증거니까요.”
라온은 숨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반쯤 무너진 서가 틈바구니로 걸어가 검게 그을린 가죽 장정의 책자를 집어 들었다. 책 표지 중앙에는 마법 학회 원로원의 수장 베르만을 상징하는 세 겹의 원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안쪽 페이지를 넘기자, 수도 결계의 순환 궤적을 강제로 비틀어 특정 구역의 마나 농도를 떨어뜨린 날짜와 시각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테라스 습격 당시 어둠의 무리가 경계탑을 넘어올 수 있도록 학회 상층부에서 결계의 빗장을 풀어주었다는 명백한 조작 일지였다.
“원본은 무사합니다. 베르만의 고유 마나 파동이 문서 결속지에 온전히 깃들어 있어, 원로원의 그 누구도 위조라 발뺌하지 못할 겁니다.”
라온이 안도 섞인 어조로 서책을 방수 양피지에 싸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때, 엘리시아의 시선이 바닥에 뒹굴고 있던 강철 거미의 머리통 잔해에 멎었다. 별빛 마나의 폭격에 산산조각 난 동력핵 부근에서 가느다란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조각난 금속 껍데기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라온, 감별 수정구를 이리 가져와 봐요.”
라온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와 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내 잔해 위에 띄웠다. 수정구가 회전하며 푸른빛을 내뿜자, 그을음 속에 파묻혀 있던 작은 합금 판 하나가 투명하게 드러났다.
그곳에는 사나운 늑대의 형상을 본뜬 벨리안 바르샤트 후작 가문의 문장이 깊게 음각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늑대 문양의 테두리 바깥쪽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또 다른 문양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 잎의 월계관이 감싸고 있는 타원형 인장, 그 중앙에는 왕가의 고위 전령들만이 사용하는 암호화된 통신 각인이 핏빛 마나로 새겨져 있었다.
라온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건…… 왕실 시종부의 극비 통신 인장입니다. 군벌인 바르샤트 가문의 살상 마도구에 어째서 궁정 내부의 통신 코드가 박혀 있는 겁니까?”
“단순히 후작 한 사람의 욕심으로 벌인 반역이 아니라는 뜻이겠죠.”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부서진 금속 조각을 군홧발로 짓밟으며 손바닥의 각인을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바르샤트 후작은 총사령관의 권한으로 결계를 열고, 학회의 베르만은 기록을 은폐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의 뒤에는 공녀인 나를 결계의 제물로 던져 넣고 어둠의 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왕실 내부의 거물이 도사리고 있어요. 퍼즐이 맞춰지는군요.”
우르릉.
천장에서 굵직한 돌가루가 쏟아져 내리며 열람실 전체가 불길하게 뒤흔들렸다. 방어 결계와 질식 마법진이 연달아 파괴되면서 지하 지반을 지탱하던 마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곳곳의 흑요석 기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져 가며 묵직한 파열음이 회랑을 메웠다.
“공녀님, 서둘러야 합니다! 지반 결계가 한계에 달했습니다. 곧 이 구역 전체가 매몰될 겁니다!”
라온이 품속의 원부를 다시금 단단히 감싸 쥐며 열람실 한구석의 벽면을 가리켰다. 무너진 서가 뒤편으로 어른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석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학회 창립 초기 비상시를 대비해 수도 배수로와 연결해 두었던 극비 탈출로였다.
“사령부 외곽의 폐망루로 통하는 길입니다. 카엘 대공과 약조했던 접선 지점과도 멀지 않습니다.”
“앞장서요.”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무너져 내리는 석벽의 잔해를 피해 비밀 통로 안으로 신속히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 육중한 청동 문과 흑요석 서가들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통로를 타고 울려 퍼졌다. 눅눅한 지하 공기가 옷자락을 스쳤으나 엘리시아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바닥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품속에 쥔 명백한 증거와 마도구 핵에서 찾아낸 왕실의 인장은 적들의 숨통을 죌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될 터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좁은 회랑 끝에서, 사령부 외곽을 향해 뻗은 차가운 밤공기가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비밀 통로 출구를 막아서고 있던 녹슨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사령부 북벽 외곽의 마른 풀숲이 드러났다. 찬 바람이 뺨을 스치자마자 덤불 뒤편의 어둠 속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푸른빛이 감도는 칼집을 쥔 장신의 기사가 성큼 걸어 나왔다. 카엘 드 아르테미스 대공이었다.
카엘의 시선이 엘리시아의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에 멎었다. 서늘한 푸른 눈동자에 짧은 파문이 일었으나, 그는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허리춤의 검을 다잡으며 반 보 물러서 예를 갖추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공녀 전하. 학회 지하 쪽에서 지반이 무너지는 진동을 느꼈습니다.”
“바르샤트의 강철 거미를 처리하느라 지체되었어요.”
엘리시아는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잡으며 담담히 턱짓했다. 라온이 재빨리 품에서 방수 양피지에 싸인 원부와 조각난 금속판을 꺼내 카엘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베르만 대마법사가 숨겨둔 결계 조작 원부 원본입니다. 그리고…… 이 동력핵 파편을 보십시오, 대공 전하.”
라온의 말에 카엘이 시선을 내렸다. 늑대 문양 곁에 정교하게 박힌 왕실 시종부의 세 잎 월계관 인장을 확인한 순간, 카엘의 턱선이 굳어졌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검자루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바르샤트가 홀로 날뛸 수 있었던 뒷배가 마침내 드러났군요. 총사령관의 월권인 줄 알았더니, 궁정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베르만은 학회를 움직여 결계 기록을 지웠고, 바르샤트는 군대를 빼돌려 길을 열었죠. 그리고 시종부의 인장을 쥐고 흔든 자는 왕궁 안에서 이 모든 판을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엘리시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녀는 통증이 이는 손바닥을 단단히 쥐었다 펴며 카엘을 똑바로 응시했다.
“카엘, 북부군 기병대를 즉시 움직일 수 있습니까?”
카엘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루 아래 숲에 정예 백 기가 대기 중입니다. 바르샤트의 사령부 정문을 부수고 후작의 목을 끌고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사령부를 치면 왕궁의 배후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겁니다. 후작과 베르만이 입을 맞추기 전에, 새벽 조회에서 판을 엎어야 해요.”
엘리시아는 망토를 휘감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의 북부군으로 수도 외곽의 성문을 봉쇄하세요.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묶어둔 뒤, 날이 밝는 즉시 어전 회의장 문을 박살 내고 들어갈 겁니다.”
카엘의 입가에 엷고 서늘한 호선이 걸렸다. 그는 엘리시아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군주의 명을 받들었다.
“원하시는 대로. 이 칼은 전하의 길 앞에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카엘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으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엘리시아의 피 묻은 붕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단단하게 굳은 턱선 아래로 검은 제복의 옷깃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허리춤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검은 가죽 장갑 위로 서늘한 짙푸른 오러가 미세하게 튀었다. 무릎을 꿇고 충성을 고하는 기사의 자세였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화약고와 다름없었다.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카엘의 서늘한 푸른 눈을 응시했다.
“대공. 방위군의 동향을 보고하세요.”
카엘이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르샤트 후작은 한 시간 전부터 사령부 외곽의 순찰조를 거두어들였습니다. 제1, 제3 보병 연대를 사령부 안뜰과 중앙 집무동 인근으로 빽빽하게 재배치했습니다. 반면 서쪽 회랑과 결계 외벽 경계망은 절반 이하로 줄여 놓았습니다.”
“외곽 경계를 고의로 비워두었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외부 침입을 유도하거나, 유사시 사령부 내의 특정 인원을 빼돌리기 위한 통로를 터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사령부 심장부에는 후작의 직속 정예병만이 포진해 있습니다.”
보고를 마친 카엘의 시선이 사령부 본관의 붉은 등불을 향했다. 말을 맺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검자루를 틀어쥔 손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허리춤의 칼집이 기사의 살기 어린 마나를 견디지 못하고 잘게 진동했다.
단순히 지형과 병력을 파악한 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표적의 급소를 노려보는 맹수의 기색이었다. 그가 짚어낸 서쪽 회랑의 빈틈은 병력을 감시하기 위한 정보가 아니라, 단신으로 사령부 중앙까지 단숨에 베고 들어갈 침투로를 계산한 결과였다.
엘리시아는 반 보 앞으로 다가섰다.
“대공, 내 눈을 피하지 마세요. 당신 지금, 내 명을 어기고 혼자 후작의 목을 베러 갈 생각이었죠?”
공기가 일순 얼어붙었다.
라온이 화들짝 놀라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공 전하, 설마요? 공녀 전하께서 분명 북부군으로 수도 외곽을 봉쇄하고 정식 어전 회의에서 죄를 물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혼자 사령부에 뛰어들다니요!”
카엘은 라온의 외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피하지 않고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서글픈 분노가 짙게 깔린 눈이었다.
“명분을 갖추어 죄를 묻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체됩니다.”
카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파괴된 마도구에서 왕실 시종부의 인장이 나왔습니다. 후작의 반역 뒤에 궁정 내부의 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다면, 날이 밝아 어전 회의가 열리기 전에 저들이 먼저 손을 쓸 겁니다. 학회 지하에서 전하를 해치려 했던 것처럼 또다시 비열한 술수를 부릴 것입니다.”
카엘은 붕대에 싸인 엘리시아의 오른손을 직시했다.
“전하께서 결계와 마도구를 부수느라 흘리신 피입니다. 한 번 더 무리하시면 육신이 버텨내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 사령부로 쳐들어가 벨리안 바르샤트의 숨통을 끊어놓겠습니다. 북부 대공의 독단적인 월권이자 살인으로 처리하면 됩니다. 모든 오명과 대역죄는 제가 홀로 짊어질 테니, 전하께서는 무결한 군주로서 판을 수습하십시오.”
극단적인 충성심이 빚어낸 맹목적인 폭주였다. 카엘은 스스로를 버림돌로 던져서라도 엘리시아에게 닥칠 위험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어리석군요, 카엘 드 아르테미스.”
카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하.”
“내가 그대에게 바친 검을 내 뜻대로 휘두르라 명했을 텐데요. 그런데 내 등 뒤에서 칼을 빼 들고 멋대로 목을 치러 가겠다고요? 내 명을 거스르는 기사가 어찌 충신입니까.”
그때, 품속을 뒤적이던 라온이 베르만의 서랍에서 회수했던 또 다른 양피지 뭉치를 꺼내 들었다. 붉은 인장으로 봉인된 서신을 펼쳐 든 라온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공녀 전하, 이것을 보십시오! 베르만의 비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문서입니다. 결계 조작 원부 밑에 숨겨져 있던 왕실 암살 지령서입니다! 바르샤트 후작에게 하달된 최종 명령문인데, 결계가 무너지면 혼란을 틈타 공녀 전하뿐만 아니라 현 국왕 폐하까지 시해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습니다!”
지령서에 찍힌 왕실 시종부의 핏빛 인장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더는 날이 밝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바르샤트 후작은 이미 수도 방위군 본영에서 거사를 실행할 준비를 끝마쳤을 터였다.
엘리시아의 눈빛이 매섭게 벼려졌다.
“계획을 변경합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어전 회의를 소집할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 사령부 본영을 짓밟고 저들의 숨통을 끊어 놓겠습니다.”
엘리시아는 카엘을 향해 명령했다.
“카엘, 칼을 뽑으세요. 정면 돌파합니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카엘의 검신에서 짙푸른 오러가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망설임 없는 검풍이 사령부 본관의 육중한 정문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굉음과 함께 박살 난 청동 문 파편 너머로 사령부 본영의 넓은 대연무장이 드러났다. 어둠 속에 매복해 있던 방위군 정예병들이 검을 뽑아 들고 쇄도해 왔으나, 카엘의 서늘한 일격에 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셋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본영 중앙 대전으로 짓쳐 들어갔다. 대전 상석에는 벨리안 바르샤트 후작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발로 무덤에 기어들어 왔구나, 별빛의 계집.”
바르샤트 후작이 품속에서 칠흑 같은 암흑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검은 화염을 형상화한 듯한 마도구의 핵이 불길하게 공명하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뿜었다.
“여기서 네년의 심장을 꿰뚫어 제단에 바치겠다!”
후작이 마도구를 치켜들자, 뒤틀린 암흑의 광선이 엘리시아의 심장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공간을 찢어발기며 닥쳐오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암흑의 칼날이 엘리시아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전하의 앞을 가로막지 마라.”
카엘이 한 발 먼저 쏘아져 나가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허공을 가른 대검에서 터져 나온 눈부신 푸른빛의 오러가 거대한 방벽을 이루며 암흑 광선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쾅, 하는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암흑의 기운이 사방으로 산산이 흩어지며 대전 바닥을 검게 그을렸다.
카엘의 등 뒤에서 걸어 나온 엘리시아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붕대 감긴 손바닥 위로 여덟 갈래 별 문양이 눈이 멀 듯한 은빛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뼈마디를 도려내던 냉기는 어느새 배신자를 향한 서슬 퍼런 살기로 뒤바뀌어 있었다.
“바르샤트 후작. 왕가를 배신하고 결계를 무너뜨린 죄, 이 자리에서 직접 묻겠습니다.”
엘리시아의 손바닥에서 응축된 별빛 각인 마법이 굉음과 함께 폭발하며 대전 전체를 하얗게 뒤덮었다. 군주의 서릿발 같은 심판이 배신자의 목전을 향해 거침없이 내리꽂히고 있었다.